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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와 하와이

6 나라를 되찾는 첫걸음  - 하와이 이민자들의 교육

by 김진국기자 2016. 9. 24.

 

 

    
▲ 하와이 주립대학교 안에 있는'한국학연구소'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하와이대학 안에 세워진 외국건물이다. 지난 9월 14일 오후(하와이 현지시각) 인하대총동창회 하와이역사문화탐방단 일행이 연구소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내부. 이 곳에선 한국어는 물론 한국무용, 한국문학, 한국사 등 다양한 한국학 연구가 이뤄진다. 왼쪽 작은 문 안으로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이 보이고 일부 학생들이 복도에 앉아 쉬고 있다.

 

 

   
▲ 한국학연구소 앞에 있는'한미수교 백주년 기념비'.

 

  

    
▲ 한인이민자들은 1905년부터 각 섬의 한인교회마다 국어학교를 설립하고 매일 한글을 가르쳤다. 1907년부터 1909년 사이에 카우아이섬에는 동신학교, 육영학교, 신학의숙 등이 존재했다. 사진은 카우아이섬 국어학교 교사와 학생들(1907). /사진출처=<그들의 발자취>


"민족의 뿌리 잃지말자"… 한글사랑 끝없는 향학열

 

 1929년 섬 곳곳 24곳 개교 어린 학생은 물론 어른까지 배움열기 후끈
1947년 한인기독학원 폐교부지 매각대금 인하공과대 설립 종잣돈으로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은 국민이 무지했기 때문이며 이제 국권을 회복하려면 교육밖에 없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은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학교'를 세울 만큼 한인들의 교육열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루하루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하면서도 교육에 많은 열정을 쏟은 것은 교육만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기 이민자들은 민족의 뿌리를 잃지 않기 위해 한글교육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하와이 한인들을 위한 학원(학교)이 처음 세워진 때는 1904년 9월이다. 하와이 감리교선교회 감리사 워드만(John Wadman)은 포트 스트리트(Fort Street)에 조그만 건물을 빌려 학교를 개교한다. 어린이 6명·부인 2명·성인남자 3명이 학생이고, 교사는 서양여자 2인과 한국인 1명으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이었다. 개교하자 학생들이 점점 불어나더니 낮엔 어린이들과 부인들이, 밤엔 성인남자들로 교실이 꽉 찼다. 교육열이 높았던 한인들은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1905년 호놀룰루에 사는 몇 명의 한인들은 '교육회'를 결성한 뒤 한인을 위한 기숙학교를 세워줄 것을 워드만에게 요청한다. 이듬해 9월 한인들이 모은 2천 달러의 성금을 포함해 1만 8천 달러를 들여 '한인기숙학교'가 설립된다. 학교 건물이 서자 한인감리교회가 이사해 들어왔고 이때문에 '한인기지'라고도 불렸다. 첫 학기 65명의 학생이 공부하던 이 학교는 1907년 초 하와이 정부의 공식인가를 받은 초등학교가 된다. 오전엔 정규과목을 오후엔 한국역사와 성경을 한글로 가르쳤다. 학생들은 구두제조와 사진촬영 등 직업과목도 배울 수 있었다.
한인기숙학교 외 이올라니, 카와이아하오 세미나리(여학교), 세인트 루이스 등 사립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르렀다. 공립학교는 등록금이 없었으나 사립학교는 학비·기숙사비를 합해 1년 평균 60달러를 내야 했다. 당시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들의 임금이 평균 24~30달러였음을 감안할 때 한인 이민자들의 교육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 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이덕희 하와이 한인연구가는 "초기 이민자들의 뜨거운 교육열은 교육을 개인적 출세의 수단으로 본 것이 아니라, 교육만이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믿는데서 나온 것"이라고 자신의 책에서 밝히고 있다.
기 이민자 자녀들은 공립·사립 정규학교 외 한글학교를 다녔다. 한글학교는 1907년 4월5일 하와이섬 힐로지방에 세운 것이 그 효시다. 이후 힐로 한인감리교회가 1929년 3월5일 보영학교를 세울 때까지 하와이섬 곳곳엔 24개의 한글학교가 더 설립됐다. 한글학교에선 어린 학생뿐 아니라 한글을 모르는 어른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 하와이제도 25곳에 있던 한글학교 가운데 11개는 감리교회가 운영하던 곳이었으며 구세군·성공회·기독교회에서 각각 1개 씩의 한글학교를 세웠다. 1918년 감리교 선교회 회장은 연회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인들이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려는 의욕이 대단하며 대부분의 경우 교회를 중심으로 한글교육이 이루어진다. 한인교회들이 교회목사나 전도사를 위해서는 한 달에 2~5달러만 내면서 한글교사들에게는 15~20달러를 주고 있다.'
한인에 의해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된 시기는 1913년이라고 볼 수 있다. 그해 2월 호놀룰루에 도착, 한인사회를 돌아본 이승만 박사는 여자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한 채 농장에 머물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이 박사는 "여자 아이도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부모들을 설득하는 한편, 한인기숙학교 교장직을 맡게 된다.
이 박사는 이때 학교이름을 '한인중앙학교'로 바꾼다. 하와이 군도에 있는 모든 한인(한글) 학교의 중앙이란 뜻으로 개명한 것이다. 그러나 학교운영에 대한 하와이 감리교단의 간섭과 통제가 있자 이승만 박사는 1915년 6월 한인중앙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 가을 '한인여학원'을 설립, 교장으로 취임한다. 동포의 재정적 후원으로 설립한 학교였다.
한인여학원은 1918년 1월부터 남녀공학으로 바뀌면서 '한인기독학원'이란 이름으로 재개교한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이 학원은 1947년 폐교됐고 학교부지는 13만 8천500달러에 매각된다. 매각대금 가운데 5천 달러는 한인양로원 기부금으로, 나머지 13만 3천500달러는 훗날 인하공과대학 설립의 종잣돈의 일부로 각각 쓰여지게 된다.
2011년 9월. 하와이 한인교육은 이제 하와이 주립대학교 '한국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중이다. 이 곳에선 한국어는 물론 한국무용, 한국문학, 한국사 등 다양한 한국학 연구가 이뤄진다. 하와이대학은 1963년 본격적 한국어강좌를 개설했으며 1972년 한국학연구소를 창설하고 서대숙 박사를 초대 소장으로 임명한다.
인하대총동창회 하와이역사문화탐방단이 하와이 현지시각으로 지난 9월14일 오후 한국학연구소를 찾았다. 경복궁 근정전과 향원정을 모델로 건축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하와이대학 안에 세워진 외국 건물이라고 현지 관계자들이 말해줬다. 건물 안에선 금관·고려청자·거북선 등 한국을 상징하는 전시물과 1, 2층의 교실을 가득 메운 동포와 외국인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20세기 초 작은 교회에서 시작된 하와이 한인교육은 지금, '한국학'이란 국제적 학문으로 성장해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우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