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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인천세관과 1.8부두

by 김진국기자 2017. 1. 11.


'인천항 제1부두' 앞길로 화물차들이 지나간다. 골리앗 같은 화물차들의 거침없는 질주가 누워 있던 겨울바람을 일으켜 세운다. 제1부두 출입문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출입문 바로 앞으로 붉은벽돌의 창고들이 즐비하다. 세관에서 물품을 보관하는 보세창고들로 수십년은 지난 건물로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자 가림막 뒤에 숨어 있던 벽돌창고 2개동이 모습을 드러난다. 세관 경비원은 "수인선 신포역이 들어서면서 역출구 옆에 있던 일부 창고를 뒤쪽으로 옮겼다"며 "아주 오래된 창고들은 리모델링을 해 문화재로 지정하려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줬다.

가림막 뒤에 숨어 있던 고색창연한 창고들은 1926년 이 자리에 세운 '인천세관'의 부속 건물들이다. 지금의 제1부두 입구 왼편에 있던 인천세관 건물은 2층 목조건물이었다. 도로가 교차하는 모서리에 주 출입구가 있고 지붕에 망루모양의 탑을 얹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건물들은 대부분 6·25전쟁 때 불 타 사라진다. 2개의 부속건물만이 남아 리모델링을 하는 중이다.

인천세관은 1883년 '인천해관'이란 이름으로 개청한다. 당시 직원들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세무사 스트립플링(Alfred Burt Stripling, 영국)을 비롯해 독일인 3명, 러시아·프랑스·미국·청국·이탈리아인이 각각 1명 씩 모두 9명이 해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조선인으로 인천해관에 처음 배치된 사람은 홍우관(1866~1910)이다. 17세의 어린 나이로 1883년 '관립영어학교'에 입학, 1년 간 영어를 배운 뒤 1884년 해관에 들어간다. 그러나 동료 외국인 해관원들의 월급에 10분의 1도 안 되는 임금을 받았다.  

인천해관은 당시 징세기관이었지만 수출입 화물에 대한 관세와 톤세 징수라는 고유업무외에도 다양한 일을 했다. 인천 항만의 관리에서부터 밀수사범 조사, 기상관측, 왕실자금 관리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종합행정기능을 갖춘 작은 정부였다. 인천해관은 처음 지금의 항동1가에 세워졌으나 이후 세차례 이전과 건축을 거쳐 지금의 제1부두 앞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소실된다.

 

1883년 항동에 '인천해관' … 1926년 1부두에 '인천세관' 개청 
전쟁 때 소실 … 부속건물 2개만 남아 현재 리모델링 중 
세관 뒤편 1·8부두 '시민친화공간'으로 거듭날 듯 

 


인천세관 길 건너편 '씨티은행'이 1층에 들어선 건물은 본래 인천상공회의소와 경기은행 공동소유였다. 그런데 경기은행이 은행통폐합으로 사라지면서 인천상의가 100프로 소유권을 갖게 된다. IMF 이후 인천상의는 현 건물주인 '대주중공업'에 건물을 매각한 뒤 지금의 남동공단으로 이전한다. 그 건물 뒤편엔 허합씨가 사장으로 있던 '인천신문'이 자리했고, 인천우체국 건너편 공영주차장은 '식산은행'에 이어 '산업은행'이 머물렀었다.

인천세관 대각선에 위치한 '유니클로' 매장자리도 몇 차례 업종이 바뀐 장소다. 유니클로 전, 이 자리엔 '봉희설렁탕'이 있었다. 갈비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었다. 더 앞서 '국일관'이란 극장식 나이트클럽이 불야성을 이뤘는데, 직장인들이 보통 2차, 3차로 가서 신나게 놀던 곳이었다. 심장을 쿵쿵 울리는 디스코 음악에 맞춰 미친듯이 몸을 흔들어대며 사람들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말끔히 날려버리곤 했다. 그렇게 1983년 문을 열어 신포동의 명소로 군림하던 국일관은 상권 이전 등으로 2010년 셔터를 내린다.  

세관 뒷편의 바다는 인천내항 1·8부두로 불린다. 1·8부두는 철재와 목재 등을 하역하던 장소였다. 그런데 이 내항이 시민친화공간으로 거듭나게 됐다. 지난해 말 해양수산부와 인천시, 인천항만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가 1·8부두 개발을 약속한 것이다. 부두기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해양문화관광지구와 공공시설로 만들겠다는 계약이었다.

내항재개발은 중구민들의 염원이었다. 수십년 동안 하역업체들이 돈을 버는 동안 중구민들은 소음과 분진에 시달려야 했다. 수년 전 결국 주민 7만2000여명이 국회 청원으로 사업추진이 확정됐지만, 민간사업자가 나타나지 않아 지지부진했던 터였다. 8부두가 주차장으로 개방됐지만 편의시설이 부족해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2021년까지 401억원을 투입해 시민친화적 공간으로 개발하겠다는 계약이 성사되며 중구는 본래의 아름다운 얼굴을 되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인천내항이 대중국 관광과 교역의 중심지로 재탄생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게 일고 있다. 현재 중구 차이나타운과 송월동 동화마을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은 하루 수 만명에 이른다. 수인선 개통에 이어 제2외곽순환도로까지 개통하면 인천 원도심을 찾는 발걸음은 훨씬 많아질 것이다. 김홍섭 중구청장은 일찌기 인천내항을 '한중FTA 최적의 거점지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제1·2여객터미널을 존치시키며 항로를 증설하면 중국 바이어들의 몰려들고, 원도심 경제가 활성화되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것이란 얘기였다. 내항개발이 국내외 관광객들의 여가는 물론 지역·국가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주장은 일본 요코하마항, 프랑스 마르세이유항, 중국 상하이항과 같은 외국의 사례를 볼 때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인천세관 자리에 서서 1부두 방향으로 시선을 던진다. 시민들은 머잖아 무거운 컨테이너나 목재가 아닌, 물비늘 반짝이고 새하얀 보트가 유유히 오가는 바다를 보게 될 것이다.

/글 김진국 기자·사진 유재형 사진가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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