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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인천일보와 인천곡물협회

by 김진국기자 2016. 11. 6.

불쑥, 겨울이 찾아왔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나뭇잎들이 황갈색으로 타들어가던 가을이었는데….

택배업무를 주로 하는 'CJ대한통운 인천' 물류집하장에도 겨울이 왔다. 집하장 앞으로 덤프트럭 두 대가 꽁꽁 언 것처럼 주차한 모습이다. 한켠으로 작은 트럭들이 물건을 싣거나 내리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인천 중구 제물량로 213 'CJ대한통운 인천' 자리에 처음 건물이 들어선 때는 1922년이다. 쌀·보리·콩·조·수수와 같은 곡물을 파는 사람들의 모임인 '인천곡물협회'는 당시 이 자리에 회관을 짓는다. 내부가 목조로 된 2층 건물이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중국(청)과 일본이 벌인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은 기세등등하게 조선을 농락하기 시작한다. 본래 미곡거래는 조선의 물산객주들, 즉 '인천신상협회'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1903년 일본 미곡 상인들이 동업조합 인천곡물협회를 결성하고 1922년 회관까지 건립한 뒤 인천의 미곡시장을 서서히 잠식해 나간다.

일제는 앞서 1899년 우리나라 최초로 미두취인소를 인천에 설립한다. 취인소는 '거래소'란 뜻으로 1차 생산품을 거래하는 시장을 가리켰다. 이 곳에선 처음 쌀·대두·명태·방적사·금사·목면 등 7가지 상품을 거래했다. 정기거래는 물론 현물과 외상거래가 가능했지만 실제로는 정기거래만 이뤄졌다. 그러나 점차 거래품목을 미곡과 대두로 한정한다.

미두는 지금의 '증권'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두취인소는 말하자면 전국의 미두꾼들이 모이는 놀이터였다. 미두취인소가 개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 상인들의 유통 활동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조선의 인천항객주조합이나 신상회사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두취인소 개설 뒤 일제는 조선의 미곡시장을 하나 둘 점령해 나간다. 인천곡물협회는 미두취인소와 정미업자를 수하에 두고 조선의 쌀을 '농단'하는 역할을 한 조직이었다.

광복 이후 인천곡물협회 건물은 염전을 관장하고, 담배를 출하하던 전매소(전매청)로 쓰였다. 이 건물이 '인천일보' 사옥으로 부활한 때는 1988년. 1973년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으로 종간한 인천의 언론이던 '경기매일신문'은 언론자율화가 시행되며 '인천신문'(현 인천일보)이란 이름으로 1988년 복간한다.

폐간될 당시 주주들과 기자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인천신문'은 1945년 인천에서 창간한 '대중일보'의 후신이기도 했다. 건물 1층엔 편집국과 광고국이 있었고, 2층은 사장, 주필, 전무, 상무 등 임원방으로 사용했다. 이 건물은 그러나 건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계단까지 나무로 만들어 오르내릴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났고, 2층에서 걷는 소리때문에 1층 편집국·광고국 직원들은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여름이면 양은함지박에 얼음을 둥둥 띄워 발을 담가야 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천정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겨울엔 냉동고나 다름 없었다. 결국 1990년 초 바로 옆 대한통운과 땅을 바꾸며 인천일보는 지금의 항동 4가에 신사옥을 지어 이전한다. 이후 대한통운은 인천곡물협회 건물을 헐고 그 자리를 물류하치장으로 만든 뒤 지금까지 사용해 오고 있다. 다만 인천곡물협회 건물 옆에 있던 윤전실만이 지금까지 남아 신문 등 인쇄물들을 찍어내고 있다.

대한통운 옆 '인천해역방어 사령부'란 간판을 단 4층 건물은 자물쇠로 굳게 잠가놓은 모습이다. 해군을 모집하거나 해군하사관 숙소로 쓰였던 이 건물은 '서도회관'이란 별칭으로 불리었다. 정보기관을 '송학사', '인하공사'라고 부르는 것처럼 위장을 위한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맞은 편 일식당 '우정'은 76년 신포동에서 개업해 90년 초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인천해역방어 사령부 건너편(자유공원 방향) 길가엔 '백만이네 집'이란 건물이 있었다. 양공주 숙소였던 곳으로 실제 백만이네 가족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쉬즈웰 페인팅'이란 갤러리가 들어섰다.
곡물상인들로, 기자들로 북적대던 자리는 생필품과 선물들이 차지했다. 지금 이 곳에선 택배물품을 나르는 소형트럭들이 겨울바람을 가르며 분주히 오가는 중이다.

/글 김진국 기자·사진 유재형 사진가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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