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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인천부청과 인천중구청

by 김진국기자 2016. 9. 15.
시민들에게 개방한 인천항 제8부두를 뒤로하고 응봉산 방향으로 시선을 던진다. 오르막길이 끝나는 지점. 3층 건물 하나가 옆으로 길게 앉아 있다. 흰색의 가로 벽과 베이지색의 벽돌기둥이 씨줄날줄처럼 얽힌 서양 모더니즘양식 건물이다. 그 위에 얹혀진 무수한 초록빛들. 한여름 물기를 머금은 응봉산 나뭇잎들은 지금 한껏 부풀어 오르는 중이다. 건물은 금메달리스트, 나뭇잎들은 월계관처럼도 보인다. 

인천 중구 신포로 27번 길 80 '인천중구청'. 응봉산 중턱에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1933년이다. 완공 당시엔 '인천부청'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지금의 인천시청이라고 보면 된다. 

더 거슬러 올라가 1902년 이 자리엔 '일본영사관' 건물이 똬리를 틀었었다. 조선을 삼키기 위해 벌인 청일전쟁(1894~1895년)에서 승리한 일본이 세운, 정면 2층에 난간이 있는 발코니와 아치모양의 처마를 가진 일본 의양풍 2층 건물이었다. 일제가 바다가 잘 보이는 산 중턱에 영사관을 세운 건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건물은 보잘 것 없었으나 일본 인천영사관만이 궁궐처럼 보였다"라고 말한 증언도 기록에 나온다. 

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1906년 이 건물의 이름을 '이사청'(理事廳)으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1910년엔 '인천부청'으로 각각 바꾼다. 말이 영사관, 이사청, 인천부청이었지, 실은 조선침략을 위한 전초기지이자 인천시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식민통치 본산이었다. 이 건물이 헐린 때는 1932년 8월이다. 당시 인천부청, 즉 지금의 인천중구청 건물을 짓기 위해서였다.   

인천중구청 건물은 준공 당시 건축면적 656㎡(198.58평), 연면적 1363㎡(412.35평)의 크기였다. 철근콘크리트구조에 벽돌을 쌓아 만든 이 건물은 방열기를 설치한 50개의 방과 건물 뒤 쪽의 지하층을 갖고 있었다. 화장실은 수세식이었고, 전등 57개, 전기시계 13개, 사이렌 1개, 피뢰침 1개 등 전기시설과 직통전화 50대, 공전식 구내전화 27대도 건물의 부속품이었다. 스틸새시 창문을 설치하고 외벽을 타일로 마감했는데 외벽재료는 당시 유행했던 밝은 갈색 스크래치 타일을 사용했다. 바닥과 층계를 오르내리는 난간은 화강암 석재를 사용한 당시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1937년 건물 양 옆으로 동서별관이 들어섰으며 1964년엔 본관을 3층으로 증축했다. 2006년 4월 14일 등록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됐다. 

광복 전후 줄곧 인천시청사로 사용하다 지금의 중구청사로 쓰기 시작한 건 1985년 부터. 인천시청이 구월동에 새 청사를 지어 이전하며 중구가 들어온 것이다. 이후 중구의 행정수요가 점점 늘면서 1988년 월디관, 1987년 북별관, 2004년 의회청사를 신축했고 6개 건물이 본관을 둘러싼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중구청 앞에 우리나라 유일의 '재팬타운'(Japen Town)이 형성된 것도 20세기 초, 이 건물이 들어서면서 부터였다. 지금도 중구청 바로 앞 첫 블록 길가엔 건축사무소와 카페들이 성업 중인데 외양은 일본식 주택모습을 하고 있다. 다음 블록엔 본래 일본영사관 자리였던 '구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을 비롯한 근대건축물 여러 개가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1960, 70년대만 해도 중구청~인천아트플랫폼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은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이면 아이들의 천연 대나무 썰매장으로 사랑을 받던 놀이터였다. <개항과 양관역정>의 저자 최성연 선생이 '서울신문' 지사를 운영하던 사무실이 있던 곳도 중구청 앞이다. 

'개항지'란 인천의 정체성을 가장 많이 간직한 도시가 바로 중구인 것은 이 같은 추억과 근대 건축물들의 존재 때문일 터이다. 

인구는 12만 명에 불과하지만, '인천국제공항'과 '항만'을 가진 세계적 도시 중구. 한 세기 전, 사람들이 넘기 힘들었던 인천부청의 육중한 철문은 사라졌고, 2층 중앙에 있던 구청장실도 1층 건물 입구 왼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닷길, 하늘길과 함께 중구청은 팔을 활짝 벌려 사람들을 맞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