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해평화협력시대2

<굿모닝인천> 칼럼 인천의 아침 바다는 늘 인천을 향하고 있었다. 때론 블루나 카키의 무늬로, 때론 검붉은 빛깔로 밀려들었다. 비류왕이 미추홀(인천) 왕국을 건설한 이래 인천은 풍요의 바다를 개척해 나갔다. 사람들은 ‘능허대’(凌虛臺)에서 바다를 건너 대륙으로 향했고, 이국인들은 인천~산둥(山東)을 잇는 등주항로를 따라 능허대로 들어왔다. '산둥성의 개가 짖고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능허대는 삼국시대 번성한 국제무역항이었다. 능허대 뿐만이 아니다. 자연도(영종도)엔 '경원정'이란 객관이 송나라 사신과 상인들을 접대하기도 했다. 그렇게, 바다를 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교역이 인천에서 닻을 올렸다. 인천의 바다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때는 18세기 이후다. 중국과 일본을 정복한 서구열강들이 조선을 기웃거리기 시작했.. 2018. 10. 23.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 북한 땅 '개성'을 찾았던 때는 2007년 여름이었다. 고려 초기 건립한 사찰 '영통사'에서 열리는 '성지순례 원만성취 기념 법회' 취재 차 개성 땅을 밟았다. 영통사는 우리측 천태종이 건축 재료를 지원해 복원한 남북화합의 상징이었다. 민둥산,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개성의 풍경은 우리나라 70년대 모습 그대로였다. 천연색사진현상소, 리발소란 간판과 '조선은 하나다'와 같은 구호도 눈에 들어왔다. 붉은 머플러를 한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오전 11시쯤 열린 법회에서 북측 장혜명 영통사 주지스님과 우리측 전운덕 천태종 전 총무원장은 각각 환영사와 답사를 통해 "영통사를 남북평화통일의 성지로 만들어 가자"는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법회 뒤, 북측 안내원을 따라 선죽교와 고려박물관.. 2018. 8.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