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한점 쉼표가 필요할 때.
한글 자음 ㅁ자처럼 생긴 5호관의 가운데 공간에는 자그마한 공원이 있다. 우리는 그 곳을 센트럴 파크라고 부른다. 내가 이곳을 이용하는 경우는 동아리 방이 있는 나빌레관에 갈 때 뿐인데, 센트럴파크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가는 것이 5호관을 가장 빠르게 통과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찍던 날도 나빌레관에 가기 위해 앞만 보고 바쁘게 걷고 있었다. 그때, 구름에 가려졌던 해가 드러났다. 색이 바랜 나뭇잎들이 일순간 모습을 바꾸고 빛을 냈다. 움직이기 바빴던 발이 저절로 멈추었다. 더위가 가시면서 가을이 온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제서야 나는 사방에서 풍겨오는 마른 낙엽의 냄새가 맡을 수 있었다. 그제야, 온몸으로 가을이 느껴졌다. 뭐가 그렇게 바빠서 머리 위도 못보고 다녔을까... 오래 전 아빠가 한 말이 생각났다.
"혜진아, 여유는 바쁠 때 가장 필요한 거야."
엄마가 뱃속에 언니를 가졌을 때, 인천에서 시작한 아빠의 사업이 갑작스레 망했다. 아빠는 언젠가 할아버지에게 받을 유산이었던 지금의 우리집을 미리 상속받아 엄마와 함께 파주로 들어왔다. 그때가 딱 지금쯤의 계절이었다고 한다. 당장에 형편이 어렵고 뱃속의 아이는 커가고... 아빠는 마음이 조급해 이 일 저 일 닥치는대로 하며 바쁘게 살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문득 보니, 아빠가 눈을 뗀 사이에 언니와 내가 훌쩍 커버렸다고 한다. 스스로 걷고 뛰고 말하고 읽고 쓰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훌쩍. 사실 그래서 어렸을 때 나는 아빠가 참 어색하고 어려웠다. 함께 보낸 시간이 적었으니, 가족인데도 서로 잘 몰랐다. 그러다 수능시험을 치르고 처음으로 아빠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저녁에 아빠가 해준 말이었다.
"아빠가 이제 와서 보니 너희를 한참 예뻐해줄 시기를 다 놓쳤더라. 여유는 한가할 때 부리는 게 아니야. 바쁠 때 가장 필요한거야."
내가 앞으로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중에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 점점 더 바빠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록 더 여유를 가지라고 했다. 길을 가더라도 옆에 무슨 꽃이 피었나 살펴보고, 흐린 날과 맑은 날 공기의 냄새를 맡아보고, 매일매일 달라지는 계절을 맛보면서 살라고 했다. 빠르게 굴러가는 일상에 콕, 쉼표를 찍으라는 것이었다. 바쁜 일상에 그냥 매달리다보면 가속도가 붙어서 나중에는 감당할 수가 없게 되고 너무나 지치게 될 거라면서. 술기운을 빌린 아빠의 애정어린 조언이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나는 정말 바쁘다. 산더미같은 과제와 다가오는 시험기간, 진로에 대한 고민, 취업에 대한 걱정. 잠도 제대로 못자는 나날이다. 저번 주 주말에도 할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오랜만에 집으로 향했다. 아빠의 조언대로 내 지친 일상에 콕, 쉼표를 찍으러. 그리고 오랜만에 아빠와 동네 둑길을 산책했다. 마른 수숫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건조한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이 지친 마음에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여유가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하늘이 높아졌다. 곧, 겨울이다./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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