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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와 하와이

7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의 독립운동

by 김진국기자 2016. 9. 24.

 

 

 

▲ 인하대총동창회 하와이역사문화탐방단 일행이 지난 9월16일(하와이 현지시각) 빅아일랜드섬 숯가마터를 찾아 밀림을 지나고 있다.

 

  

    
▲ 숯가마터는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숯을 구워내던 곳이다. 숯가마터 위를 인하대총동창회 하와이역사문화탐방단 일행이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다. /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 숯가마터 아래, 불을 때던 대형 연통이 심하게 부식된 채 금세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 나무를 실어나르던 쇠구조물.

 

    
▲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창립회원들(1909년). 앞줄 왼쪽부터 박상하, 정원명(초대회장), 강용수(비서), 뒷줄 안원규(재무), 홍인표(비서), 이내수(부회장), 성용환(총무), 성명미상./사진출처=<그들의 발자취>

 


열대 밀림서 숯 구워팔며 조국광복 자금 보태


    
사람 키 만한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자 무수한 나뭇가지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굵고 가는 나뭇가지들이 사선으로 빽빽한 밀림이었다. 하늘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고 땅은 물과 진흙으로 온통 질척질척했다.
 "여기에요, 여기!"
인하대총동창회 하와이역사문화탐방단 선두 그룹의 목소리가 빅아일랜드섬 올라아(Olaa) 지역에 울려퍼졌다. 소리를 따라 조금 더 깊이 들어갔을 때 수풀에 파묻힌 구조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숯을 실어 담는 쇠 구조물이었다. 납작한 쇠막대기가 가로세로로 엮여 모자이크 모양을 띠었다.
그 맞은 편으로는 시뻘겋게 부식한 사각형의 터널이 뻗어 있었다. 약 20여m로 뚫려 있는 쇠터널 안에 들어가 벽과 천장에 손을 대니 새빨간 녹이 묻어났다. 쓰윽 문지르자 크고 작은 녹가루가 뚝뚝 떨어졌다. 철로모양의 바닥 아래로 불을 때던 거대한 연통도 보였다. 심하게 부식돼 군데군데가 부서진 상태였다.
하와이 한인이민자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숯가마터'에 도착한 때는 지난 9월16일 오전 11시 쯤(현지시각). 숯가마터는 이승만 박사가 한인 이민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숯을 구워팔던 장소다.
1913년 2월 하와이에 처음 도착한 이승만은 하와이를 주거지로 미 본토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벌인다. 1919년 4월10일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같은 해 4월23일 한성(서울)에서 선포한 임시정부 집정관 총재로 추대된 그는 같은 해 9월 상하이와 한성의 임시정부를 통합한 통합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이후 미국에서 임정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이승만은 1920년 12월5일 상하이로 갔다가 6개월 만에 미국으로 되돌아온다. 이 때 '동지회'를 결성한다. 하와이 교포들이 부담해야 하는 임정자금 마련을 위해서였다.
이승만은 그러나 동지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노선 문제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많은 마찰을 빚었고, 1925년 3월18일 상하이에 있던 임정 의정원에 의해 대통령직을 탄핵당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 이승만은 독립운동 자금마련을 위한 '동지식산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를 통해 1926년 3월까지 3만 달러를 모금한 그는 그 가운데 1만 달러로 힐로 남쪽 18마일 떨어진 올라아 지역에 930에이커에 이르는 나무 임야를 매입한다. 동지식산주식회사는 1929년 6월 쯤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당국에 7만 피트의 선박건조용 목재를 납품한다. 그러나 불량품으로 퇴짜를 맞자 궁여지책끝에 숯을 생산하기로 결정한다. 24시간동안 4t의 숯을 구울 수 있는 용량의 숯가마가 완성됐고 매달 2천봉 씩의 군용폭발물 제조에 사용할 숯이 제조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5천t의 숯이 포틀랜드 마샬회사에 납품돼 검사를 받았지만 품질미달이란 판정을 받는다.
그 때 그 역사적 장소를 2011년 하와이역사문화탐방단이 찾아간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채 이역만리에서 떠돌아야 하는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미주와 하와이 각 지방에 흩어져 있던 한인들은 수십 개의 애국단체를 세운다. 특히 1908년 3월23일 장인환, 전명운의 친일주의자 스티븐스 암살은 미주 한인단체들의 정신적 단결을 촉발시킨 사건으로 작용한다.
당시 미국 4개주에서 활약하던 4처 지방총회 대표자들은 1912년 11월8일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도산 안창호, 부회장에 박용만 장군을 각각 선출한다. 이듬해 우남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 33년 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하면서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크게 세 축으로 전개된다.
하와이 이민1세들은 중노동을 해서 번 월급의 대부분을 내놓았고, 이 돈은 하와이와 중국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에 쓰여졌다. 한인 이민자들의 꿈이 돈을 벌어 조국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돌아갈 조국이 있어야 했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다.
하와이를 거점으로 하는 민족·독립운동은 이같은 배경에서 전개됐다. 그 중심에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이 있었고 그들은 각각 실력양성, 무력투쟁, 외교와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 노선을 주장하며 따로 또 같이 민족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