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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도립인천병원과 인성여고

by 김진국기자 2016. 9. 15.

세상을 녹이기라도 할 것 같은 폭염의 기세가 등등한 2016년 7월 하순. 신포동을 출발, '홍예문길'을 따라 2차선 도로를 걸어 오른다. 홍예문을 지나기 직전 왼편으로 교문이 하나 나온다. 홍예문로 39. 인성여자중고등학교다. 방학 중인 학교운동장엔 여학생들 대신 건설기계 한 대만이 웅웅 소리를 내며 여름 한낮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다. 여름 한 철을 지내고, 선선한 가을이 오면 운동장은 다시 여학생들의 재잘거림으로 가득할 것이다.

인성여중고 운동장이 있던 자리엔 71년 전,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아치형으로 창문을 내고 가운데가 뾰족한 모임지붕을 한 2층짜리 건축물이었다.

세련된 겉모습과는 달리, 이 건물은 사실 조선인들에게 공포의 공간이었다. 뚜벅 뚜벅! "아~악!" 홍예문 고개를 넘기 위해 건물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귀를 막거나 인상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이곳에 얼씬도 하지 않으려고 홍예문을 빙 에둘러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건물은 일제에 협조적이지 않거나 독립군을 탄압·고문하던 '일본 육군 헌병대'였다. 광복을 맞으며 이 목조건물은 인천인들의 손에 헐리고 만다. 분노한 군중들이 일제강점기 한풀이로 '일본제국주의 화신'을 때려 부순 것이다.  

역사는 아이러니라고 했던가. 광복 전까지 '사람을 잡던' 이 건물의 최초 용도는 '사람을 살리는' 병원이었다.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서 현대적 의료시설이 설치된 곳은 각국 영사관 의무실이 전부였다. 개항 이후 제물포(현 인천항)로 들어오는 일본인들의 숫자가 늘면서 영사관 의무실은 환자 수요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  

1906년 일본 거류민단은 정부 보조를 받아 '공립 인천병원'을 건립한다. 지금 인성여중고 정문이 바로 인천병원 정문이었다. 인천병원은 1914년 인천부에 이관됐다가 1932년 도립병원으로 승격한다. 일본인들을 위해 개원한 이 병원에 인천사람들이 발걸음을 하기 시작한 때는 1916년이다. 그 때까지 인천사람들은 1890년 성공회가 세운 '성 루카병원'을 애용했으나 병원 셔터를 내리면서 인천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  

인천의 많은 근대건축물들이 그렇듯이, 이 건물 역시 서양식 건축기법을 모방한 '의양풍(擬洋風)' 건물이다. 의양풍 건물의 공통된 특징은 실용성 보다는 장식성에 치중한다는 점이다.

목조건물인 도립 인천병원에서 눈에 띄는 것은 출입구 위에 설치된 '포치(porch)'이다. 포치는 건물 면에서 튀어나와 입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구조물이다. 포치는 그러나 계급의식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우린 뉴스에서 영국여왕이나 일왕이 포치에 서서 모여 있는 군중들을 향해 손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높은 사람'이 높은 곳에 서서 아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장소인 셈이다.  

인천의 많은 근대건축물이 의양풍으로 지어진 것은 일본인들이 서양의 것을 스폰지로 흡수하듯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인성여중고 건너편 체육관은 광복 전엔 '인천공회당'이, 이후엔 '인천시민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민관은 영화 상영과 쇼 공연, 3·1운동 기념식 등 온갖 이벤트가 치러지는 '복합문화공간'이었다. 1966년 6월1일 오후 7시30분 시민관에선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와 시민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 김중석 인천시립교향악단 초대 지휘자가 창단연주회 첫 곡으로 '인천시민행진곡'을 연주한 것이다.  

바로 그 옆으로 '인천경찰서'가 있었는데 1950년 9월16일 이 곳 유치장에 수감된 102명이 북한 정치보위부가 쏜 카빈 총에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미국립보관소(NARA)는 이 때 102명의 수감자 중 53명이 사망하고 28명이 부상했으며 21명만이 생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감자들은 목사, 교사, 공무원, 군인 등이었다. 그 옆으로 '무덕관'이란 유도장도 있었으나 지금 그 자리엔 연립주택이 들어섰다.  

방학 중임에도 학교 정문에서도, 체육관에서도 몇몇 여학생들이 나온다. 무릎 위까지 올라간 교복치마를 입은 소녀들이 재잘재잘, 꺄르르 웃으며 홍예문 길을 깡총깡총 걸어간다. 한여름 햇살이 소녀들의 긴 머리칼에 내려앉아 검은 윤기로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