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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와 하와이

1. 프롤로그- 인천에서 호놀룰루까지, 그 110년의 세월

by 김진국기자 2016. 9. 24.

사탕수수 농사로 일궈낸 한인 이민자들의 영광

 

중노동으로 번 쌈짓돈 고국 독립자금·교육비로 전달
 최초 이민 후 한세기 … 4만5천명 현지서 영향력 발휘

 

 

2011년 가을 아침. 햇살이 드리워진 바다가 비현실적인 푸른 빛으로 출렁인다. 그 위로 열려진 쪽빛 하늘. 호놀룰루항의 하늘과 바다는 같으면서도 다른 빛깔을 경쟁적으로 발산하며 푸르름의 향연을 시작하는 중이다. 1902년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이듬해 1월 호놀룰루항에 닿았던 한인 최초 이민자들. 그들은 이 바다와 하늘, 공작의 깃털처럼 수려한 잎을 사방으로 뻗친 야자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109년 전, 102명의 한인 이민자를 실은 '갤릭호'(S.S.Gaelic)가 들어왔던 항구엔 지금 몇 척의 유람선들이 귀부인 같은 자태로 정박 중이다. '알로하타워'란 복합쇼핑단지는 하와이의 여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 이민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하와이 이민자들이 하와이 땅에 첫 발을 디딘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바다와 하늘만 보이는 망망대해를 건너 태평양 한 가운데 정착했던 그들은 어떤 삶의 길을 걸어왔는가.
1902년 양력 12월22일 제물포항(현 인천항). 일본 배 켄카이마루(玄海丸) 난간에 선 조선인들이 부두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두 손을 흔들었다. 진눈깨비인가, 눈물인가. 자식과 형제 자매를 보내는 가족들의 얼굴 위로 물기가 흘러내렸다. 바다 속에서 차가운 금속성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닻줄이 감기고 뱃고동소리가 몇 차례 울려퍼진 뒤 121명의 하와이 이민자를 실은 배가 겨울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이 배엔 하와이 이민을 주선한 동서개발회사 데쉴러(David W. Deshler)도 함께 타고 있었다.
배는 목포와 부산을 거쳐 12월24일 일본 나카사키항에 도착했다. 일본에서 미국 배 갤릭호(S.S.Gaelic)를 기다리는 동안 한인 이민자들은 신체검사를 받았다. 19명이 탈락했다. 신체검사에 합격한 102명은 1903년 1월2일 나카사키를 출발, 호놀룰루로 향했다. 그렇게 인천에서 첫 배가 떠난 이래 1905년 8월까지 모두 7천200여 명의 한인들이 미국으로 떠났다.
한인들의 정식이민이 시작된 건 구한말이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20년 뒤인 1902년. 고종황제는 한인들의 미국이민을 공식 허락한다. 친분이 깊던 미국공사 알렌(Allen)의 권유에 따른 조치였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을사조약 강제체결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며 한인 이민은 중단된다. 일찍부터 하와이 이민에 나섰던 일본이 한인 이민을 금지한 것이다. 당시 하와이의 총인구는 19만 명 정도였고 이 중 일본인이 6만 명이었다. 이는 하와이 원주민 3만8천 명, 중국인 2만5천 명, 미국인 1만5천 명보다 많은 수치였다.
1890년 후반부터 사실상 중지된 일본 노동자들의 미국 입국은 1908년 미·일 신사협정으로 일부 변경된다. 이후 1924년 '동양인배척법'이 통과될 때까지 이민자 가족의 미국 정착이 가능해진다. 이에 따라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 한국 이민자들도 1910~1924년 고국에 두고 온 가족과 신부 등 800여 명을 데려올 수 있었다. '사진신부'(Picture bride)도 이때 등장한다. '사진신부'란 사진을 통해 선을 본 뒤 결혼을 하는 제도였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한인들은 사탕수수밭에서 중노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새벽 5시 기상,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드는 병마… 한인 이민자들의 미국에서의 삶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잡초를 뽑고, 수수를 자르는 일은 여자들이 했고 남자들은 쌓아놓은 수수를 기차나 마차에 실었다.
1905년, 4천900여 명의 한인들은 32개 농장에 흩어져 일하고 있었다. 오아후의 에바 농장, 마우이 섬, 하와이 섬, 카우아이 섬 등 하와이제도 8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한인들이 일터였다.
이민 초기 10년이 한인 사회 터잡기 시기였다면 이후 10년은 제도가 안정되는 기간이었다. '국민회'라는 국가를 대신할 단체가 설립됐고, 한글학교와 일반학교가 생겼다. 신문이 발간되고 교회도 설립됐다. 국민회는 잃어버린 나라의 구심점 역할을 한 조직이다. 국민회를 이끈 박용만과 이승만 두 사람은 1913년 초 서로 협조·견제하면서 한인사회를 견인해 나갔다. 박용만은 <국민보> 주필로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결성해 군사훈련에 힘을 쏟았고, 1913년 2월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은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해 청소년 교육에 주력했다. 돌아갈 조국이 없어진 이민자들의 마음속엔 오직 조국광복의 염원만이 가득했다. 그들은 조국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교육이 유일하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박용만과 이승만의 리더십에 강한 지지를 보냈다.
미국교육을 받은 한인 2세들의 활동은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점차 윤곽을 드러낸다. 의사, 엔지니어와 같은 전문직 한인들이 미국 주류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0년대 들어선 구두수선업, 양복점, 설탕제조공장 등 사탕수수농장이 아닌 곳에서 일하는 한인들이 많아진다. 농장에서 일하는 1세들과는 달리 한인 2세들은 다른 직업을 선호했으며 능력도 있었다.
 1945년 조국광복 때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1세들은 상당수 타계한 상태였다.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의 기쁨도 잠깐,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와이 이민자들은 민족상잔의 비극에 휘말리게 된다.
전쟁이 끝나면서 하와이 한인사회는 점차 안정세를 찾아간다. 1954년, 하와이대학은 한국인 2세들을 위한 한국어 강좌를 개설한다. 1963년엔 한국사 강의가 시작되고 1972년엔 한국학연구소까지 창설된다. 1980년엔 전 세계 대학 가운데 유일하게 경복궁의 근정전과 향원정을 모델로 한 한국학센터가 건립될 만큼 하와이교민들의 위상은 50년대 이후 급속히 신장한다.
지난해 17년 만에 정년 퇴직을 한 문대양 대법원장, 주상원 다나모가도 김 의원, 하원에 실비라 룩 샤론하 의원 등 한인 이민자들의 후손들은 지금 하와이 주류사회 정계에도 진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02명으로 시작한 하와이이민자 수는 2011년 현재 4만5천여 명으로 무려 440여 배나 증가했다.
2011년 10월. 109년 전 121명의 이민자들을 떠나보냈던 인천항에도 가을이 찾아들었다. 한 세기 전 서로의 다른 빛깔로 만났던 황해와 태평양. 110년을 흘러온 두 바다는 지금 은은한 빛깔로 채색된 채 말 없이 출렁이는 중이다.
 /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 우리나라 최초 이민이라고 할 수 있는'하와이 이민'은 인천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1905년 인천내리교회 교인들의 모습.

 

 

 

 

 


  

    
▲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가장 수심이 깊은 호놀룰루항 3, 4부두 전경. 이 항구는 1903년 1월 한인 최초 이민자 102명이 미국 배'갤릭호'를 타고 들어온 곳이다. 키 큰 야자수 뒤로 배 한척이 정박해 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탑이'알로하타워'(ALOHA TOWER)다./호놀룰루(하와이)=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

  
▲  하와이는 오아후, 마우이, 카우아이, 하와이 빅아일랜드 등 8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진 제도다. 한인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호놀룰루가 속한 섬이 왼쪽 위에서 세 번째'오아후섬'이다. 
   
▲ 인천항은 1902년 제물포항으로 불렸으며 한인 이민자 제1진 102명이 출발한 장소다. 2011년 가을, 인천항 전경이 눈부시다. /박영권기자 pyk@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