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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자의 해외 취재기

민주주의 요람에서 피어난 세계 최고 건축술

by 김진국기자 2014. 9. 25.

고대 그리스의 조각술은 인체를 세밀하게 묘사한 게 특징이다. 파르테논신전 북쪽에 위치한 에렉테이온 신전은 6명의 소녀상이 건물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테네의 심장, 아크로폴리스에서 세상을 내려다 본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 이 돌덩이들로 가득한 도시는 지금보다 더 문명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을 빚어냈고 민주정치를 싹 틔웠다. 철학과 비극과 예술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던 그 도시가 바로 아테네인 것이다.

'파르테논신전'을 보기 전에는 유럽여행을 끝냈다고 말하지 말라.

지난 3월27일 오전(그리스 현지 시각). 인천박물관협의회(회장 이귀례) 일행의 얼굴들은 한결같이 상기돼 있었다. 파르테논신전을 품은 '아크로폴리스'를 만나는 날이었던 것이다. 아크로폴리스의 의미는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 인간, 물질과 같은 세속적인 것 보다는 신(神)과 정신이 추앙받는 장소이다.

어제 비가 내린 것처럼 아테네의 아침은 선명했다. 일행이 미끄러운 대리석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뽀드득 뽀드득, 신발 밑창이 대리석을 밟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대리석 만큼이나 윤기가 나는 올리브나무가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냈다. 2300년을 살며 해충이 없다는 올리브나무는 그리스인들에게 '신이 준 선물'로 통한다. 약방의 감초처럼 그리스인들의 음식엔 올리브유가 안 들어가는 음식이 거의 없을 정도다.

남녀노소, 세계 각국의 인종들이 '세계문화유산 1호'로 지정된 신전을 보기 위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프로펠리아 전경

중턱 쯤에서 '12유로' 하는 입장권을 받아들고 조금 더 오르자 거대한 돌문이 나타난다. 출입구인 '볼레의 문'은 AD3세기에 증축한 로마식 아치문으로 돼 있었다. 볼레의 문을 지나자 이번엔 '프로펠리아'가 나온다. 프로펠리아 우측, 남쪽으로 솟은 작지만 우아한 신전은 '니케 신전'이다. 니케는 정복과 승리의 여신. 미국의 스포츠용품 제조회사인 나이키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니케신전 전경

"투투투투!" 니케의 신전을 지나 프로펠리아에 들어서자 커다란 드릴로 돌 깎는 소리가 들려왔다. 2500년 전에도 이 언덕은 "깡,깡!" 하며 석공들의 돌 다듬는 소리로 가득했을 것이었다. 신전 주변에선 파르테논신전 복원공사에 사용하려는 돌을 깎고 다듬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초등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단체학습을 온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 저 만치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물 하나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살색을 띤 낯익으면서도 낯설게 보이는 거대한 돌기둥들. 파르테논신전이었다. 신전이 내뿜는 기운 때문인지, 강한 햇살때문인지 눈을 똑바로 뜨기가 어려웠다.

파르테논 신전의 야경

파르테논은 '처녀'라는 뜻의 파르테노스(Parthenos)에서 나왔다. '아테나'(Athena)와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테네 수호신인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모시던 신전이다. 파르테논신전은 기원전 447년 페리클레스의 제안하고 조각가인 페이디아스가 감독해 기원전 438년 완공한다. 비용은 그리스도시국가들의 동맹인 '델로스동맹'의 '공세'로 충당했다. 고대 그리스는 무수한 도시국가로 이뤄져 있었다. 이 도시 국가들은 그리스 지역 외 나라에서 침입할 경우 연합해서 외적을 상대했다. 델로스동명은 기원전 478년 페르시아 전쟁 때 아테네가 주도한 그리스 도시 동맹이었고, 공세는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비해 걷은 공동방위세였다. 그런데 아테네의 정치인 페리클레스가 델로스섬 아폴로신전에 보관하던 공세를 아테네로 옮기고 파르테논신전 등을 건축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동맹국들과 아테네의 비난이 쏟아졌음에도 페리클레스는 그대로 건축을 강행했다. 결국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은 공세를 '유용'해 지은 건물인 셈이다.

파르테논신전은 46개의 도리아식 기둥으로 이뤄져 있다. 안경회 옥토끼우주센터 관장은 "파르테논 기둥은 약간 불룩한 엔타시스양식을 하고 있는데 한국으로 치며 배흘림이라고 할 수 있다"며 "멀리서 보았을때 똑바로 보이게 하는 안정감을 주는 기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건축을 하거나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와서 봐야 할 건축물로 현재 기술로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프로펠리아 왼편에 있는 또 하나의 신전은 '에렉테이온신전'이다. 이 신전은 특히하게 6명의 소녀가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스인들은 건물을 지탱할 기둥을 이같은 사실적 모습의 소녀상으로 만들어 냈다. 옷의 주름과 발의 모양까지 섬세하게 조각된 이 소녀상들은 그러나 모조품이다. 진품은 아크로폴리스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파르테논과 에렉테이온이 파손된 것은 전쟁을 치르며 포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1687년 9월 26일 터키와 베네치아는 전투를 벌였고 이때 베네치아군이 쏜 포탄이 에렉테이온을 명중시켰다. 당시 아테네를 점령했던 터키군은 에렉테이온을 화약고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에렉테이온에 떨어진 포탄은 파르테논 한켠까지 타격한다.

이때 떨어진 신전의 조각들은 영국인 '엘긴 마블'(1766~1841)이라는 사람에 의해 영국 대영박물관에 상당수 반출된다. 엘긴은 스코틀랜드 귀족 출신으로 1799년부터 4년 간 터키 대사를 지내며 파르테논의 조각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당시 영국과 우호적이었던 터키는 엘긴의 반출요구를 별생각 없이 수락한다. 영국에서 대리석 절단기를 가져온 엘긴은 1801년 7월부터 2년 동안 신전의 '메토프'와 '프리즈'를 잘라 영국으로 가져간다. 메토프는 홈 무늬 사이의 벽면이고 프리즈는 띠 모양의 장식이다. 그렇게 파르테논의 프리즈 97개 중 56개, 메토프 92개 중 15개가 대영박물관에 소장된다. 남겨진 프리즈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 루부르 박물관에, 40개는 본래 자리와 아크로폴리스박물관에 각각 나누어 소장돼 있다. 2014년 봄, 아크로폴리스 복원공사는 약탈된 문화재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그리스의 몸부림처럼도 보였다.

이귀례 회장은 "중요 부분들이 떨어져나간 파르테논신전을 보며 일본과 프랑스 등지로 약탈된 우리 문화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외국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7만7000여점에 이르는데 하루빨리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아름다운 신전이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로,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이슬람사원과 탄약고로 쓰였다는 사실이 안타깝다"며 "파르테논신전은 그리스의 것이자 인류 모두의 것이므로 더 이상 인간들의 욕심으로 잘못 쓰이거나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뭉게구름이 지날 때마다 파르테논으로 떨어지던 해를 가리며 그늘이 졌고, 구름이 지나면 다시 햇살이 신전을 비추기를 반복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서서 아테네시내를 내려다 보는 일행들의 얼굴에도 햇살과 그늘이 번갈아 드리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