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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랜토리노>를 보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6. 11. 21.

 

저는 영화의 줄거리가 복잡하거나 결말이 찝찝한, 열린 결말을 가진 영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까칠했던 주인공이 갑자기 교화되는 줄거리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수업시간에 본 그랜토리노는 참 단순하고 깔끔한, 취향에 맞는 영화였습니다.

영화 제목 그랜토리노70년대 포드에서 제작한, 묵직한 무게의 자동차입니다. 미국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보수적 자존심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랜토리노에 주인공 코왈스키를 담았습니다. 그리고 주인공 코왈스키엔 감독이자 주연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담았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실제로 미국의 공화당원이자 골수 보수주의 입니다. 그리고 영화계에서도 미국의 모든 남성상을 대표합니다. 배우로 데뷔해 메가폰을 잡게 된 그의 영화들은 보통 한 인물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을 마무리합니다.

그랜토리노역시 코왈스키 아내의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성당에서 치뤄지는 장례식에 코왈스키와 그의 아들 가족들이 참석합니다. 양복을 입고 서있는 코왈스키와 대조되게 그의 손녀는 장례식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펑키한 옷을 입고 옵니다. 또 손자 역시 할머니의 장례식임에도 불구하고 장난스럽게 변형시킨 기도문을 읽으며 되바라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들을 혼내고 나무랄 줄 알았던 부모들은 오히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코왈스키를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그의 가족들로부터 코왈스키는 소외 받은 존재입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를 고지식하고 꽉 막힌 노인네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코왈스키의 인생과 함께 해온 공구들이 있는 그의 창고에서 담배를 피우며 코왈스키의 자동차나 아내가 앉았던 의자에만 탐을 냅니다.

코왈스키의 아내는 성당의 신부에게 코왈스키의 고해성사를 부탁합니다. 그러나 코왈스키는 고해성사를 하지 않습니다. 성당과 신부, 천주교를 의미하는 것들입니다. 미국은 본디 기독교의 나라입니다. 코왈스키는 종교가 없지만, 보수적인 그에게 천주교는 아들의 일본 자동차처럼 가볍고, 이상하게 변해버린것들 중 하나입니다. 종교의 거부와 동시에 천주교, 정통성이 없는 세상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장례식을 마친 뒤 집에 있던 코왈스키에게 어두운 피부 빛을 띈 소년 타오가 찾아와 그에게 공구를 빌려줄 수 있냐고 물어보지만 그는 무시한 뒤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아들의 일본 자동차도, 천주교도, 옆집에 사는 몽족도 모두 못마땅하며 인정하거나 포용하지 못합니다.

그의 잔디밭은 그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해줍니다. 옆집 사람들이 그의 잔디밭에 들어오면 그는 매우 불쾌해합니다. 자신이 인정하지 못하는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그의 세계를 침범하는 것을 불쾌해 하는 것입니다. 그가 50년간 모아온 공구들 역시 그의 세계를 상징하며 그의 인생을 뜻합니다. 그래서 공구를 빌려달라는 타오의 요청도 그의 세계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기에 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후 뜻하지 않게 타오를 도와준 것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는 점점 타오와 타오의 누나 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현대 세상에만 맞춰 이전 것들을 보지 못하며 그를 소외자로 만든 가족들보다 옆집의 이민자이자 미국 사회에서의 소외자인 타오와 수, 그들의 가족이 그에게 더 가깝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는 다른 나라지만 전통을 가장 중요시하면 살아가던 타오의 가족들에게 동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타오에게 남자답게 이야기 하는 법이나, 일자리를 소개시켜 주고 공구를 빌려주는 행동은 그의 세계를 조금씩 나누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들을 보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의 세계를 나누어주고 가르쳐주며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아들은 거부했던 그의 고지식한 세계를 타오는 받아들이며 성장해 나갔고, 그렇게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타오와 수를 그는 점점 더 사랑하고 다시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병을 얻어 피를 토하기 시작하는데, 저는 이를 이후에 맞게 되는 결말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관객들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한 장치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즐겁게 지내던 그들은 갱단이 수를 집단 폭행한 사건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타오는 분에 차 갱단을 모두 죽여버리겠다며 코왈스키에게 총을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평소에 쉽게 총을 꺼내던 코왈스키는 타오를 진정시키고 말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부하던 고해성사를 하겠다며 신부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코왈스키는 고해성사 중 그가 평생 힘들어하고 죄책감을 가졌던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습니다. 신부도 겨우 그게 다냐며 물을 정도로 가벼운 얘기들만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갱단에 대한 복수 이야기도 살짝 꺼내게 되는데, 신부는 코왈스키가 갱단을 직접 쏴죽일 거라고 예상하고 경찰을 부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쨌거나, 코왈스키는 결국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자신을 끈질기게 찾아오던 신부덕분에 마음을 연 것이기도 하고, 옆집의 몽족을 인정하며 마음을 열게 된 것이 종교적 측면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도 보입니다.

고해성사를 마친 뒤 그는 타오를 지하에 가둡니다. 타오가 내보내 달라고 자신도 총으로 그들에게 복수해야 한다며 소리치자, 코왈스키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짐을 떠안고 살아가게 되는 지 아냐며 그의 과거를 이야기 합니다. 한국전쟁 때 사람을 죽였던 과거 때문에 힘들어하던 이야기를 창살을 사이에 두고 타오에게 이야기 하는 모습은 꼭 고해성사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가 타오를 가둔 것은 총을 꺼내들고 사람을 죽이던 그의 과거와, 타오를 때린 갱단의 일원을 폭력으로 복수하고 협박하던 그를 가둔 것입니다. 지하에서의 고해성사 역시 타오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고해성사까지 마친 그는 이전까지의 생활방식을 지하에 묶어둔 채 갱단에게 향합니다. 그리고 그는 총 대신 라이터를 꺼내들며 그의 죽음으로 모든 걸 마무리합니다. 여기서 라이터는 을 의미합니다. 그가 죽으면서 꺼내든 것은 타오와 수가 살아갈 인생의, 세상의 빛입니다. 그는 총을 맞고 쓰러지며 십자가의 형상을 띕니다. 타오와 수 다른 인종과 종교까지 포용하는 모습이기도 하고, 코왈스키가 없었다면 갱단에게 복수를 했을 타오의 죄까지 짊어지는, 희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시 장례식. 많은 일들이 있고 코왈스키가 죽었는데도 그의 가족들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그의 유산과 그랜토리노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랜토리노를 몽족 소년 타오에게 물려줍니다. 영화 속 그랜토리노는 코왈스키 그 자체였으며 그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그랜토리노를 물려주며 타오에게 원형 그대로유지해달라는 말도 함께 남깁니다. 단순히 위트있는 유언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끝까지 보수적인, 그만의 세계를 유지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몽족도 종교도 문을 열고 포용하긴 했지만, 그는 끝까지 세계에 맞춰 변하지 않고 그만의 모습을 지켜나간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그의 죽음과 그랜토리노를 타고 있는 타오의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죽음으로 그의 과거와 죄를 짊어지고 떠나는 그의 모습에서 요즘 쉽게 느낄 수 없었던 희생과 묵직함을 느낄 수 있어서, 여전한 그와 그랜토리노를 탄 성장한 타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 영화였습니다. /이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