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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 온라인저널리즘 기사/2016인하저널리즘

막내삼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11. 21.

10 전이었다. 봄이 파도처럼 밀려오려던 3, 막내삼촌은 돌아올 없는 길을 떠나버렸다. 뭐가 그리 바빴던 걸까.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허망하게 가버렸으니 말이다. 

  

어렸을 여름이면 우리 가족은 외가 친척이 사는 전남 광주와 고흥을 찾았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돼있어서 4시간도 걸리지 않지만, 당시엔 4~5시간은 기본이었다. 지루할 법도 했지만 조부모님과 삼촌들을 만날 생각에 마냥 신이 났었다. 내게는 삼촌이 명이 있다. 막내삼촌을 비롯한 삼촌들과 함께하는 일주일은 여름을 기다리는 유일한 이유였다 당시 삼촌들은 주택 2층에서 살았다. 누나와 매형, 조카들이 온다는 전화를 받으면 2 난간에 기대어 서서 우리가 오는 지켜보곤 했다. 그럼 나는 반가운 마음에 멀리서부터 차창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막내삼촌은 지독히도 멋을 부릴 몰랐다. 정돈되지 않은 곱슬머리는 항상 부스스했다. 여름이면 후줄근한 티셔츠와 반바지를 즐겨 입었다. 게다가 종아리 절반이 덮일 만큼 정장 양말을 올려 신고, 구두 뒤축을 꺾어 신었다. 내가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막내삼촌의 모습이다. 항상 유쾌했고, 위트가 넘쳤다. 삼촌은 나를 특히나 아꼈다. 때로는 형같았고, 때로는 친구같았고, 때로는 아빠같았다. 역시 삼촌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왠지 모를 애틋함을 느꼈었다. 그래서인지 휴가가 끝나고 집에 가야하는 날이 괜스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출발하기 전에 항상 막내삼촌에게 같이 가자고 울먹이며 졸라댔다. 그러면 막내삼촌도 마음이 아픈지 아쉬운 눈빛을 가득 담아 우리를 배웅했다.

  

 

막내삼촌과 나, 삼촌은 종종 어머니를 대신 해서 어린 나를 봐주고는 했다고 한다

 

 

고흥에 내려가면 낚시를 자주 나갔다. 삼촌들은 낚시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물이 위험하다며 내가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항상 따라 나섰다. 중학생이 됐을 무렵일까. 어김없이 여름휴가 시골을 찾았다. 날씨 좋은 날, 삼촌들과 낚시를 나갔다. 나는 대나무를 잘라 만든 조악한 낚싯대로 망둥어 마리를 낚아올리고 있었다. 한참 낚시에 빠져있던 중에 막내삼촌이 말을 걸어왔다. 

"맹구[각주:1] 재밌냐?"

"! 문저리[각주:2] 많이 잡혀서 신기해"

"그라믄 다음엔 문저리말고 학꽁치 낚으러 가자. 짝에 가믄 학꽁치가 허벌나게 잡힌다. 가서 낚아불자."

"학꽁치? 그런 것도 있어? 다음에 시골 오면 가자! 약속해"

"그래, 가자"


그러나 약속은 지켜질 없었다. 암이었다. 삼촌에게 죽음의 손길이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었다. 아마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당시 삼촌은 꽤나 담담했으니 말이다. 서울에서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인천에 올라왔다. 아버지가 항상 병원으로 태워다주셨다. 마침 방학이었던 나는 삼촌이 심심할까봐 같이 읽을 만화책을 잔뜩 빌려 함께 다녔다. 삼촌이 독한 항암제를 맞으며 암세포와 싸우는 동안 나는 곁에서 만화책을 읽고 삼촌과 얘기를 나누다가 쪽잠을 잤다. 항암치료를 받는 시간은 무척 길었다. 종일 침대에 누워 항암제가 관을 타고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항암제가 얼마나 독한지 투약 회차가 지날수록 부작용으로 팔뚝의 핏줄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와중에도 삼촌은 자기는 머리카락은 안빠진다며 킥킥대고 웃었다. 생각해보면 삼촌은 한번도 앞에서 찡그리거나 아파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상상 못할 고통이었을텐데 눈물 보이지 않았다. 강한 사람이었다. 


치료를 받으며 서서히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삼촌은 전남 화순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싶다며 광주로 내려갔다. 아마도 삼촌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고, 집에 가고 싶었던게 아니었을까. 2006 3월이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됐고, 학기가 시작해 정신없던 때였다. 갑자기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막내삼춘[각주:3]... 위독하데... 내려가게 얼른 집에 ..."

휴대폰 너머 어머니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가슴을 쳤다. 순간 눈 앞이 하얘졌고, 숨을 쉬기 어려웠다. 시골에서 인천에 올라오는 날처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급히 화순으로 내려가 곧바로 병원을 찾았다. 삼촌은 중환자실에서 겨우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곁을 지키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나와 동생이 것을 알리자 삼촌은 의식이 꺼져가는 와중에도 고개를 들어 간신히 눈을 우리를 보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힘이 들었는지 다시 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병원에서 없어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광주의 삼촌집으로 올라갔다. 그날 삼촌 침대에서 잤는데 꿈을 꿨다. 어찌나 생생했던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삼촌은 가득 장을 보고, 어딘가를 가려했다. 내가 어딜 가냐 묻자 없이 웃기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삼촌은 정말로 길을 떠나버렸다. 


거짓말 같았다. 영안실에서 마지막으로 삼촌을 있었다. 삼촌은 잠든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누워있었고, 가족들 모두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냈다. 할아버지가 대표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는 차갑게 식어버린 삼촌의 머리맡에 섰다. 다시는 수도, 만질 수도 없을 당신의 막내아들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이마를 맞췄다. 그리고는 조심히 가라고 속삭였다. 할아버지는 홀로 외롭게 길을 가야 막둥이를 눈물로 배웅했다.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 삼촌과 함께했던 많은 일들이 희미해졌다. 그런데 여전히 삼촌의 휴대폰 번호는 잊지 못하고 있다. 바쁘다며 전화를 자주 못했던걸 지금도 줄곧 후회하는 탓이다. 여전히 삼촌은 광주에 있을 것만 같고, 전화를 걸면 받을 것만 같다. 만약 통화할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삼춘, 지내지? 내년 여름에도 내려갈테니까 기다려. 학꽁치 낚시 가기로 한거 아직 안 잊어버렸지? 낚아다가 소주 하자. 보고싶어. '

 

12103033 김명중, http://kmj4502.tistory.com/

 


  1. 막내삼촌이 부르던 별명 [본문으로]
  2. 망둥어의 방언 [본문으로]
  3. '삼촌'이 옳은 표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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