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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와 하와이

5 하와이 이민사회의 구심점 - 교회

by 김진국기자 2016. 9. 24.

 


    
향수병 치료·영혼 안식처 … 독립운동 전초기지 역할도

 

 


▲ 호놀룰루의'한인기독교회'는 하와이 이민자들이 조국을 잊지 않기 위해 한국의'광화문'모양으로 만든 교회다. 교회 부근을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 한인기독교회 독립기념관 앞에 서 있는 우남 이승만 박사 동상

 


    
▲ '힐로한인기독교회'는 빅아일랜드섬에 지어진 교회다. 단층 건물의 교회 주변에 서 있는 야자수들이 이채롭다.

 


    
▲ 힐로한인기독교회에 보관 중인 1900년대 초중반 교회 재정 장부들. 자칫 훼손우려가 있어 정부차원의 보존이 시급한 유물들이다.

 

 

1903년 11월 호놀룰루에 첫 한인감리선교회 설립 

 교회마다 국어학교 세우고 교육계몽 활동 활발

 

 

석탑의 옥계석처럼 보이는 수려한 모양의 처마. 건물 정면으로 난 세 개의 홍예문. 지난 9월14일 오전 11시30분(이하 현지 시각) 호놀룰루에서 만난 '한인기독교회'는 '광화문'을 닮아 있다. 한민족의 유구함을 웅변이라도 하는 것일까. 교회는 호놀룰루의 하늘 아래 우뚝 솟은 채, 하늘보다 더 푸른 광채로 빛나는 중이다.
교회 뒤로 돌아가자 한 손엔 책을 들고, 다른 손은 하늘 높이 치켜든 동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한 우남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다.
그 뒤로 보이는 아담한 단층건물은 '독립기념관'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자 축음기, 타자기와 여러 서적 등 일제강점기 한인 이민자들이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한 흔적이 고색창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
호놀룰루에 한인기독교회가 있다면 빅아일랜드섬엔 '힐로한인기독교회'가 있었다.
호놀룰루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빅아일랜드섬에 도착한 지난 9월16일 낮 12시. 야자수에 둘러싸인 힐로한인기독교회 안으로 들어가자, 교회 관계자가 몇 개의 낡은 대학노트를 꺼내 보여준다.
1931년 성탄과 감사절, 1946~1955, 리대통령(이승만) 성신수입…, 노트에 쓰여진 내용은 1930년대 이후 교회 재정에 관한 것들이다. 재정장부에는 당시 교민들의 헌금내역과 동지회 회장 명의의 서신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누렇게 빛바랜 노트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한글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그 삐뚤빼뚤한 글씨가 어떤 유려한 서체보다 힘 있고 아름답게 다가온 것은 행간에 흐르는 '독립의지'의 기운 때문이었을 터였다.
힐로한인기독교회는 하와이의 독립단체 '동지회' 관련 문서도 보존하고 있었다.
하와이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향수병을 치료하는 하나의 작은 한국사회였고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
망망대해를 건너 이역만리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은 1903년 7월4일 오하우섬 모쿨리아 농장에서 첫 예배를 본 이래, 하와이 각지에 하나 둘 한인교회를 세워나간다.
최초의 한인교회가 세워진 때는 1903년 11월3일이다. 호놀룰루의 한인들은 이때 인천에서 통역으로 간 안정수 권사와 우병길(후에 윤병구로 알려짐)을 대표로 선출한다.
이들은 현지 감리교회 감리사인 '피어슨'(Pearson)과 논의 끝에 '한인감리선교회'(Korean Methodist Mission)를 설립하고 10일 '리버호텔 스트리트'에서 예배를 본다.
이때 예배를 집도한 사람이 인천내리교회 홍승하 전도사다.
1863년 경기도 영흥에서 태어난 그는 1902년 '감리교회신학회'를 수료한 뒤 하와이로 건너간다. '신민회'를 조직해 동포들을 보호하고 단합을 도모한 그는 호놀룰루에 한인감리교선교회를 창설한 뒤 하와이에 산재한 섬을 누비며 전도에 애쓴다.
한인감리선교회는 1905년 4월 정식교회로 인준돼 한인감리교회가 된다. 이후 각 지역엔 연차적으로 교회가 들어선다.
1905년에만 에바(4월), 와이파후(8월), 모쿨레이아(10월) 교회가 생겼다. 이어 1906년 11월에 리후에, 1907년엔 힐로(2월), 부네네(3월), 와이알루아(9월) 교회 설립이 이어진다. 1909년 와이아와(5월), 1911년 카후쿠(5월), 코나(7월), 1913년 파팔로아(8월), 1914년 호노카(6월) 교회에 이르기까지 하와이엔 한인들이 일하는 곳마다 십자가가 세워졌다.
한인감리교회는 교회마다 '국어학교'를 설치하고 1906년엔 '한인기숙학교'를 세워 중학교 입학을 위한 속성교과과정을 가르친다. 약 7년간 이 학교의 학장은 감리사 '워드만'(Wadman)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1913년 9월 한인기숙학교의 학장은 이승만 박사로 바뀐다.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했던 이승만 박사는 앞서 호놀룰루에 와 있던 독립운동가 박용만(1881~1928) 장군에게 "미국에 남아 외교와 출판사업을 하도록 도와달라"고 청원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 박사는 취임 뒤 한인기숙학교의 이름을 '한인중앙학원'으로 바꾸고 소학과, 고등과, 국어과, 한문과로 학과를 만든다. 이때 학생수는 남자가 28명, 여자가 24명이었다.
이 박사는 그러나 1914년 워드만과 의견충돌로 학교를 나온다. 이 박사가 박용만 장군이 운영하는 학교와 독립군단 '타어거부대'에 대해 "독립을 위한 현실적 대안이 아니다, 교육과 외교가 중요하다"며 감리교회와 갈등을 빚으며 또다른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 때 이 박사를 따르는 교인들도 함께 감리교회를 나온다. 1915년 6월 감리교회를 나온 이 박사는 1918년 7월29일 '신립교회'를 설립한다. 그 해 12월 이 교회의 이름을 '한인기독교회'라고 바꾼 뒤 1922년 스쿨 스트리트에 교회를 건축한다.
이후 1937년 릴리하 스트리트에 신축한 교회가 바로 지금의 한인기독교회다.
설립 초기, 애초의 감리교회와 이 박사의 교회가 갈등을 빚긴 했지만, 하와이 이민자들에게 있어 '교회'는 단순히 종교적 자유를 누리는 장소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에게 교회는 이민생활의 거의 전부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에 가면 중노동에 지친 영혼을 기댈 수 있었고 뿔뿔이 흩어졌던 동포들을 만나 고국에 대한 중요한 정보도 들을 수 있었다. 교회엔 루나(십장)들의 채찍도, 언어불통도 없었으며 어머니의 따뜻한 품 같은 한국어와 동포애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하와이 교포들이 낸 교회헌금으로 마련한 독립자금은 상해 임시정부 재정의 6~7할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기도 했다.
 /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