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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자의 해외 취재기/말레이시아

3. 600년 영욕의 세월...말레이 왕조를 돌아보며

by 김진국기자 2016. 9. 22.

태국 샴족 침략 잦아 … 中 도움으로 믈라카서 왕국 선포
금보다 비싼 향신료 등 자원 풍부 … 무역 중심지 발돋움
상업·이슬람 메카 … 식민지 역사 청산·1957년 독립 선언

 

말레이시아 역사는 얼마나 됐을까.
물론 6000~8000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왔지만 국가로서의 첫 틀을 갖춘 때는 1400년 쯤이다.
이때 파라메스와 왕자가 인도 소리브자야왕국을 떠나 믈라카(Malacca)에 정착하며 말레이왕국을 세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믈라카 '네덜란드 광장' 있는 '역사민족학 박물관'은 말레이시아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인천시박물관협의회(회장 이귀례)가 지난 3월29일 역사민족학 박물관을 찾았다.
'쿠알라룸푸르'를 떠나 잎을 길게 늘어뜨린 팜오일나무가 정글처럼 우거진 고속도로를 따라 2시간 30분쯤 달렸을까.
인박협 일행이 그 유명한 '말라카해협(Malacca Strait)'이 있는 '믈라카'(Malacca)에 도착한 시간은 29일 오전 11시35분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네덜란드광장'에 내리자 쿠알라룸푸르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고색창연한 건축물들과 짙은 선글래스에 가벼운 옷차림을 한 관광객들.
광장 한복판에선 분수가 솟아오르고 자전거 꽃마차인 '베카'가 사람들을 실어날으고 있었다.
네덜란드 광장은 '한 집 건너 박물관'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유럽고풍식의 건물이 즐비했다.
광장을 가로질러 10여 분을 걷자 여러 개의 뾰족한 지붕이 길게 이어진 초콜릿색의 건축물이 나타난다.
역사민족학박물관은 옛날 말레이왕국의 왕궁 모양을 본떠 1986년 만들었다.
이 건물의 지붕은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 벌리안(Berlian)나무로, 내부는 띠꿋(Tickwood)나무로 만들어졌다.
우리 나라 한옥처럼 못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끼워 만들었다고 현지 관계자가 설명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사람과 개의 밀랍인형이 들어있는 유리상자가 일행을 맞는다.
왼쪽에 5마리의 개가 모여 있고 오른쪽으로 개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장면이 바로 말레이시아 역사의 시작이다.
오른쪽 앉아 있는 사람은 인도 소리브자야왕국의 파라메스와 왕자다.
파라메스와는 왕위쟁탈전이 일어나자 둘째 동생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측근, 사냥개 5마리와 나라를 떠난다.
그렇게 정처없이 배를 타고 떠나 도착한 곳이 바로 지금의 믈라카지역이다.
파라메스와는 믈라카나무 아래서 쉬던 중 깜박 잠이 든다.
그런데 곰이나 호랑이와 싸워도 지지 않는 사냥개들이 '칸치'란 동물에게 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이에 측근들이 "불길하다"며 떠날 것을 종용했으나 파라메스와는 "나는 생각이 다르다, 신이 이곳에 나라를 세우라는 계시"라며 말레이왕국임을 선언한다.
말레이왕국은 그러나 태국 샴족의 침략을 자주 받는다.
금나무와 같은 조공을 바쳐도 샴족의 침략은 그치지 않았고 말라야왕국은 중국 명나라 황제를 찾아간다.
이때 영락황제는 "내가 도와줄테니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향리포공주와 결혼을 하라"고 명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말레이왕국은 중국의 요구를 수용했고, 향리포공주와 중국의 군사들이 대거 말레이왕국으로 건너오게 된다.
이후 샴족의 침략은 중단됐고 군사들은 중국 본토로 귀환한다.
그 때의 흔적은 아직도 믈라카에 '청운정'이라는 사찰로 남아 있다.
인박협 일행이 청운정에 들렀을 때 많은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믈라카엔 또 '바바와 노냐'란 유명한 민족이 존재한다. 바바는 중국계와 말레이시아계의 남자 혼혈이고, 노냐는 여자 혼혈을 가리킨다. 이 역시 말레이시아 역사의 흔적이다.
작은 상자안에 든 밀랍인형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엔 사람 키만한 마네킨들이 일행을 맞는다.
마네킨들은 다름 아닌 전세계의 무역상들이다.
14세기 말레이왕국은 인도네시아, 아랍, 중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찾아오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말레이왕국에선 특히 후추와 같은 향신료를 많이 생산했다. 후추를 얻기 위해 금을 가져올 정도였다.
후추는 어째서 금값보다 비쌌을까.
향신료를 비롯한 말레이왕국의 풍부한 자원은 식민지 역사의 시작을 자초하게 된다.
 '상업과 이슬람교의 메카'로 황금기를 누리던 믈라카는 향신료를 구하러 온 포르투갈에게 1511년 점령당한다.
그 뒤 1641년엔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이어 1819년 싱가포르 섬에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이 1867년 믈라카, 싱카포르, 페낭섬의 지배권을 갖게 되고, 1940~1945년엔 일본이 점령했다가 다시 영국으로 넘어간다.
말레이시아 박물관엔 어디나 자전거가 전시돼 있는데, 이는 일본 자전거부대가 남겨놓은 것들이다.
포르투갈 100년, 네덜란드 100년, 영국 200년, 일본 5년, 말레이시아 역사는 식민지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네덜란드광장에 여러 국가의 고건축이 넘쳐나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다.
말레이시아가 정식으로 독립해 지금의 국가형태를 갖추게 된 때는 1957년 8월31일 새벽 0시 "메르데카(독립)!"을 외치면서부터다.
역사민족학박물관 2층으로 올라가자 왕족침실과 장신구, 왕이 쓰는 모자등이 전시돼 있다.
13개주로 이뤄진 말레이시아엔 국왕인 '아궁'(Agong)과 주왕인 '술탄'(Sultan)이 존재한다.
아궁은 술탄들이 5년마다 돌아가면서 맡으며, 상징적인 존재다.
본래 14개 주였으나 그 중 1개인 싱가포르가 떨어져 나간 뒤 13개 주로 남게 됐다.
이 가운데 9개주는 주왕이 있으나 4개는 없는 상태다.
말레이시아의 1개 주였던 싱가포르가 1965년 떨어져 나간 이유도 매우 정치적이다.
자유무역의 최고 요지인 싱가포르를 포기한 것은 중국계의 성장 때문이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당시 싱가포르가 독립하지 않으면 말레이계와 중국계의 비율이 5대 5로 같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럴 경우 말레이계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말레이시아의 정치는 말레이계가, 경제는 중국계가 장악하고 있다.
역사민족학박물관을 빠져나온 인박협 일행은 네덜란드 광장과 언덕에 오밀조밀 붙어 있는 문학, 건축, 총독 등 대여섯 개의 박물관을 돌아 버스에 올랐다.
후둑 후두둑. 네덜란드광장에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맑은데 저렇듯 굵은 빗방울이라니….
숨가쁜 일정으로 뜨거워진 일행들의 가슴에도 시원한 빗방울이 떨어졌다.
/믈라카=글·사진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