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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와 하와이

4 결혼 위해 고국에 보낸 젊은시절의 사진 - 사진결혼

by 김진국기자 2016. 9. 24.

 


    
▲ 사진신부들이 하와이에 도착해 일했던 호놀룰루 사탕수수농장. 사탕수수산업의 사양으로 지금 이곳은 잡풀로 뒤덮여 있다. /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 1913년경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사진신부들이 각자의 짝을 찾아 헤어지기 직전에 찍은 기념사진./사진제공=<한국이민사 박물관>

 

  

    
▲ 한인 이민자들이 하와이로 이민갈 때 사용했던 여행가방. /사진제공=<한국이민사 박물관>

 

 

    
▲ '사진신부'들은 집안일과 자녀교육, 사탕수수농장에서의 노동 등 1인 3역을 해야 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설치한 사진신부 모형. 여인이 밥상을 준비하고 있다./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 '사진신부'들은 집안일과 자녀교육, 사탕수수농장에서의 노동 등 1인 3역을 해야 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에 설치한 사진신부 모형. 여인이 요리를 하기 위해 장을 푸고 있다./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멋진 신랑 기대감은 사라지고 눈물 젖은 신혼생활

 


비교적 지식·교양 수준 높았던 17~18세 조선 처자들
 아버지뻘 노총각·홀아비와 혼인가사·노동·자녀교육 맡아
 탄탄한 한인사회 구축 큰 도움

 

 

 조선 처녀들을 태운 배가 천천히 호놀룰루항에 닿았다. 선실엔 성숙해 보이는 여자도 있었지만,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 괴나리봇짐, 가죽가방 등 자신들의 짐을 챙기는 처녀들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한 소녀가 자신의 짐 깊숙히 넣어뒀던 사진을 꺼내들었다. 다른 처녀들도 하나 둘 사진을 꺼내기 시작했다. 낭군감을 지긋이 바라보는 처녀들의 얼굴이 하와이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다. 선실을 빠져나온 여자들의 모습이 드러나자 항구에 무리지어 있던 남자들이 웅성댔다. 처녀들이 줄지어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첫 소녀가 육지에 발을 내딛는 순간, 어디선가 악을 쓰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여보! 여기요 여기!"
한 중년 남자가 다짜고짜 "여보!"라고 외치며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소녀가 뒷걸음질을 치며 주름이 자글자글한 사내를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나요, 나! 내가 바로 그 사진 속의 사람, 당신 남편이란 말이오!"
당황한 소녀가 사진과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사진과 남자는 영 딴판이었다. 사진 속에선 20대의 반듯한 남자가 웃고 있었으나, 사진의 주인공이라고 주장한 남자는 늙수그레한 중년이었던 것이다. 소녀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사진만 보고 결혼을 결심, 망망대해를 건너왔는데 옛날 사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소녀가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호놀룰루항 여기저기서 조선 처녀들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1910년대 하와이에선 '사진결혼'이란 말이 등장한다. 하와이 한인노동자와 조선의 처녀가 사진으로 선을 본 뒤 결혼을 했던 일을 말한다.
1905~1907년 1천여 명의 한인들이 사탕수수농장을 탈출해 캘리포니아로 건너갔을 만큼 하와이 한인1세대들의 현지생활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노예와 같은 중노동보다 더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태어나고 자란 고국산천과 가족을 두고 태평양 한 가운데 떠 있는 섬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민자들. 그들의 삶을 위무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가족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한인이민자들 대부분은 홀아비이거나 노총각들이었다. 그들은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술과 노름에 젖는 것은 물론이고 아편까지 하는 사람마저 생겨났다. 이는 곧바로 사탕수수농장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졌다.
그 이유를 파악하던 농장주들과 하와이이민국은 한인노동자들 대부분이 '혼자 사는 남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사진혼인법'을 지지, 미정부당국의 허락을 얻어낸다.
이에 따라 1902년 시작한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이 일본의 방해로 1905년 중단됐음에도 사진신부들에겐 입국과 함께 영주권까지 주어진다.
실제 1905년, 하와이의 한국인 남자는 7천여 명인데 반해 여자는 700여 명에 불과했다. 보수적인 유교사회에서 자란 조선의 노총각들에게 백인여자나 원주민과의 결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진결혼이 가능해지자 홀아비들은 20~30대 찍은 사진을 보낸다. 이를 받아 본 국내의 17~18세 처녀들은 사진 한장만 굳게 믿고 망망대해를 건너온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14년 3월7일자 '국민보' 1면엔 '합중국 중앙정부에서 사진혼인을 금지코져'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이민국 총감 캐디네티가 상공부에 사진혼인을 금지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2면에도 '하와이가 낙원이냐 지옥이냐?' '사진혼인의 결과가 인도를 멸망' '수십원 혼인구문이 사람의 일평생을 그르게 함'이라는 작은 제목들을 단 전면 사설이 실린다. 당시 이 신문의 편집인은 하와이의 독립운동가 박용만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사진혼인 중매자들이 거짓말로 본국 여자들과의 결혼을 주선해 불행해진다는 것이었다. 이 신문은 '소위 은행가, 실업가, 대학생, 애국지사가 다 일찍이 은행의 이름도 모르던 사람이요, 실업의 구경도 못하던 사람이요, 대학교는 고사하고 소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사람이요, 애국성은 고사하고 망국한도 모르는 사람이다. 더구나 국민회 임원이나 예수교 임직원이라고 하는 것은 더 기가 막히다'라며 사진결혼의 폐해를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신부의 하와이행은 계속된다. 1910년 12월2일 최초의 한인신부가 호놀룰루땅을 밟은 이래 1924년 미국의 새 이민법이 제정돼 모든 동양인의 입국이 중단되기까지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 800여 명 가운데 680명이 사진신부였다. 남편감을 만난 사진신부들은 크게 실망해 되돌아가려 했지만 귀국비용이 없어 불가능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진신부들은 결국 하와이 한인사회 속으로 합류하게 된다.
사진결혼은 하와이 이민사에서 몇몇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진신부들의 이민으로 한인사회가 안정적이 됐다는 사실이다.
사진신부들은 남자들보다 훨씬 젊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수준 또한 상당했다. 그런 사진신부들은 가사는 물론이고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동까지 하며 일정부분 경제적 역할을 담당했다. 또 타국에서 당한 실망과 좌절을 극복하기 위한 돌파구를 자녀교육에서 찾음으로써 탄탄한 한인사회를 구축해냈다. 딸과 같은 나이지만 지적·교양적인 면에서 자신보다 우수한 사진신부를 맞은 이민1세들은 술과 노름을 끊고 자녀교육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이민1세대들의 결합은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으로 이어져 1945년 조국광복과 1954년 인하공과대학교 설립이란 결실을 맺는데 큰 몫을 수행하게 된다.
 /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