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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11. 차이나타운과 동화마을

by 김진국기자 2016. 10. 5.

맛있고 신나는 관광1번지 … 거리마다 설레는 발걸음

 

 

▲ 송월동 '동화마을'은 동화속 주인공들을 그림과 조형물로 설치, 주말엔 발디딜틈이 없을 정도로 관광객이 넘쳐난다.(사진 위)

 

▲ 인천 차이나타운(중국인거리)는 개항 전후인 1882년 화교들이 정착하기 시작해 조성된 곳으로 지금은 최고의 관광명소로 거듭났다.(사진 아래)

 

 


임오군란 때 들어온 청나라 상인들 '차이나타운' 형성
한때 쇠락했다 21세기 들어 다시 전성기 
송월동 골목길따라 동화 벽화·조형물 다양 '환상적'

 

 

붉은 빛깔과 황금색의 격렬한 조화. 그 한 가운데를 도도하게 흐르는 사람들의 물결. 개항 초기의 풍경이 이랬을까. 개천절인 3일 오후 5시. 큰 바다로 나아가는 거대한 파도처럼, '차이나타운'(중국인거리)이 사람들로 물결친다.
 

손을 꼭 잡은 연인에서부터 유머차를 미는 가족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의 표정은 가을하늘을 닮아 있다. 사람들은 '셀카봉'을 누르거나 상점을 기웃거리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중이다.

사람물결을 따라 총총걸음을 걷는다. 무수한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치거나 발등을 밟으며 지나가지만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화덕만두, 홍두병, 공갈빵, 에그타르트, 하얀100년짜장…. 음식점·가게 앞은 맛있는 중국요리나 간식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원하는 중국전통음식을 맛보려면 30분~1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양공주들이 미군을 상대로 밥 먹고 살았던 한국전쟁 직후 차이나타운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고향에 돌아가지 못 한 화교 늙은이의 움푹 꺼진 눈초리가 음산한 슬럼가였던 70~80년대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2016년 가을, 차이나타운은 내외국인들이 가장 즐겨찾는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지로 발돋움했다. 얼마전 종영한 '가화만사성'이란 공중파 드라마의 주 촬영장소가 될 정도로 차이나타운의 브랜드가치는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거리를 따라 송월동 쪽으로 향하자 신데렐라, 어린왕자, 도로시가 반가운 얼굴을 드러낸다. '동화마을' 역시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은 마찬가지다. 소나무가 많아 '솔골' 또는 '송산'으로 불렸던 송월동이 '판타지 세상'으로 바뀌기 시작한 때는 2013년이다.


소나무 숲에 걸린 달이 아름다운 송월동은 1883년 개항 직후만 해도 독일인 등 외국인들이 살던 부촌이었다. 그러나 근현대 들어 사람들이 마을을 떠났고 하나 둘 빈 집이 늘어났다. 중구는 "사람들이 찾아드는 마을로 만들겠다"며 팔을 걷어부친다. 불법쓰레기가 쌓여 있던 집 앞에선 꽃들이 자라기 시작했고, 낡은 담과 옹벽엔 동화속 주인공들이 그려졌다. 캐릭터 조형물도 곳곳에 설치됐다. 그렇게 동화마을엔 골목길을 따라 11개 동화를 주제로 한 벽화와 조형물이 들어섰다. 오즈의 마법사를 배경으로 한 '도로시 길', 빨간모자 속 할머니를 찾아가는 주인공 소녀가 그려진 '빨간모자 길', '북극나라길'과 같은 테마코스도 조성됐다. 송월동은 마침내 '차이나타운의 꽃'으로 피어났다. 무엇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겐 상당히 매력적인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차이나타운의 역사는 중국인들이 인천에 정착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며 청나라 군인들과 함께 40여명의 군영 상인들이 인천에 온다. 1884년 청나라는 '청관(淸館)지계'란 이름으로 북성동 일대 1만6528㎡(5000평)를 차지한다. 청관은 청나라관청(청국영사관)이 들어서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치외법권 지역인 청국조계지가 설정되며 화교의 수는 235명으로, 1890년대엔 1000명으로 증가한다.

화교들은 인천을 상업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상권을 장악해 나간다. 이후 인천과 뱃길이 트인 산둥성(山東省)에서 많은 사람들이 건너온다. 이들은 처음 조선에서 귀한 비단, 광목과 같은 경공업제품으로 짭짤한 재미를 본다. 1887년엔 옌타이(煙臺) 지방에 살던 왕씨·강씨가 양파, 당근, 토마토 등을 들여오며 채소시장까지 장악한다. 한 때 주안, 용현동, 부평일대 황금채소밭의 상당 부분이 중국인 소유였다. 인천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중국인 채소밭에 몰래 들어가 야채를 훔쳐먹던 기억은 흔한 추억이다.  

화교의 쇠락은 1894년 청일전쟁 패배, 6.25전쟁의 발발, 인천상륙작전을 겪으며 서서히 진행됐다. 한국전쟁 뒤 화폐개혁으로 장롱 속의 돈을 신고하고, 황금농장을 헐값에 넘기며 중국인들은 하나 둘 인천을 떠난다. 그러나 21세기 접어들며 다시 중국인들이 인천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차이나타운이 관광특구로 지정되며 탄탄한 경쟁력을 갖춘 도시로 거듭난 것이다. 지식경제부는 2009년 차이나타운을 우수특구로 선정하기도 했다. 자장면박물관, 한중문화관, 화교역사관 등 차이나타운엔 새로운 문화관광시설이 부쩍 들어서기도 했다.

"니 하오"(안녕하세요), "환잉 닌 다오 렌촨"(인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쩌리씌 씰찌에 쭈밍더 찡띄엔 화렌째에"(이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천차이나타운입니다)"

차이나타운은 지금 형형색색으로 출렁이며 사람들을 유혹하는 중이다.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