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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아사오카여관과 돌담길

by 김진국기자 2016. 10. 19.

 

일본성 텐슈가쿠 형식 건물 일제강점기 '최고급 숙소 

 


'지금은 4층 빌라 들어서

 

중구청 돌담길 문화·역사 등 6개 테마 구성

 

 

 

사진설명

: 사진 위는 현재의 모습이고 아래는 100여 년 전 풍경이다. 아래 사진의 우측 4층 건물이 아사오카여관이며, 현재는 빌리가 들어섰다. 아래사진에서 나무가 무성한 곳은 현재 인천 중구청 돌담길로 바뀌었다.

 

 



중구청을 등지고 돌담길을 따라 신포동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VISION(이상), TOURISM(관광), CULTURE(문화), HISTORY(역사), THE FIRST(최초), VESTIGE(흔적), 중구청 돌담벽은 6개의 테마로 꾸며져 있다. 돌담벽은 주제에 걸맞는 콘텐츠로 장식돼 있다. 청동판, 그림, 안내도, 돌조각과 같은 것들이다.  

본정통, 인천청과주식회사, 영국영사관, 인천세관 …, 바닥엔 인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그림과 설명이 새겨져 있다. 신포문화의 거리, 월미문화의 거리, 동인천삼치거리, 청일조계지경계계단과 같은 관광명소에 대한 설명도 눈에 띈다. 이 돌담길을 걸으며 벽과 바닥을 꼼꼼히 살펴만 봐도 충분한 인천공부가 될 것 같다. 그리 길지 않은 돌담길을 따라 걷는 동안 문화적 공간을 찾은 기분을 맛보았다. 중구청 돌담길은 지금 '야외박물관' '야외미술관'처럼 사람들을 만나는 중이다.

돌담길이 끝나는 자리에 폭 1m도 안 돼 보이는 층계가 나타난다. 중구의회로 통하는 샛길이다.

바로 그 옆 '신포로 27번길 58'이란 주소가 붙은 건물이 서 있다. '풍전아트빌'은 1층은 주차장, 윗층은 주거공간인 4층 건물이다. 1897년 풍전아트빌 자리엔 '아사오카(淺岡, 천강)여관이 있었다. 아사오카여관은 처음 요리점으로 문을 열었다. 아사오카여관은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죽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자주 묵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면서 이토가 이 여관에서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아사오카여관은 일본성의 텐슈가쿠(天守閣) 형식으로 지은 건물이었다. 텐슈가쿠는 유럽으로 치면 성의 '아성'격의 일본성 안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아사오카여관은 일본식 목조 4층 건물로 1층부터 3층까지는 층 사이에 눈썹지붕을 설치했다. 3층 지붕측면에는 2개의 박공을 달았고 4층 지붕은 4면을 모두 합각지붕처럼 보이도록 했다. 건물지붕은 없었으며 유리창을 냈다는 점이 특이하다.  

당시 중앙동 1가 대불호텔 건너편에 있던 하나야(花屋) 여관, 사동 인천중동우체국 건너편에 있던 아사히야(旭屋) 여관, 중구의회 앞 주차장 모서리쯤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하라킨(原金) 여관 등이 3층이었다는 사실에 비춰 4층 아사오카여관은 여관 중에서도 최고급 여관이라 할 수 있었다. 

개항 이후 인천에 온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가려면 며칠은 유숙을 해야 했고 자연스럽게 숙박시설이 들어섰다. 이들 여관들은 1900년 경인철도가 개설되기 전까지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철도가 개설되며 서울로 가는 시간이 단축됐고 아사오카여관이나 대불호텔과 같은 숙박시설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아사오카여관은 광복 뒤 귀환동포 수용소로 사용했으나 언제인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세대주택이 들어섰다. 

풍전아트빌 건너편엔 무역회사와 식당간판이 붙은 빌딩이 서 있다. 건물 왼편으론 중앙커피숍이, 오른편으로 가도공방, 수채화공방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다. 풍전아트빌 바로 옆에선 사거리가 열린다. 사거리 모퉁이는 MG새마을금고, 중앙철물건재, 곤드레돌솥밥이 각각 차지했다. 사거리에 'MG새마을금고'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은 '새마을금고 사거리'라고 부를 것이다.

작은 사거리는 신포동, 인천항, 자유공원, 차이나타운으로 길이 열려 있다. 다른 세 방향과 달리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길은 긴 계단으로 이뤄진 모습이다. 인천사람들이 '바람구멍'이라고 부르는 계단이다.  

이 계단 중턱에 앉으면 인천항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다. 한여름에도 이 계단에 앉으면 거대한 에어컨을 켠 것처럼 시원하게 땀을 식힐 수 있다.

아무리 문명의 이기가 만연한다고 해도 자연의 섭리를 넘어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개항기 일류호텔급 여관은 120년을 지나오는 동안 인천항의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아사오카여관이 있던 자리에 서서 인천항의 바람을 맞는다. 

/글 김진국 기자·사진 유재형 사진가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