본문 바로가기
인하대와 하와이

8 하와이의 양대 산맥 - 박용만과 이승만

by 김진국기자 2016. 9. 23.

 

    

 

 

▲ 국민군단의 군사시범, 카할루(1916). /사진출처=<그들의 발자취>


   
▲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 살았던 빅아일랜드섬의 집. 2층 목조건물로 이뤄진 이 집엔 현재 하와이 현지주민이 살고 있어 30달러를 내고 들어갈 수 있었다. /빅아일랜드(하와이)=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 이승만이 호놀룰루에 도착한지 며칠 안돼 호놀룰루 기차역 앞에 나란히 선 이승만과 박용만. 왼쪽이 이승만, 오른쪽이 박용만이다. (1913년 4월20일 촬영)/사진출처=<이승만의 삶과 꿈>

 

  

    
▲ 박용만 장군이 일제에 대한 무력투쟁을 위해'대조선국민군단'의 군사훈련을 시키던 호놀룰루의 지역. 이 곳엔 현재 주택이 들어서 있다.

 


 

 

朴, 대조선국민군단 창설 호놀룰루 등지서 군사훈련
李, 자유·민주주의 사상 매료서구지향적 개혁 앞장
 노선 차이·자금 운영 갈등 교민사회 분열 '씨앗' 뿌려


"저 곳이 바로 박용만 장군께서 군사훈련을 하던 곳입니다."
지난 9월17일 오전 10시 45분(하와이 현지시각) 하와이 카메하메 고속도로 길가. 운전을 하던 하와이 교민이 구름으로 뒤덮인 산 아래 마을을 가리키며 말해줬다.
화려한 야자나무숲 사이로 별장 같은 주택 몇 개가 띄엄띄엄 눈에 들어왔다. 말의 근육처럼 갈라진 산세, 그 위를 덮은 육중한 구름. 독립운동가 박용만 장군이 일제를 공격하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훈련하던 지역은 마치 요새처럼 보였다.
하루 전인 16일 오후 1시 찾았던 빅아일랜드 이승만 박사의 거처와는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빅아일랜드의 빛바랜 자줏빛 2층 목조가옥엔 이 박사가 쓰던 커다란 물통이 아직까지 놓여 있었다.
이 박사가 심었다는 한 그루의 키 큰 소나무도 목격됐다. 집안을 휘휘 돌아보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2층 난간으로 목을 내민 채 이방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박용만과 이승만은 하와이 독립운동의 양대산맥이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한 때는 1913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승만은 1910년 고국에 돌아온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했다"며 '105인사건'을 조작하자 하와이로 향한다. 그런 그에게 팔을 벌린 사람이 독립운동가 박용만(1881~1928)이었다.
강원도 철원태생인 박용만이 이승만을 처음 만난 장소는 감옥이다.
박용만은 1904년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다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 '한성감옥'에 투옥된다.
이승만이 구한말 박영효의 급진개혁파 쿠데타 음모에 연루돼 1899년부터 감옥살이를 하던 장소였다.
박용만은 여기서 이승만과 형제가 될 것을 결의한 뒤 1905년 출옥, 미국 콜로라도 덴버로 향한다. 이때 이승만의 옥중저서 <독립정신>을 미국으로 반출하고 이승만의 외아들 봉수를 미국 동부까지 데려다 주기도 한다.
네브라스카 주립대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공부한 박용만은 ROTC과정까지 이수한 뒤 1910년 4월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 대학에 '한인소년병학교'를 개설한다.
한인학도 30명을 소집해 군사교육과 훈련을 실시하던 그는 1912년 12월 초, 하와이로 건너가 하와이국민회의 기관지 <신한국보>(나중에 <국민보>로 개칭) 주필직을 맡아 무장독립노선을 주장한다.
박용만은 1913년 6월11일 호놀룰루시 동북방향 코올라우구역 아후이마누에 위치한 파인애플농장에 '대조선국민군단'이란 독립군을 창설한다.
같은 해 8월 말엔 군단 부속의 '병학교'(속칭 산너머학교)를 개교했는데, 병학교 사관학도들은 하와이로 이민오기 전 대한제국 군대에서 복무했던 '광무군인'들이었다.
이들은 1917년 한인군단은 호놀룰루 다운타운에서 시가행진을 벌이는 등 하와이에서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쌓았다. 박용만은 그러나 1919년 5월 상하이로 건너가 활약하다가 1928년 10월17일 암살당한다.
양녕대군 15대손인 이경선의 아들로 태어난 승만은 13살 때부터 과거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한다.

이승만은 이후 배제학당에서 개화파 서재필을 만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배우며 서구지향적 개혁가로 성장한다.
훗날 '친미주의자'로 불린 건 배제학당 시절 미국의 정체제도와 자유, 법치사상에 매료되면서 부터다. 고종폐위운동에 연루돼 종신형을 선고받은 이승만은 옥중의 고통을 덜기 위해 기독교에 몰두했고 미국 선교사들은 이때 여러 서적을 감옥에 넣어준다.
이 중 1900년대초 자유주의적 기독교잡지인 <아웃룩>(Outlook)은 젊은 이승만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미국 사상과 잡지에 심취한 이승만의 영어실력도 나날이 발전한다. 그가 반공사상을 갖게 된 것은 1904~1905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부터로 알려졌다.
이승만이 옥중에서 펴낸 <독립정신>엔 러시아를 영토야욕을 가진 제국주의로 비판하고 있다.
하와이에 먼저 도착해 있던 박용만은 뒤에 온 이승만을 뜨겁게 환영한다.
1913년 하와이에 닿은 이승만은 1914년 8월29일 대조선국민군단의 병학교 막사 낙성식에 참석해 '믿음'이란 주제로 강연을 할 정도로 박용만을 지지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며 이승만이 무장투쟁노선을 고집하는 박용만의 국민군단계획을 '비현실적'이라며 비난하면서 둘의 사이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1914년 하와이에서 <태평양>잡지를 창간한 이승만은 박용만 장군의 노선에 반기를 든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문제였다. 독립운동 자금은 한정적이었던 반면, 박용만이 창설한 국민군단에 막대한 경비가 들어가고 있었고, 교육·외교의 독립운동노선을 걷던 이승만 역시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와이국민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하와이 교민사회가 갈라지고 이승만이 '분열주의자'란 비판이 인 것도 이때 부터다.
이후 박용만은 1928년 비명으로 생을 마친 반면,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 역임과 탄핵, 건국과 분단의 중심에서 영욕의 삶을 살다 1965년 하와이섬에서 생을 마친다.
처음 '형제'에서 훗날 '정적'으로 치달은 박용만과 이승만. 이 두 산맥이 노선의 차이로 갈등을 겪고 하와이 전체 교민사회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은 부정적인 측면이다.
그렇지만 박용만과 이승만 갈등의 끝 지점에 '독립'이란 하나의 대의가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빅아일랜드·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