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하대와 하와이

2. 그들은 왜 하와이로 갔는가  - 인천내리교회와 이민의 배경

by 김진국기자 2016. 9. 24.


    
▲ 인천내리교회 안에 있는'존스'목사의 흉상. 존스는'아펜젤러'에 이은 인천내리교회 2대 목사로, 교회신자들에게 하와이 이민을 권장했다

 

 

 

    
▲ 하와이 첫 이민자들의 과반수는 인천내리교회 교인들이었다. 인천항 개항과 더불어 1885년 설립된 인천 내리감리교회는 우리 나라 기독교 전파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인천시 중구 내동 인천내리교회 십자가가 가을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다.

 

 

   

    
▲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을 태운'갤릭호'가 1903년 1월 13일 도착한 호놀룰루항. 이 곳은 진주만과 함께 호놀룰루에서 수심이 가장 깊어 큰 배들이 정박하기에 적당한 항구이다. 호놀룰루의 바다와 하늘이 코발트 블루의 빛깔로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다. /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한말"빈곤 벗어나자"…'젖과 꿀'찾아 태평양 건너

 

 

 '조원시(G.H.Jones) 목사를 쓰시어 1903년 1월 13일 미주땅에 한인 디아스포라를 허락하셨다. 그 해 11월 10일에 인천내리교회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하와이 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니 해외에 설립된 최초의 인천내리교회 지교회이다 ….'
인천시 중구 내동 29번지. 인천내리교회 붉은 벽돌담에 붙여진 글씨가 도드라져 보인다. 한 세기 전, 인천내리교회에서 떠난 이민자들을 기리기 위해 2003년 새긴 동판이다. 교회 한 켠, 뜰에 나란히 서 있는 세 개의 흉상. 한국 최초의 감리교 목사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1858~1902)와 그의 후임 존스 목사, 한국인 최초 목사 김기범은 교회 입구에서 동상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중이다.
1885년 4월 제물포항에서 시작된 한국 개신교회 선교의 첫 열매로 탄생한 내리교회는 첫 하와이 이민자 다수를 보낸 곳이다.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102명의 이민자 가운데 과반수가 내리교회 신자였다. 내리교회 교인들은 왜 하와이로 간 걸까.
 '하와이 군도로 누구든지 일신이나 혹 권속을 데리고 와서 정착하고자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 편리함을 공급하노라 … 기후는 온화하야 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으므로 각인의 기질에 합당함 … 월급은 미국 금전으로 매월 십오원(일본 금화 삼십원 : 대한돈으로 오십칠원 가량)씩이고, 일하는 시간은 매일 십 시간동안이요, 일요일에는 휴식함 …'
1903년(고종 40) 8월 6일 인천, 서울, 부산, 원산 등에 나붙었던 '이민공고문'은 날씨가 좋고 학비가 없어도 자녀를 교육시킬 수 있다는 등의 달콤한 문구를 명시하고 있다. 이민에 관한 일은 궁내부 '수민원'(총재 민영환)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론 인천 중구 내동 203번지 '동서개발주식회사'가 주도했다.
하와이 사탕지배자협회 한국대리점 성격을 띤 회사였다. 이 회사 책임자 데쉴러는 미국 오하이오주 은행가 집안 후손으로 1902년 12월부터 1905년 중반까지 7천500여 명의 한국인을 하와이로 이민시킨 책임자였다.
첫 이민선이 제물포항을 떠나기 전, 사람들의 머릿속으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유혹과 서구사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교차했다. 빈곤과 무지의 굴레를 벗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을 떠나 아주 멀리 가야한다는 사실은 위기였다. 사람들은 망설였다. 머뭇거리던 사람들에게 이민에 대한 확신을 준 사람이 바로 인천내리교회 담임목사 '존스'(George Heber Jones·1867~1919)이다. 존스 목사는 데쉴러의 요청이 있자 인천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이민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1888년 한국에 와 배재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던 존스 목사는 1892년부터 인천내리교회 목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교회의 성실한 청년들을 동서개발회사에 취직시켜주는 한편, 교인들에게 하와이 이민의 필요성을 설교했다. 그의 권유로 교인 50여 명과 인천항 노무자 20여 명이 첫 이민선에 올랐다. 이후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하와이로 떠나며 교인수가 점차 감소하자 서양선교사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이민을 신청한 사람들의 65%는 글을 모르는 서민층이었다.
이 같은 이민대열에 교회 중진들이 합류한 것은 존스 목사의 권유와 함께 동서개발회사 총무였던 인천내리교회 전도사 장경화가 함께 움직였기 때문이다. 인천내리교회가 이민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은 안정수 권사, 홍승하 전도사를 최초 해외선교사로 파송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데쉴러는 사탕수수밭이나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할 수 있는 단순 노동자를 원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민을 신청한 사람은 교인들이 가장 많았다. 첫 이민단을 장경화 전도사가 인솔하고 안정수 권사가 통역을 맡은 것도 이 때문이다. 또 내리교회 홍승하 전도사는 선교를 위해 파송됐으며 7천 여명의 이민자들 가운데 교회 중진만도 30여 명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신학문에 열망을 가진 청년들, 도시노동자, 하급공무원, 한말의 군인, 정치망명객 등이 뒤섞여 있었다. 이민사회엔 더 이상 양반도 상놈도 없었다. 오직 똑같은 인간과 삶과 죽음의 경계선만이 존재했다. 이민자들은 구한말의 불안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그 탈출구는 바로 하와이 이민이었던 것이다.
하와이 이민의 중요한 의의 가운데 하나는 평등한 신분제 사회로의 전환과 해외독립투사로서의 활동이다. 하와이에 도착한 한국인들은 평등한 신분 아래 독자적 자치제를 통한 집단생활을 했으며 을사조약 이후 모두가 독립투사로 변신했다. 하와이 이민자들은 하루 10시간 사탕수수밭에서 중노동을 해 번 달러를 모아 독립운동자금과 교육비로 고국에 보낸다. 그 결과 조국은 1945년 광복을 맞았으며, 인천의 '인', 하와이의 '하'자를 딴 '인하공과대학'(현 인하대학교)이 설립돼 유구한 민족사학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1902년 12월 22일. 마침내 제물포항(현 인천항)에서 첫 이민자들이 하와이를 향해 출발했다. 배를 갈아타기 위해 나카사키항에 도착한 이민자 가운데 19명은 신체검사에서 탈락한다. 나머지 사람들을 태운 미국상선 '갤릭호'는 1903년 1월 13일 마침내 호놀룰루항 외곽 샌드아일랜드에 닿는다. 여기서 또다시 이민국 검역관 검사를 받아 눈병을 앓던 16명이 배에서 내려보지도 못 하고 다시 인천항으로 되돌아 간다. 남은 사람은 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2명. 이 86명의 한인들이 바로 처음 호놀룰루항에 내릴 수 있었던 첫 이민자들이었다.
그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된 호놀룰루항의 2011년 가을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지금은 한국에서 8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 109년 전, 이 땅을 찾아 선실 바닥에서 먹고 자며 공룡처럼 덮쳐오는 파도로 수십 일간 바닷병을 앓으며 망망대해를 건너왔을 이민자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숙연해진다.
 /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김칭우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