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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동서남북의 소통 홍예문

by 김진국기자 2016. 10. 12.

2016년 10월 12일 00:05 수요일  

 

 
▲ 홍예문은 인천에 사는 일본인이 늘어나면서 거주지를 확장하고 원활한 물자수송을 위해 1906~1908년 뚫은 작은 터널이다. 이후 108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같은 풍경으로 사람들을 맞고 보내는 중이다. 2016년 홍예문 전경. 옛날 사진과 같은 각도로 촬영하기 위해 사람이 없을 때 찍었다.

 

 

 

조선인 피로 만든 무지개문...

                                 108년을 소통하다

 

1906~1908년 일본인을 위해 축조 
 거대한 암벽 뚫기 위해 수많은 희생 이어져
 터널로 남북·문 윗길로 동서 왕래 

 

 

 

아치형의 돌문 저 편엔, 왠지 그리운 사람이 서 있을 것만 같다. 신포동~동인천, 중구~동구를 잇는 육중하면서도 예쁜 응봉산 남쪽 자락의 무지개문. 인천시 중구 송학동 2가20, '홍예문'은 108년 동안 이 자리에 서서 사람들을 맞고 보냈다. 
신포동 쪽에서 인성여고를 지나 홍예문으로 향한다. 축대와 계단이 시작되는 왼쪽 비탈길에 '옛날전통찻집'과 '아미가'란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홍예문 입구에 차량 서너 대가 서 있다. 동인천 방면에서 넘어오는 차를 먼저 지나보내기 위해 대기하는 차량들이다.
몇 대의 차가 넘어온 뒤 서너 대의 차가 저쪽으로 넘어간다. 폭 4.5m의 홍예문은 승용차 두 대가 동시에 통과하기가 어렵다. 차가 지날 때는 사람들도 길을 양보한다. 홍예문은 어쩌면 소통의 방식을 가르쳐주고 있을 지도 모른다. 좁은 길에서 만났을 땐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는, 그래야 이쪽도 저쪽도 목적지에 닿을 수 있다는 진리를 말이다.
차들을 모두 보내고 돌문 안으로 들어선다. 위쪽을 올려다 보는데 생각보다 꽤 높게 느껴진다. 홍예문 위쪽은 길이다. 터널이 남북을 관통한다면 윗길은 동서를 잇고 있다.
일제강점기, 높이 13m의 홍예문 위에선 '노상방뇨'가 종종 '자행'됐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엔 홍예문으로 일본순사들이 지나갈 때 그 위로 오줌을 누고 달아나곤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설엔 일본여자가 노상방뇨를 하다 조선인의 발길질에 엉덩이를 걷어차였다는 얘기도 있다. 이 같은 얘기들은 홍예문 건축의 목적과 건축과정이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러일전쟁 이전 6000여명이던 일본인은 1906년 1만3000명을 웃돈다. 일본인들은 사는 지역을 확장시켜야 했다. 신포동에서 만석동으로 가려면 내동이나 화평동 쪽으로 한참을 돌아가는 번거로움을 해결할 필요도 있었다. 홍예문을 뚫으면 제물포에서 경인선 축현역(지금의 동인천역)으로 가기도 수월해질 것이었다. 1906년 시작, 홍예문을 완공한 1908년까지 수많은 조선인들의 희생이 이어졌다. 변변한 발파기계도 없던 시대, 사람들의 힘으로 거대한 암벽을 뚫고 터널을 만든다는 것은 시쳇말로 '맨 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암벽을 깨뜨린 자리에 화강암으로 쌓고 천정은 빨간벽돌로 마감한 홍예문을 일본인들은 '아나문'(穴門)이라고도 불렀다. 홍예문은 그러나 조선인들에겐 피로 만든 '血門'이었던 셈이다. 홍예문은 같은 시기 준공한 '긴담모퉁이'와 더불어 일제가 자랑하던 남북교통의 2대 동맥이기도 했다. 
홍예문을 지나자마자 왼쪽으로 가파른 비탈길이 나타난다. 자유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그 옆으로 1층은 철학관, 2층은 카페 '보닉'이 있는 건물 앞 난간에 몇 명의 아주머니들이 플래카드를 붙이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국가안보결의대회' 개최를 알리는 플래카드다. '자유공원을 맥아더공원으로 개명합시다!' '김정은 제거! 북핵폐기!, 사드배치!, 우리도 핵무장하자! 우리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란 문구가 써 있다. 2016년 10월20일 낮 12시부터 보수단체인 인천지구황해도민회가 자유공원에서 집회를 개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남북분단의 상처는 2016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갈등과 아픔으로 다가온다.
내리막길 오른편으로 부동산 '가인', '홍예문중화요리', '벼락신당', '금성철학관'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옆 '심폐소생술교육센터 119'는 과거 소방서였던 곳이다. 통신시설이 보편화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홍예문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지점, 카페 '파랑돌' 맞은 편엔 '망루'가 있었다. 망루에 올라서서 보면 인천시내가 훤히 보였다. 소방관들은 교대로 망루에 올라 발화지점을 확인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발견하면 사이렌을 울리며 소방차를 출동시켰던 곳이 지금 심폐소생술교육센터로 바뀐 것이다. 
이 비탈길을 내려가면 삼치에 막걸리를 파는 주막과 대한서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한 세기 전, 일제강점기의 치욕과 설움, 고통이었던 홍예문은 광복 후 환희와 기쁨, 행복의 문이 되었다. 홍예문(虹霓門)은 그렇듯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깔로 한 세기를 관통하며 인천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다. /글 김진국 사진 유재형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