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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와 하와이

3. 하와이 이민자들은 어떻게 일했나  

by 김진국기자 2016. 9. 24.

 


 

    
▲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은 새벽 4시30분 기상,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하루 10시간 중노동을 해야 했다. 호놀룰루 사탕수수농장이었던 자리가 지금은 잡풀로 뒤덮였다. 호놀룰루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이 금세라도 비를 뿌릴 것 같다. /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 한인 노동자들이 사용했던 물통이다. 사탕수수 농장의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갈증을 달래던 필수 물품이었다. /사진출처=<한국이민사 박물관>

    
▲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의 십장인'루나'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이 가죽채찍으로 노동자들을 감시했다고 한다. /사진출처=<한국이민사 박물관>


    
▲ 하와이 파인애플 농장의 전경. 사탕수수밭과 함께 한인 이민자들이 일했던 곳이다. 한인 이민자들은 이 곳에서 고향에'금의환향'할 날 만을 손꼽으며'루나'라는 관리자들의 채찍과 욕설을 견뎌냈다.

 

    
▲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들이 목에 걸고 다녔던 속칭'방고'이다.'방고'란 번호의 일본식 발음으로 이 알루미늄 번호표가 이름을 대신했다./사진출처=<한국이민사 박물관>


    
▲ 1900년대 초, 파인애플 농장의 모습. 한 사람이 농기구를 들고 웃고 있고 뒤쪽으로도 사람들이 보인다. /사진출처=<그들의 발자취>

 

내 고향 내 조국 되찾는 그날 그리며…

 

새벽부터 하루 10시간 사탕수수·파인애플밭서 중노동
 외국인 감독 채찍·욕설 견디며 월급 저축·고국에 송금

 

지난 9월 17일 오후, '인하대 하와이역사문화탐방단'을 태운 버스가 하와이 호놀룰루 '카메하메하 도로'(Kamehameha hwy)를 질주했다. 도로 양 옆, 어느 순간 갑자기 등장한 평원이 한참동안 이어졌다. 수평선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평야였다. 바다 쪽으론 황금색 평야가, 산 방향으로는 카키빛을 띤 광야가 펼쳐지고 있었다.
 "10년 전만 해도 이곳은 사탕수수가 빽빽했어요. 그런데 사탕수수를 소비하는 미국 남부의 설탕 선호도가 추락하면서 대부분 파인애플이나 옥수수, 커피 농장으로 전환했지요."
현지 주민 김형준씨가 사탕수수 쭉정이만 남은 평원을 가리키며 설명해 줬다. 그는 "여기 30분만 서 있으면 살이 새빨갛게 익어버립니다"라고 덧붙였다.
황금벌판은 사탕수수 쭉정이였고 카키색평야는 파인애플 밭이었다.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잎을 뻗친 파인애플들이 억세 보인다. 황금벌판 뒤로 등푸른 물고기 같은 바다가 일렁이고 있다. 태평양은 평야 위에 얹혀진 것처럼 보인다. 바다를 응시한다….
1905년. 한 사내가 허리를 펴 바다 쪽을 바라본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온몸에 뒤집어 쓴 그의 몸은 벌겋게 부어올라 있다. 그의 왼 손엔 사탕수수 다발이, 오른 손엔 긴 칼이 들려 있다. 조선에서 망나니들이 죄인을 처형할 때 쓰던 것처럼 생긴 칼이다. 팔뚝은 온통 생채기로 빨간 줄을 그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그의 검붉은 얼굴 위로 주루룩 물기가 흘러내린다.
 "썬 오브 비치!, 허리 업!"(개XX! 빨리 일해!)
어디선가 욕설과 함께 채찍이 날아들었다. 사탕수수밭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십장 격인 '루나'였다. 채찍은 한인 노동자의 등짝 대신 밭을 내리쳤지만, 소스라치게 놀란 사내가 칼을 떨어뜨렸다. 사내는 재빨리 허리를 굽히며 칼을 집어들었다. '일본놈들 세상이 되었다는데 어머니는 괜찮으신걸까' '나라를 잃으면 돈을 벌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노동자의 머릿속엔 온갖 상념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사내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루나의 욕설과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환청처럼 울려퍼졌다.
농장 책임자인 루나들은 말을 탄 채 채찍을 들고 다니며 노동자들을 밀착 감시했다. 너무 피곤해 까무룩 잠이 든 사람에게도 어김없이 채찍의 위협은 가해졌다. 눈을 뜨지 못해 아예 눈을 감고 일하는 사람도 보였다.
1905년 하와이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는 약 5천여 명. 호놀룰루항으로 입국한 이들은 오아후섬, 하와이섬, 마우이섬, 카우아이섬 등에 퍼져 있는 60여 개의 사탕수수·파인애플 농장으로 나누어 배치됐다. 농장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씩 집단생활을 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한인 이민자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집을 '농막'(農幕)이라고 불렀다. 안쪽은 나무 칸을 쳐 놓은 침실이 있고 외벽엔 석회를 바른 판잣집이었다. 잠은 널판지를 잇댄 바닥에 마른 풀을 두툼하게 깐 뒤 이를 모포로 씌워 만든 침상에서 잤다. 이들은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하루 10시간 사탕수수를 베고 쌓고 나르는 일을 했다. 사탕수수 베는 일은 하와이 원주민어로 '오키 코(Oki Ko)라고 했다. 30명이 한 조가 되어 수수를 1.5m 정도 크기로 잘라 밭고랑에 쌓는 일이었다. 다른 조는 잘라 놓은 수숫대를 운반했다. '하파이 코'(Hapai Ko)라고 불린 이 일은 농장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으므로 주로 남자들의 몫이었다.
일하는 동안엔 허리를 펴선 안 되었고 담배를 피울 수도 없었다. 노동자들은 이름 대신 죄수처럼 번호가 불리워졌다. 30분이란 짧은 식사시간 동안 한인 이민자들은 쌀과 야채, 절인 생선, 우유 등을 허겁지겁 먹어야 했다. 하지만 번 돈의 일부는 고향 인천에 보내고 일부는 저축을 해야 했으므로 배불리 먹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렇듯 하루종일 중노동을 해서 손아귀에 쥘 수 있는 돈은 남자 1달러25센트, 여자는 50~65센트에 불과했다. 그나마 일요일과 공휴일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자들이 받는 월급은 16~18달러가 고작이었다. 이 돈으로 밥값 6달러와 세탁비 1달러를 제하고 나면 별로 남는 것도없었으므로, 노동자들은 먹는 것을 더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겐 빚까지 지워져 있었다. 농장주들로부터 하와이까지 오는 배삯과 하와이 상륙비조로 빌린 50달러의 부채가 있었던 것이다. 한인 이민자들은 결국 2년 간, 단 1달러도 손에 쥐어보지 못한 채 사실상 노예로 지내야 했다.
경제적 문제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정신적 핍박과 황폐함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루나들은 험한 인상과 알아들을 수 없는 욕, 그리고 채찍으로 노동자들을 사정없이 다스렸다. 채찍으로 때렸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확실한 자료가 없으나 적어도 루나들이 채찍으로 노동자들을 부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인 이민자들이 말이나 소와 같이 일하는 짐승 취급을 받았다는 말이다.
농장주들은 특히 같은 민족의 루나를 고용할 경우 생산성이 떨어질 것을 우려, 노동자들과는 다른 민족을 루나로 채용했다. 한국인을 담당했던 루나들은 독일인이 많았다. 농장엔 또한 이 루나들을 감시하는 또다른 감독들이 있었다. 이 감독들 역시 매일 부과된 작업량을 꼼꼼히 파악하고 다녔으므로 루나들은 이들에게 밉보이지 않도록 노동자들을 두 배, 세 배로 착취할 수밖에 없었다. 한 농장엔 보통 한국, 일본, 중국,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포르투갈인들이 뒤섞여 있었다. 집단행동을 예방하려는 농장주들의 술책이었다.
하와이엔 이민자들이 기대했던 따뜻한 집도, 배불리 먹을 음식도 없었다. 순식간에 살을 익히는 태평양의 작열하는 뙤약볕과 끝이 보이지 않는 사탕수수밭, 그리고 파인애플밭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아니, 돌아갈 조국이 없었다. 1905년은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맺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란 거대한 음모의 실현을 향해 착착 준비해 나가던 시기였던 것이다.
한인이민자들은 마침내 그 곳에서 뿌리를 내리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어느 민족보다도 강인한 정신력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무섭게 일하기 시작한다. 하와이 이민사에서 한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은 마침내 나라를 되찾는 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조국을 재건하겠다는 의지에서 샘솟은 것이었다.
 /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