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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굿모닝인천> 칼럼 인천의 아침

by 김진국기자 2018. 10. 23.

 

 

바다는 늘 인천을 향하고 있었다. 때론 블루나 카키의 무늬로, 때론 검붉은 빛깔로 밀려들었다.

비류왕이 미추홀(인천) 왕국을 건설한 이래 인천은 풍요의 바다를 개척해 나갔다. 사람들은 능허대’(凌虛臺)에서 바다를 건너 대륙으로 향했고, 이국인들은 인천~산둥(山東)을 잇는 등주항로를 따라 능허대로 들어왔다. '산둥성의 개가 짖고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능허대는 삼국시대 번성한 국제무역항이었다. 능허대 뿐만이 아니다. 자연도(영종도)'경원정'이란 객관이 송나라 사신과 상인들을 접대하기도 했다. 그렇게, 바다를 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교역이 인천에서 닻을 올렸다.

인천의 바다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때는 18세기 이후다. 중국과 일본을 정복한 서구열강들이 조선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 등 열강들은 이양선을 보내 문호개방을 강요하며 시위를 일삼았다. 설상가상으로 서구 열강의 으름장에 개항을 당한일본이 그들의 흉내를 내며 같은 방식으로 조선을 압박해 들어왔다.

강화도 염하에 군함을 먼저 띄운 건 프랑스와 미국이었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는 그러나 조선의 문을 열지 못했다. 조선은 함포 몇 발에 개항을 한 중국, 일본과는 달리 쉽게 정복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관군은 물론 의병, 승병까지 합세한 조선인들은 최후의 순간에도 눈을 부릅뜬 채 적의 얼굴에 칵 하고 피를 내뱉으며 죽어갔다.

서서히 지쳐가던 조선에서 호기를 잡은 건 일본이었다. 운요호(雲揚號)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1876)을 체결한다. 침탈의 기반을 마련한 일본은 조선을 점점 옥죄며 결국 굳게 닫혔던 쇄국의 자물쇠를 끊어버린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던 제물포는 그렇게 일본과 서구 열강의 희생양으로 세계를 만난다. '조선은 내 것'이라며 외국 군대들 간 벌인 전장도 인천 앞바다였다. 그들에겐 기회였지만 우리에겐 수난의 바다이던 시기였다.

1883년 개항은 인천에 '대한민국 최초'란 수식어를 단 유·무형의 역사·문화 유산을 남기기도 했다. 근대식 군함 양무호, 묘도해수욕장, 인천수족관, 주안염전에서부터 근대적 행정기관인 인천해관(1883), 바다에 등불을 밝힌 팔미도등대(1903), 해군사관학교인 조선수사해방학당(1893)에 이르기까지 인천엔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가 즐비하다.

오랜 세월, 바다를 둘러싼 격랑의 시대를 의연하게 헤쳐 온 인천은 지금, 새로운 도전의 항해를 시작했다. 지난해 컨테이너 물동량 300TEU 시대를 열어젖힌 인천항은 이제 400TEU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민선7기 인천시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남북공동어로수역을 조성하는 서해평화협력시대의 개막을 준비 중이다. 머잖아 인천의 바다에선 포탄과 불법중국어선 대신 우리 남북 어민들이 어우러져 꽃게를 잡는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국립인천해양박물관건립사업 예비타당성 조사가 반드시 통과돼야 하는 당위성은 예나 지금이나, 위기였거나 기회였거나 인천이 한반도의 인후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개항기의 낯설고 딱딱한 서양문물을 먹기 좋게 씹어 전국으로 공급한 도시도 인천이었다. 한 예로 종교가 그랬고, 음악도 마찬가지다.

바다를 중심으로 흘러온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축이었고, 남북통일과 해양강국의 미래를 견인하고 있는 인천. 인구 300만의 도시임에도 국립문화시설이라곤 2015년 유치한 '세계문자박물관'이 전부라는 현실 또한 국립해양박물관이 하루속히 인천에 들어서야 하는 이유로 회자된다.

이 가을, 황해 위로 아침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바다가 출렁일 때마다 무수한 햇살의 조각들이 물비늘로 반짝인다. 저 무수한 태양의 편린들은 혹시 바다를 부둥켜안고 살다 간 인천사람들의 영혼이 아닐까.<출처 월간 <굿모닝인천>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