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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지리지

'괭이부리말 아이들' 김중미 인터뷰

by 김진국기자 2016. 9. 24.

 

 

 

 

 

 

괭이부리말 아이들로

당당한 가난을 노래하다

 

 

중미야, 이거 좀 저 아랫집에 갖다주고 오니라.”

싸전(쌀가게) 한켠에서 작은 책에 코를 박고 있던 소녀가 할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눈도 얼굴도 동그란 아이였다. 소녀가 읽던 부분의 책장을 천천히 접고 일어섰다. 책을 살며시 내려놓은 소녀는 할머니가 건네준 부침개 그릇을 들고 깡총깡총 뛰어나갔다.

할머니~ 갖다주고 왔어요. 잘 먹겠다고 전해드리래요.”

옳지, 이건 저 윗집에 좀 갖다주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할머니는 또다시 소녀의 품에 음식을 안겨주었다. ‘관동의 골목길을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한 것일까. 수건을 뒤집어쓴 할머니의 이마에도, 소녀의 앙증맞은 콧등에도 송알송알 땀방울이 맺혔다.

할머니의 싸전은 지금의 인천시 중구 관동 크라운볼링장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관동 한가운데 있던 싸전은 그러나 무늬만 싸전일뿐 실은 나눔의 장소이자 노천카페나 다름없었다.

할머니는 누구에게라도 음식을 만들어주는 걸 좋아하셨어요. 저희 친가가 평북 안주 명천면 분들이셨는데 거기서 살던 생활방식을 그대로 인천으로 가져온 겁니다. 1·4후퇴 때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희 아버지 3형제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관동에 정착하셨거든요.”

가족은 물론이고 고향에서 거느리던 식솔들까지 데려온 할머니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주는 걸 좋아했다. 노란 바탕에 푸른 잎새를 수놓은 녹두지짐이부터 검붉은 단팥이 듬뿍 들어간 북한식 찐빵에 이르기까지, 틈만 나면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행복해했다. 할머니는 줄 게 없으면 입고 있던 옷이라도 벗어줄 사람이었다.

할머니 집엔 부두노동자와 외항선을 타고 들어온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클럽 언니들의 발걸음도 잦았다. 할머니는 특히 여름이면 커다란 함지박 하나 가득 군용 커피를 타서 나눠주기도 했다. 찌는 듯한 여름날, 송곳으로 깬 판얼음 조각을 숭숭 넣은 뒤 커다란 국자로 휘휘 저어 한 사발씩타주는 냉커피를 마시며 사람들은 할머니 앞에서 신세한탄을 했고, 넋두리도 늘어놓았다. 말하자면 할머니는 싸전을 찾는 사람들의 물질적·정신적 멘토였다.

할머니의 넉넉한 인정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인천에서 전국체전이 열린 적이 있어요. 당시만 해도 신포동에 숙박시설이 꽤 있어서 체전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관동, 신포동 일대에서 묵었거든요. 체전 기간 동안 권투선수나 태권도선수 같은 경우 체중 조절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체중을 잴 만한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던 터에 마침 싸전에 저울이 있으니까 선수들이 몸무게를 재러 온 겁니다. 헌데 할머니가 보기에 시커멓고 비쩍 마른 애들이 왔다갔다 하니까 그 모습이 안 돼 보이는 겁니다. 할머니가 밥상을 차려 억지로 떠먹이려 하셔서 선수들이 무척 곤혹스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노천카페처럼 운영했던 할머니의 싸전, 마당 없이 길가에 지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던 일본식 외주물집들. 소설가 김중미(54)의 어린 시절은인천시 중구 관동의 풍경으로 가득하다.

 

중구 관동에서 보낸 어린 시절

 

김중미 작가는 1963년 중구 관동에서 태어났지만 백일 때쯤 가족의 품에 안긴 채 동두천으로 이사한다. 아버지가 동두천 미군부대로 직장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인천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15년이 지나서였다. 그럼에도 관동에 대한 기억이 선명한 것은 방학 때면 어김없이 할머니가 계시는 관동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서 할머니, 할아버지 적적하시니 네가 가서 함께 지내라고 보내신 거죠. 또 제가 친할머니를 가장 많이 닮아서 할머니가 많이 예뻐해주시기도 했고요.”

어린 중미는 뚝뚝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차라리 동생이 살가운 성격이었지만, 어머니는 꼭 중미를 친가에 보내곤 했다. 할머니는 자신을 가장 많이 닮은 중미를 좋아했다. 그런 할머니 집에서 보내는 어린 중미의 방학은 독서와 음식 심부름의 연속이었다. 방학이면 중미는 관동의 크고 작은 골목길을 누비며 음식을 날랐고, 평소 읽고 싶었던 책도 실컷 읽었다. 그가 떠올리는 어린 시절 관동과 관련한 하나의 아이콘은 크라운볼링장이다.

지금도 크라운볼링장이라고 있잖아요? 그 자리가 과거엔 인천 최초의 현대식 예식장이 있던 자리라고 해요. 지금 저희 부모님이 80대 초반이신데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리셨어요. 현악 3중주가 울려 퍼졌다고 하시더군요.”

김중미 작가의 부모를 이어준 오작교는 이었다. 18세에 부모님, 동생 둘과 함께 관동으로 내려온 아버지의 꿈은 발레리노였다. 월남한 뒤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졸업했을 정도로 아버지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로맨티스트였다. 그런 아버지의 집 책장엔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일부는 월남할 때 가져오고 일부는 인천에서 구입한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여동생과 친하게 지내던 어머니는 이따금 아버지의 집에 놀러갔고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눈여겨 보며 읽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엄마한테 들어보니 아버지가 피란 오면서 가져온 그 낡은 책들이 탐이 났다는 겁니다. 그렇게 고모와 친해져서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엄마를 아버지가 마음에 두게 됐고 그게 결혼까지 이어진 거죠.”

김중미 작가의 외할아버지는 우리나라 두 번째 도선사였던 김선덕 씨이고 외할머니는 음악교사였다. 그런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엄마가 평북 출신의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으니 북남남녀의 만남이었다.

국민학생(초등학생) 중미는 과묵했다. 그렇지만 이따금 입을 열면 봇물 터지듯 말을 쏟아내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중미는 말 대신에 그림을 그리고 글 쓰는 걸 좋아했다.

관찰일기 쓰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말하자면 그림일기죠. 말이 없는 얼뜬 아이였는데 동네 친구들하고 싸우는 일도 전혀 없는 조용한 아이였지요.”

중미는 책 읽고 일기 쓰기를 좋아하며, 종이인형을 사면 길고 치렁치렁한 인형의 머리카락이 싫어 가위로 머리를 잘라버리는 독특한 아이였다. 소꿉장난을 해도 친구들과 둘러앉아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쫑알거리는 것이 아닌 몇 개의 가족을 설정해 집안 대 집안으로 노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노는 공간도 관동에 한정하지 않았다. ‘거긴 떼놈들이 있는 곳이라며 할머니가 가지 말라던 중국인거리까지 몰래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가끔 튀는 딸을 보며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여보, 쟤는 내버려둬, 중미는 독특해라고.

엄마에게 혼나 시무룩해져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중미에게 그윽한 미소를 던졌다.

중미야 괜찮다, 너는 특별하니까.”

 

인천 귀향 뒤 선인재단 학교 다니며 자의식 싹터

 

그의 가족이 동두천을 떠나 다시 인천으로 돌아온 건 중미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70년대 말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가 고생의 시작이었다.

아버지께서 새로운 일자리를 제안 받으면서 인천 송림동으로 오게 됐어요. 그런데 사기 비슷한 걸 당한 겁니다. 아버지가 다시 동두천으로 가야할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는데 일단 퇴사한 상태였기 때문에 옴짝달싹 할 수 없었지요.”

중학생 중미가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에 눈을 뜬 장소가 바로 송림동이다.

이사 왔으니 전학을 해야 하는데 당시 제가 송림동에서 갈 수 있는 학교는 박문여중과 인화여중 두 곳뿐이었어요. 학교는 뺑뺑이로 정해졌는데 벌벌 떨면서 엄마가 뽑은 결과는 인화여중이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엔 지옥이라고 일컬어졌던 선인재단에 속해 있던 학교였지요. 그때부터 정말 끔찍한 지옥생활을 경험해야 했어요.”

새하얗고 노란 빛깔의 건물, 창틀을 통해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교실 밖을 나서면 바로 드러나는 푸른 나무로 뒤덮인 산, 그런 동두천의 학교를 다니던 중미에게 인화여중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다.

골리앗 같은 건물은 아무 색도 칠해지지 않아 우툴두툴한 콘크리트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회색빛이었고, 5층이나 되는 건물에 화장실 하나 없었다. 비가 오면 바닥이 진흙탕이 돼 흘러넘치는 바람에 누렇게 물든 젖은 옷과 물이 가득 찬 신발을 신은 채 철벙철벙 교실로 올라가야 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학교라 아래서부터 걸어 올라가야 했어요. 그런데 비가 오면 황톳물이 계속 내려와서 정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선인재단이 돈을 들이지 않기 위해 아예 하수구도 만들지 않고 건물을 지은 거지요.”

그런 폐허와도 같은 학교의 모습은 그림을 잘 그리는 감각적인 아이였던 중미에게 멘붕으로 다가왔다.

학교가 아니라 마치 무슨 콘크리트 제국처럼 느껴졌어요.”

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며 미술 선생님이 쪽지까지 써줄 정도로 중미는 미술에 재능이 많던 학생이었다. 인천으로 돌아온 지 며칠 안 돼 중미는 결심한다.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거야.’

선인학원의 태동은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0년 이 지역엔 성광학원이란 재단이 있었는데 성광중학교와 성광상업고등학교를 운영하는 사학재단이었다. 그런데 이 재단에 지원된 학교자재를 재단 측이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며 폐교 위기에 놓인다. 이때 재단을 인수한 사람이 선인재단 설립자인 백인엽이었다.

육군 중장 출신의 예비역 백인엽은 19588, 재단을 인수한 뒤 19653월 학교법인 이름을 선인학원으로 바꾼다. ()은 자신의 형이자 4성 장군인 백선엽의 이름에서, ()은 자신의 이름에서 각각 한 자씩 따와 지은 이름이었다. 이후 선인재단에 지어지는 많은 학교는 백인엽 가족의 이름을 교명으로 사용했다. 선화여중·고와 인화여중·고는 두 형제의 이름을 차용했고 효열국교는 어머니 이름, 진흥유치원은 아들의 이름에서 각각 따온 명칭이다. 또 운산기계공고는 백선엽의 호로, 운봉공고는 백인엽의 호로 각각 지은 것이다.

선인재단은 일종의 백인엽 왕국이었다. 넓이만도 172(52만 평)로 광활했다. 이 같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백인엽은 주민들의 집 앞 도로를 마구 파헤쳤다. 심지어 이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집 한 채만 달랑 남긴 채 주변을 깎아 절벽 위의 집을 만들기도 했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16개교 31,000여 명의 학생이 이 왕국 안에 갇혀공부를 했다. 공납금을 내는 날이면 돈 자루를 실은 차들이 쉴새없이 학교 언덕을 오르내렸고 교사들은 군인처럼, 혹은 경찰처럼 예비군복을 입고 보초를 서거나 순찰을 돌기도 했다.

선인재단이 붕괴하기 시작한 건 1980년대 초다. 이때 학내민주화가 시작되면서 문교부 감사로 재단의 부정비리가 밝혀졌고 백인엽 이사장은 결국 재단을 국가에 헌납하고 구속된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된 건 아니었다. 백인엽이 물러난 뒤에도 선인재단을 둘러싼 사고와 잡음이 여진처럼 이어진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90년 축대 붕괴 사건이다. 이때 동구 송림5동 박문여고와 선인중학교 사이 부처산이라 부르는 야산 축대가 무너진다. 엄청난 흙더미는 축대 바로 밑 인가를 덮쳐 26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참사를 겪는다.

그때는 제가 만석동에 있었을 때였는데요. 사고 당시 남편 친구의 형도 매몰돼서 돌아가셨거든요. 바로 그 밑이 제가 고등학교 때 살던 곳이었고요. 그 사건이야말로 선인재단의 실체를 압축해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지요. 선인재단의 비리와 전횡이 결국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그렇게 만든 것이죠.”

그 사건 이후 김중미 작가는 수년간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선인재단에 속했던 학교들이 비로소 정상화된 때는 학교들이 시립화, 공립화가 이뤄지던 1994년부터다. 지난 2013년 도화지구 개발 계획에 따라 선인재단의 상징이던 선인체육관이 무너져내렸다. 선인재단의 몰락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진 건물더미 위론 고층아파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점심 값으로 책 사 읽고 영화 보던 학창시절

 

선인재단과 맞닿은 송림동 역시 학교에서 받은 인상과 다를 바 없었다. 송림동은 자신의 주거지에서 쫓겨나온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빈민촌이었다.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은 중구 지역에 조계지를 만들면서 원주민의 삶터를 빼앗았고, 그렇게 주민들은 조금씩 밀려나 송림동에 움집을 짓고 살게 된다. 여기에 한국전쟁과 함께 월남한 황해도 이북사람들이 밀려오면서 빈민촌을 형성한 것이다.

이후 산업화와 함께 공장들이 지어졌다. 공장지대인 이유로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웅웅 터져나왔고, 이따금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와 먼지가 동네를 안개처럼 뒤덮었다. 그 속에서 자신보다 더 힘들어하는 가족들을 보며 중학생 중미는 생각했다.

이제 내가 우리 집안에서 어른 노릇을 해야 하는구나.’

예술과 문학을 좋아해 비현실적인 삶을 갈구했던 엄마 아빠는 어린 중미보다 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난은 한 가정의 잘잘못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때도 이즈음이다.

동두천에서 학교 다닐 때 친구의 부모가 포주인 경우를 보며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건 아녜요. 그런데 송림동으로 이사온 뒤 그런 자의식이 더 깊어졌어요. 집에서 학교를 가려면 산동네를 넘어가야 했는데, 산동네 빈민촌, 판자촌을 처음 경험하게 된 거지요. 그 판자촌을 목격하며 우리 집 역시 저 무리에 사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고, 우리의 가난은 사회적 가난이구나 생각하게 된 거죠.”

중미의 형제들은 모두 정확하게 3년 터울이었다. 이는 형제들이 같은 해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한꺼번에 진학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중학교 3학년. 중미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었을 때 오빠는 대학에 진학하고 공부 잘하는 동생은 중학교에 입학해야 할 시기였다. 중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진학과 관련해 부모님은 제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판단해야 했던 거죠. 3년 뒤의 일이 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대학을 가는 게 불가능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실업계로 진로를 정했지요.”

당시만 해도 선인재단에 속했던 인화여중과 선화여중 학생들이 실업계를 지원할 경우 반강제적으로 선화여상에 원서를 넣어야 했다. 진학지도 교사들은 실업계를 가는 학생들은 반드시 선화여상으로 갈 것을 강요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의 경우엔 더더욱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재단 측에선 선화여상을 좋은 학교로 만들고 돈도 벌어야 하는 욕망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저희들에겐 선택권이 없었고 실업계를 간다고 하면 교사들은 다 선화여상으로 몰아넣었죠. 왜 제게 고등학교 선택권이 없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당시 진학지도 선생님은 반에서 2, 3등 하는 아이들도 다 선화여상으로 가는데 너는 그 정도도 아니면서 왜 뻗대는 거냐 뭐 이런 식이었어요.”

울며 겨자 먹기로 진학한 선화여상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앞의 6개 반은 시험에 합격해서 들어온 그룹이고, 뒤의 6개 반은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진 뒤 돈을 내고 들어온 학생들이었다. 2학년 때 뒤의 6개 반 학생들이 항의가 이어지면서 비로소 학생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1980년 초반은 그런 게 통하는 시절이었다.

1980518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나고 앞서 서울의 봄과 같은 근현대 역사의 풍랑 속에서 김중미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면도날처럼 예리한 고등학교 2학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 당시 중미의 눈에 비친 교사들은 하나같이 학교재단의 노예나 꼭두각시처럼 보였다. 그나마 그가 유일하게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따랐던 교사마저 결국 해고를 당했다.

제가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던 분은 영어를 가르치던 분이셨어요. 그 선생님이 사르트르가 죽던 날 수업에 들어오셔서 영어로 장 폴 사르트르라고 칠판에 쓰시는 겁니다. 사르트르 사망을 어줍잖게 슬퍼하고 있던 차였는데 선생님이 사르트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며 그 선생님을 더 존경하게 됐지요.”

학교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존경하던 선생님마저 교단을 떠나자 중미는 서서히 사회부조리나 집단적 빈곤의 문제에 눈을 뜨게 된다. 좬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좭, 좬어둠의 자식들좭과 같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는 사회 한복판으로 뛰어들 채비를 하기 시작한다. 훗날 만석동에 들어간 것 역시 이때부터 싹튼 사회비판의식이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선인재단에 속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중미 생각의 크기는 독재정권까지 뻗쳐나가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선생님마저 떠난 학교에서 중미의 유일한 친구는 역시 이었다. 중미는 수업시간에도 책만 읽었다. 군것질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점심도 굶으면서 점심 값으로 책을 사 볼 정도로 중미에게 책은 생활의 전부였다. 그렇게 책에 몰입하면서도 성적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너는 맨날 책만 읽는데 어떻게 그런 성적을 유지하냐며 부러움 반, 질시 반으로 물어오기도 했다. 독서광이던 중미는 한 달 용돈 1000원에, 점심을 안 싸가는 대신 돈으로 달라며 받은 1000원을 더해 2000원이 생기면 무조건 책부터 샀다.

저는 군것질 같은 것을 하나도 안 했어요. 한 달 용돈으로 1000원을 받았는데 그 1000원으로 책을 사기엔 너무 부족한 거예요. 삼중당문고는 얇은 건 150, 좬죄와 벌좭처럼 두꺼운 건 230원 이랬거든요. 제 손에 2000원이 들어오면 삼중당문고 두세 권을 사고 입장료가 250원인 개봉영화를 두 편 정도 봤어요. 동네에서 가까운 애관극장과 문화극장을 자주 갔어요. 좬문학사상좭이나 좬월간팝송좭 같은 잡지도 사서 읽었어요.”

그러고도 돈이 남으면 중미는 일명 빽판’ ‘야매판으로 불렸던 복제 ‘LP을 구입했다. 다행히도 예술을 워낙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청계천에서 부속을 하나하나 사서 조립해 마련한 전축이 집에 있었으므로 음악은 실컷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가난한 삶 속에서도 월급을 타면 반드시 영화 한 편은 봐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었다. 언젠가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이 내한공연을 왔을 때 아버지는 1년 모은 용돈을 몽땅 투자해 가족 모르게 서울에서 공연을 보고 온 적도 있었다.

사회 진출을 앞둔 고3이 되면서 중미는 시에 천착하게 된다. 때는 광주민주화항쟁 직후였고,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책을 잘못 만들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될 수도 있었다. 책을 읽거나 보유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시절이었다.

도대체 80년에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겁니다. 그러나 언론자유가 없던 시기이니 그 내용을 알기가 어려웠어요. 그나마 시라는 장르에서는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한 얘기가 은유적으로 표현되기도 했지요.”

장차 문학을 하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중미는 여러 시를 접하면서 문학엔 세상을 걸러서 볼 수 있는 힘이 있구나, 세상을 조금 더 깊이 볼 수 있게 해주는구나 깨닫는다.

 

원풍모방 앞 병원 입사하며 노동자 도시빈민 목격

 

사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 김중미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림성심병원 원무과에 들어간다. 공교롭게도 구로동과 신길동 사이의 그 병원 바로 앞엔 원풍모방이 있었다. 여성운동의 메카로 알려졌던 원풍모방 노동조합은 1970년대 민주노조의 가장 강력한 보루였던 곳이다. 원풍모방 노조는 19805·17 이후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맞서 2년여에 걸친 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1982930일 해체되고 만다.

피가 철철 흐르는 노동자들이 병원으로 실려오는데 1주일이 넘도록 어떤 신문이나 방송도 보도를 하지 않는 겁니다. 다 죽어가는데도 병원비가 없어서 나가야 하는 사람들, 산업재해를 당해 실려 들어오는 10대 노동자들도 지켜봐야 했지요.”

김중미는 그렇게 못 볼 걸보면서 자신의 삶을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사회문제의식을 내면에 열심히 담으며 살아가던 어느 날, 김중미는 인사동을 찾게 된다. 인사동을 걷다가 우연히 들어가게 된 한 화랑에서 김중미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 화랑에서 만난 그림들 속엔 화려한 색감도, 아름다운 풍경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머리띠를 두르고 팔을 높이 들고 있거나 거미줄처럼 주름진 얼굴의 소유자들이 주인공인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민중미술이었다.

“‘현실과 발언이라는 동인전이었어요. 그때까지 5년 동안 그림과 담을 쌓고 지내던 터에 그 그림들은 충격과 감동으로 다가왔지요.”

, 예술이 이럴 수도 있는 것이구나.’ 전시장을 돌면서 김중미는 결심한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 살아가겠노라고.

처음 직장에 들어갈 때 엄마에게 말씀을 드렸었어요. 동생이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직장을 다니겠다고. 그리고 이후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말이죠.”

그가 엄마에게 말했던 하고 싶은 것은 늦깎이라도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원풍모방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그는 생각한다.

대학을 가면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아냐, 내가 원하는 삶은 이게 아니야.’

그때부터 김중미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엄마와 자신에게 약속한 시간 3년에 1년을 더해 4년 간 직장생활을 한 중미는 24세 되던 1987년 사표를 던진다. 대학병원 원무과에서 일하며 한국사회의 현실을 자각하고 도시빈민 문제에 눈을 뜬 김중미는 도시빈민들의 삶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정착한 곳이 바로 만석동이었다.

 

24세 꽃다운 나이에 만석동 도시빈민 속으로 들어가다

 

인천의 오래된 빈민 지역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송월동, 송림동, 금창동, 송현동을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만석동을 찾았는데 거기가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겁니다.”

지금은 도시의 외딴 섬처럼 남았지만 당시 만석동은 산등성이를 따라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포구를 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만석동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빈민 지역입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의 병참기지가 있던 곳이지요. 6·25전쟁 이후에는 피난민들이 모여 살았고, 60, 70년대엔 이농민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된 동네예요. 항구가 있고 도심지가 가까워 조직폭력배들도 많았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제가 만석동에 처음 올 때만 해도 골목마다 대마초를 피운 요구르트병 빨대가 널려 있었고, 집집마다 감옥을 들락거리는 아들 한둘은 있었던 곳이었지요. 그렇지만 그들조차 옆집 할머니 아들이거나 공부방 아이의 삼촌, 아버지였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김중미는 만석동에 들어가기 전, 천주교도시빈민회 활동을 시작한 터였다. 천주교도시빈민회는 제정구, 정일회, 김혜경 씨 등이 속해 있는 단체였다.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도시빈민협의회가 있었다. 종교의 사회참여가 활발하던 시기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영화, 책까지 모두 버리고 선택한 만석동 빈민생활은 그러나 결코 녹록치 않았다.

도시빈민운동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전 스스로 얼치기 부르주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가난했지만 지적 허영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만석동엔 지금의 부평구청장인 홍미영 선배가 먼저 들어가 있었어요. 홍미영 선배 같은 경우는 만석동 41번지 쪽이라 저와는 조금 다른 지역이기는 한데 제가 만석동에 들어가는 걸 반대하셨어요. 주민들의 반공이데올로기가 강하고 배타적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라고 했지요. 그렇지만 결국 친구 둘과 함께 세 명의 처녀가 만석동에 들어갔어요. ‘어디 가서 뭘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냥 가난하게 살아라, 그게 먼저다라고 조언하는 선배들도 있었거든요.”

여자 셋이 무작정 빈민촌에 들어가 사는 모습은 당시 사회 분위기상 공안당국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히 위험한 시도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아가방, 즉 탁아소였다. 낮에는 탁아소를 운영했지만 먹고살기 위해 신문배달을 해야 했고 집회에 참석하며 고단한 나날을 보낸다. 1년이 지났을 때 함께 지내던 두 명의 친구가 나가고 김중미 혼자 남게 된다. 몸도 마음도 쇠약해진 김중미는 회의를 느낀다. 도시빈민운동이 정말 변혁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

“1988년은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운동세력들이 움직이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 복잡다단한 운동판을 보며 회의가 들었고 학출(학생출신운동가)이 아니란 열등감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으로 살겠다고 만석동에 들어왔지만 하루 세 끼는 꼬박꼬박 챙겨먹고 있었고. 아무튼 생각이 복잡했어요.”

만석동 생활 중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아가방을 운영해야 하는데 운영비가 없다 보니 신문배달을 해서 번 돈을 고스란히 아가방 운영에 탈탈 털어넣어야 했다. 아기들을 맡기는 가정에선 먹여주고 재워주고 돌봐주는 것에 대해 일정한 대가를 치르기로 했으나 돈을 내는 부모들은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조차 공동화장실을 써야 하는 만석동에서 산다는 자체가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몸도 많이 아팠다. 게다가 함께 하던 동지들마저 떠난 상태였다. 그렇지만 김중미는 이를 악물었다.

난 이겨낼 수 있어.’

1년 동안 아가방을 운영하며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은 김중미는 아가방을 공부방으로 바꾼다. 주민들은 어차피 돈을 내지 않을 것이므로 아예 처음부터 무료공부방으로 시작하는 편이 나았다. 이때 만난 아이들이 그의 명작 좬괭이부리말 아이들좭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제 소설 속 숙희 숙자 자매, 영호, 그 아이들이 실존한 건 아닙니다. 소설은 언제나 개연성 있는 허구이니까요. 공부방에서 함께 생활한 아이들은 맞벌이 부부나 조손 가정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요.”

공부방 운영이 활성화되며 자원교사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주로 대학생들이었다. 두 명의 친구가 떠난 대신 다른 한 명이 그들의 자리를 채워주었다. 그렇게 1988~89년 공부방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변화가 일어난다. 도시빈민운동이나 공부방이 단순히 도시빈민운동의 수단이 되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김중미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공부방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돼야 한다는 뜻에 동조했던 동료, 후배들과 함께 만석동에서 공부하기 위한, 또 활동하기 위한 방법들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 또래나 후배들이 오기 시작했고요. 90년대 들어선 인하대, 경인교대 등 인천의 대학생들도 발걸음을 했어요. 그때 활동을 시작했던 학생들이 저를 비롯해 연애하고 결혼하고 하면서 만석동에 모여 살게 된 거죠. 그러면서 지금의 공동체로 이어져오고 있는 겁니다.”

김중미는 28세 되던 해인 1990년 동갑내기와 결혼을 한다. 남편은 만석동으로 자원봉사를 하러 왔던 인하대 학생이었다. 남편과의 만남도 보통 인연은 아니었다. 결혼한 뒤에 김중미는 자신이 남편의 집 앞을 지나쳐 등하교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제가 처음 전학 와서 선인재단으로 학교로 가던 길목에 바로 남편 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시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갔을 때였어요. 그래서 남편과 송림동 산동네 얘기를 하면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결혼 뒤 만석동에 살면서 91년에 첫 딸을 낳고, 96년에 둘째 딸을 출산한 김중미는 첫 딸이 5세 될 때까지 그 좋아하던 영화를 보지 않았다. 대신 그 열정을 모아두었다가 19998~10월 한 편의 소설을 써서 2000년 책으로 펴낸다. 그 책이 바로 몇 달 전 판매부수 200만 부를 돌파한 좬괭이부리말 아이들좭이다. 좬괭이부리말 아이들좭은 2000창비 좋은 어린이책에 당선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출판계를 휩쓴다.

김중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보잘것없는 가난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세상을 향해 가난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며, 손가락질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외치고 싶었다.

“99년은 IMF가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어요. 빈민 지역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지요. 동네 곳곳에서 자살했다는 소문과 누구네 엄마, 아무개 아빠가 집을 나갔다는 소리가 들려왔지요. 아이들은 한밤중에 부모의 싸움을 피하기 위해 맨발로 뛰쳐나오고, 학교 급식 한 끼로 하루를 버티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사람들이 정말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남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누군가의 것을 빼앗고 짓밟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결핍이 사람을 더 넉넉하게 해준다고 말이죠.”

좬괭이부리말 아이들좭은 그렇게 3개월 만에 완성됐다. 이전까지 김중미는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런 대작이 세상에 나왔을까. 얼마나 강했으면 말이다.

 

새로운 농촌공동체 삶을 위해 선택한 강화도에서의 삶

 

 

2001년 김중미는 남편과 함께 강화도로 이사한다.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라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함이었다.

강화도에 정착한 것은 개인적인 이유도, 활동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자체가 삶이기 때문에 강화도에 산다 해도 만석동의 삶과 다르지 않지요.”

현재 그가 속한 공동체는 모두 11가족이 속해 있다. 이 중 7가족은 만석동에, 4가족은 강화도에서 살아가는 중이다. 공동체 사람들은 공부방 운영, 농사, 만석신문 발행 등의 활동을 하며 삶을 꾸려나간다. 경비는 이들 11가족이 운영하는 공제회에서 충당한다. 많이 버는 사람은 많이 내고, 적게 내는 사람은 적게 내며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단 최소한 수입의 15% 이상은 내야 한다. 부부 예비교사, 대기업근무 경력자, 김중미 씨 부부 등 공동체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강화도는 실은 외할머니의 고향이기도 하다. 외할머니는 창영초등학교 전신인 영화학당에 다니다 아펜젤러의 눈에 띄어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신식여성이었다. 외할머니가 졸업하고 유치원을 했던 곳이 강화도의 화도교회인데 그 외할머니의 고향에 살게 된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공동체의 삶을 살아갈 생각이다. 글 쓰는 일을 병행해나가는 것은 물론이다.

어떻게 보면 저는 우리나라 근현대 시기에 중요한 공간을 두루 경험하며 살아온 운 좋은 사람입니다. 그 공간들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공간들이었고요. 바로 이런 공간이 제겐 사상의 기반이 된 것 같아요. 언제라도 저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아주 행복한 거죠.”

그는 이따금 두 딸과 함께 동인천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 한다. 그리고 딸들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엄마가 세상에 태어나 자란 땅이 바로 이곳 인천 땅이란다. 난 언제든지 내가 태어나고 살아온 땅을 딛고 살아갈 수 있어 행복하단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너희들도 늘 함께 가면 좋겠어. 엄마가 걸어가는 이 행복한 길을 말이야.’

 

 

金眞國. 인천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