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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인천 관측소, 측우소 그리고 기상대

by 김진국기자 2016. 9. 29.

한국 최초 근대적 기상관측소 ... 인공지능 최첨단 시설로 우뚝

 

 

"투 둑! 투 두 둑"

 

우산 위로 떨어지는 가을 빗방울 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작은북' 소리처럼 경쾌하다. 9월 하순, 가을비를 맞으며 응봉산을 오른다. 산책로엔 설익은 낙엽이 하나 둘 비에 젖은 채 바닥에 착 달라붙은 모습이다.

 

"구 구 구" 한 두 마리의 비둘기가 비내리는 땅바닥을 연신 쪼아대고 있다. 자유공원 제물포고등학교 담벼락을 따라 5분 쯤 걷자 다시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오르막길에 접어들자 문패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인천기상대.

 

비가 내려서일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왼쪽에 표면을 둥글게 처리한 건물 하나와, 분지처럼 솟은 작은 동산만이 눈에 들어온다. 동산은 '관측노장' , 관측하는 장소이다. 평지보다 1.5m높이 솟은 이유는 효과적인 관측을 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인공위성, 항공기, 슈퍼컴퓨터가 기상을 관측하지만 과거 인천기상대의 측정장치는 물을 받아 강수량을 측정하는 수준이었다.

 

인천기상대가 '인천측후소'란 이름으로 이 자리에 처음 선 때는 19051월이다. 항구를 가진 개항장 인천은 요충지였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제는 부산에 관측소를 설치하며 중구청 뒷길에 있던 스이쯔(水律) 여관에 임시 기상사무실을 개설한다. 일제는 이듬해 인천 응봉산 정상 99173(3만평) 부지에 목조 2228(69) 규모의 측후소 건물을 세운다.

 

측후소는 일본 의양풍 건물로 외벽은 목조 비늘판, 우진각 지붕은 일본식 기와로 각각 마감했다. 건물 중앙부는 모서리가 접힌 사각형모양을 달아 1층은 '포치'로 사용했다.

 

말이 측후소지 실은 전쟁을 위한 수탈이 목적이었다. 전쟁물자를 차질없이 수송하려면 기상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했던 것이다. 측후소는 풍력계, 지동계, 일조계, 자동강우계, 백엽상 등을 갖추고 매일 오후 3시 날씨를 알려줬다.

 

최초의 건물은 계속 증개축을 해오다 80년대 전후 새로운 건물로 바뀌었으며 2013년 건물이 정확한 관측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철거된다. 2013년 건물을 부술 당시 지역에선 100년이 넘는 건물을 철거했다는 비판과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 대립했다. 2016년 기상대 관계자에게 확인한 결과 본래의 건물을 지속적으로 증개축 해왔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옛 건물도, 아예 새로운 건물도 아니었던 셈이다.

 

인천기상대가 '중앙 관상대'란 이름을 갖게 된 때는 광복 이후다. 195311월 중앙 관상대가 서울로 이전하면서 중앙 관상대는 '인천관측소'가 됐으나 나중엔 '지역측후소'로 기능이 축소된다. 인천기상대로 다시 승격한 때는 1992년이다. 이후 지금까지 인천에서 비오는 날, 눈오는 날을 알려주며 일기예보를 해오고 있다.

 

건립초기의 건물은 2013년 헐리었지만 지금도 인천기상대에 가면 여전히 건립초기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인천기상대 한켠에 있는 빨간벽돌 건물이 그 것이다. 19234월 준공한 이 건물은 창고건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현재 기상견학을 할 수 있는 교육장소로 쓰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옛날 벽돌 건물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시청각 교육자료를 갖추고 있다.

 

손장원 재능대 교수는 "모서리에 칠오토막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네덜란드쌓기, 결원아치 등의 형태가 남아있다""출입구 위의 '눈썹지붕'을 지지하는 '까치발'이 독특하며 창고 앞 돌계단은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화강암 돌받침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얼마전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인천은 괜찮을까. 인천기상대 관계자는 "지금 인천기상대는 국내외의 극히 미세한 진동까지 감지하는 기계가 설치돼 있어 수초 안에 결과를 알 수 있다""우리나라의 경우 7.0 이상의 강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한다.

 

오포로 정오를 알려주던 인천기상대는 지금 최첨단 시설로 무장한 인공지능형 기상대로 거듭났다.

 

 

/글 김진국 기자·사진 유재형 사진가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