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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지리지

영화감독 임순례

by 김진국기자 2016. 9. 26.

 

 

무네미고개 넘던 산골소녀,

유럽을 넘는 영화감독으로

 

 

소녀의 얼굴이 해바라기 꽃처럼 환하게 피어나 있었다. 새까만 낯빛에 앞머리카락을 짧게 깎아올린 단발머리 소녀였다. 소녀가 논길을 폴짝폴짝 뛸 때마다 단발머리가 가발처럼 들썩거렸다. 짧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이따금씩 발길을 멈추고 깡통 속을 들여다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깡통 안에는 알록달록한 구슬이 가득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은 뒤 배를 쓰다듬듯, 깡통을 어루만지던 소녀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새카만 얼굴에 대비된 소녀의 이가 하얗게 반짝였다.

씩씩거리며 무네미고개를 넘은 소녀가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빨리 집에 가서 언니와 오빠들에게 전리품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달리던 소녀가 몇 발자국 못 가 코가 뾰족한 검정고무신이 벗겨지면서 몸이 앞으로 쏠렸다. 또르르르.

? 내 구슬!”

주머니에서 터져 나온 구슬들이 사방으로 굴러갔다. 소녀가 재빨리 일어나 정신없이 구슬을 줍기 시작했다. 애써 딴 구슬들이 논으로 들어간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훌쩍 커져버린 벼의 키 때문에 구슬을 찾기도 힘들뿐더러, 논 안엔 소녀가 가장 싫어하는 거머리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쪼그리고 앉아 정신없이 구슬을 주워담는 소녀의 동그란 등에 늦은 오후의 햇살이 떨어져내렸다. 소녀의 하얀 저고리가 붉은 빛깔로 물들었다. 석양을 머금은 구슬들도 주홍빛으로 반짝였다.

순례야아~, 거기서 뭐 하냐아~, 빨리 와라~, 밥 먹자~”

저만치서 막내오빠가 손나팔을 만들어 소리를 지르며 빨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소녀가 집 쪽을 바라보았다. 순례의 집을 비롯해 듬성듬성 있는 슬레이트 지붕 위 여기저기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밥 짓는 연기였다.

오빠야~! 내가 또 구슬 다 땄다~”

흩어진 꿈들을 하나둘 주워 모으듯, 구슬을 다 주운 순례가 출렁거리는 깡통을 끌어안고 집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웬만한 남자아이들보다 구슬치기를 잘했어요. 오빠들이 구슬을 몽땅 잃고 들어오면 제가 나가서 다 따오고는 했지요. 어렸을 땐 왜 그렇잖아요, 구슬이나 딱지 많이 따면 배도 안 고프고. 그렇게 딴 구슬을 문방구에 팔아 만화방에 가고, 군것질을 하기도 했어요.”

영화감독 임순례(56)가 기억하는 유년시절은 여느 여자아이들과는 많이 다르다. 또래 계집아이들은 고무줄이나 핀 따먹기, 소꿉장난 같은 놀이를 좋아했지만 임순례는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자치기, 딱지치기, 비석치기와 같은 놀이를 즐겨 했다. 특히 구슬치기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적인재능을 보였다.

지금도 어머니가 구산동 30번지에 살고 계신데요. 제가 가면 동네 어른들이 너 어려서 구슬치기를 정말 잘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슬치기 올림픽 종목이 있었으면 국가대표까지 했을 거라고. 아무튼 남자아이들이 하는 놀이는 다 잘했어요. 놀이를 하지 않을 때는 들로 산으로 메뚜기나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지요.”

임순례가 태어난 인천시 북구(현 부평구) 구산동 30번지는 1960년대 중·후반만 해도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어 얼마 되지 않는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런 농촌이었다. 프랑스 파리 제8대학에 유학했던 기간을 제외하고 임순례는 태어나고 자란 구산동을 34년간 떠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가끔 어머니가 계신 구산동을 찾는다.

구산동이란 동네 자체가 광복 이후 인천으로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어요. 충청도나 전라도에서 인천으로 온 사람들은 보통 인천 중심지로 갔는데 저희 집이 인천에서도 가장 외곽에 자리잡았다는 것은 그만큼 형편이 어려웠다는 얘기지요. 저희 부모님은 충청도 서산에서 올라오셨는데 동네에는 전라도에서 오신 분들이 많았어요.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였고요.”

임 감독의 아버지는 3형제 중 둘째로 어머니, , 동생과 함께 광복 이후 인천으로 올라온다. 부평 미군부대 노무자였던 그의 부친은 첫 딸에 이어 아들 셋을 내리 낳은 뒤 다섯째이자 막내딸인 임순례를 보게 된다.

임씨 집성촌이라고 할 만큼 사촌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큰집이 8남매고 저희가 5남매, 작은집이 3남매였으니까요. 겨울에 머리감다가 따뜻한 물 떨어지면 작은집에 가서 머리 헹구고, 뭐 그럴 정도였지요. 동네에서 주로 놀았고 이따금 장수동 쪽인 무네미고개로 가기도 했어요.”

지금은 지상 8차선 대로 위로 골리앗 같은 외곽순환도로가 지나고 있지만 당시 무네미고개는 한 켠으로 개울이 흐르는 신작로 같은 길이었다. 무네미고개는 지금의 일신동 33사단과 남동구 장수동 무너미마을의 경계선 고개를 가리킨다. ‘무너미라고도 하는 무네미고개는 물넘이고개가 시간이 흐르며 변한 지명이다. 조선조 중종 때 권신 김안로는 경인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지금의 육군 33사단에서 장수동을 잇는 고개를 뚫는다. 그러나 땅 속의 암반 때문에 운하건설은 실패한다. 이후 이 고개마루터 남쪽에 마을이 생겼고 사람들은 이 곳을 무너미마을’(수월리)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서울-인천 간 국도였지만 무네미고개는 한산한 시골길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군용지가 됐던 이곳은 광복 뒤 지금까지 육군 33사단이 자리 잡고 있다. 무네미고개는 지금 서울외곽순환도로와 경수산업도로를 연결하는 8차선 무네미로로 바뀌어 사람들 대신 차량들이 질주하는 중이다.

구산동과 무네미고개 인근에서 뛰어놀던 산골소녀 순례는 1968년 부개국민학교(현 부개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때는 일신동에 국민학교가 없고 가장 가까운 곳이 부개국민학교였어요. 아이들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걸어다닌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몸이 굉장히 비실비실했어요.”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몸이 약해진 순례는 지나치게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내성적 소녀로 변한다. 남 앞에 설 때는 심장박동이 멎을 것 같았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말하는 것이 두려워 꾹꾹 참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2학년 때 숙제를 많이 내주는 선생님을 만나며 순례는 더 말이 없는 성격의 소유자가 돼간다.

지금 생각하면 좀 이상한 분이셨어요.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에게 구구단을 100번 써오라고 하거나 공책 처음부터 끝까지 받아쓰기를 해오라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제가 울면서 숙제를 하다 지쳐 잠들면 오빠들과 언니가 숙제를 대신 해주곤 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숙제 트라우마는 이후 그가 고등학교 때까지 단 한 번도 숙제를 해가지 않는 학생으로 만들어버린다.

“2학년 때까지는 어떻게든 숙제를 해갔어요. 그런데 3학년이 되면서 성격이 유한 선생님을 만나게 됐고 그때부터는 죽어도 숙제를 하기가 싫은 거예요. 숙제 안 해가서 손바닥도 많이 맞았는데 아무튼 이상한 반항심이 생겨서 절대 숙제를 하지 않았어요. 차라리 몇 대 맞는 편이 나았어요.”

조회시간에 선생님들로부터 육성회비 납부독촉을 받는 것 또한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조회시간에 아이들을 세워놓고 선생님이 육성회비 안 낸 사람 남고, 이번 주까지 낼 사람 들어가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제가 언제 낼 지 알 수 있나요?”

순례의 아버지는 당시 백마장 미군부대 애스컴에 근무하는 군속이었다. 당시 미군부대엔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미제가 넘쳐났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빼돌려 생계에 보탬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워낙 고지식했던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노무자로 처자식을 고생시켰다.

아버지가 아주 드물게 가져오는 것이 꼭 두 가지 있었어요. 하나는 지우개 달린 노란 연필이고, 다른 하나는 분유덩어리였어요.”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 중간쯤에 있는 고아원 아이들을 마주쳐야 하는 것 또한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분식장려운동이 일면서 학교에서 급식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저처럼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줬어요. 저는 그렇게 받은 빵을 먹지 않고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먹으려고 가방에 싸왔거든요. 그런데 집과 학교 중간쯤에 고아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가방을 샅샅이 뒤져 빵을 빼앗아가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빵을 빼앗기지 않고 집까지 무사히 가져올 수 있을까, 그게 최대 고민거리였던 것 같아요.”

개울의 물고기, 과일 향과 너른 전답만이 등하굣길의 풍경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가 말하는 고아원은 전쟁고아들을 위해 세워졌던 성심동원이다. 1951년 인천시 북구 부평동 430번지에 설립된 성심동원은 전쟁고아들을 돌보던 곳이다. 이후 전쟁고아는 물론이고, 가난한 집 아이들을 해외입양 보내는 일을 하기도 했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온 아이들에게 자장면 한 그릇은 최후의 만찬이었다. 더 먹으라며 자신의 자장면 한 젓가락을 덜어주는 그릇 위로 아이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통과의례를 치르고 나면 아이는 성심동원으로 들어갔다. 부모를 기다리다 지친 아이들은 자가용을 타고 오는 부잣집 아저씨 아주머니나 미국사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런 고아원 아이들에게 부잣집 아이는 물론이고, 빈부를 떠나 부모 슬하에서 사는 아이들은 증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버림받은 아이들은 거칠고 사나웠다. 그게 생존방식이었다. 초등학교 내내 순례를 괴롭힌 성심동원은 1979년 지적장애인 교육기관인 성심학교로 바뀌며 경기도 오산시로 이전한다.

당시 등하굣길은 논길이었는데 폭우가 쏟아지면 개울물이 불어나 가방이나 신발이 떠내려가는 것은 예사였다. 윗마을의 살림살이나 돼지가 떠내려오기도 했다.

일신동에 있던 동보전기와 구산동에 있던 신성기업은 아이들의 색다른 놀이터였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치러야 하는 물난리 때문에 고생했고, 겨울엔 또 굉장히 추웠어요. 당시 일신동에 큰 형광등 공장이 있었어요. 공장 밖에는 형광등이 많았는데 말하자면 불량품이었던 셈이지요. 학교 가는 길에 불량 형광등을 주워 장난감 삼아 놀았구요. 그 공장에 기숙사에서 나온 타다 남은 연탄재에 조약돌을 구워 손난로처럼 품 속에 넣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아세틸렌을 생산하던 신성기업에선 광택약과 타일을 생산했다. 남자 아이들은 아세틸렌 광택약으로 아무 물건에나 광을 내거나 타일을 주워 쌈치기같은 놀이를 즐겼다.

 

발랄했던 북인천여중 시절

 

1973년 북인천여중에 입학한 임순례는 초등학교 때와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변모한다.

오락부장을 할 정도로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어요. 아이들을 잘 웃겼거든요.”

새카맣고 깡말라 베트콩이란 별명을 가졌던 임순례는 조숙해지면서 발랄한 소녀로 성장한다.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다보니 여기저기서 초대를 받았고 그렇게 중학교 시절엔 산곡동으로 갈산동으로 친구 집에 놀러다니기를 좋아했다.

산곡동엔 아버지가 근무하는 미군부대가 있었고, 인근에 형태가 비슷한 주택들이 모여 있었으니 다름 아닌 영단주택이다. 영단주택은 말하자면 지금의 한국토지주택공사와 같은 곳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병참기지화 하기 위해 1930년대 이후 주택보급을 위해 만든 공기업이 조선영단주택이었다. 19416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한 조선총독부는 주택건설 4개년 계획을 세우고 1945년까지 전국에 12000호의 주택을 지었다. 집 모양은 갑(20), (15), (10), (8), (6)의 형태로 나눴으며 경제적 상황에 맞게 선택하도록 했다. 이러다 보니 규모가 큰 갑형과 을형은 일본인 관리나 직원들을 위한 단독주택으로 쓰였고 병형 이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사용하도록 했다. 한국에 사는 일본인들에게 살 집을 내어주고, 한국인 노무자들의 생산력 확대를 위한 사택 제공이 목적이었다. 숭의동이나 용현동과는 달리 산곡동의 영단주택이 소형(6~8) 평수로 지어진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산곡동 영단주택의 첫 입주자들은 일본 육군 조병창 용역 근로자들이었다. 광복 이후 새로운 용도로의 활용과 집 구입을 위한 증축·개축이 이뤄지면서 미군기지에 근무하는 한국인 군속과 양공주들이 영단주택으로 들어왔고, 1960년대 이후엔 부평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1096호의 주택을 지었던 산곡동 영단주택은 현재까지 80퍼센트가 원형 그대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많은 집들이 빈집으로 방치돼 있는 상태로 부평역사박물관은 현재 영단주택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진행 중이다.

부평시장에도 이따금 갔었는데요. 부평시장은 사실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어요. 가족 모두가 시장 안에 있는 부평2동 성당엘 다녔거든요.”

당시 부평시장의 풍경은 한마디로 온갖 사람들이 모여드는 인간시장그 자체였다. 시장엔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시장통 상인들의 목소리와 흥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언제나 시끄러웠다. 허리엔 칼을 차고 등 뒤엔 커다란 망태기를 맨 넝마주이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시장을 활보했으며, 몸을 이리저리 꼬며 아코디언을 부는 거리의 악사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부평지역에 처음 공설시장이 생긴 것은 1960년대 초반이다. 전통시장의 존재 유무와는 상관없이 군부대 덕택에 상가들은 이미 호황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시장의 필요성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1962년 북구 부평동에 부평시장이 생겨 일용품 소매시장의 기능을 담당하며 번창했다. 그러나 당시 시장은 정식 건물이 아닌 나무판자로 칸을 만든 형태의 임시시장의 모습인데다 포화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곳 상인들은 1970년 초 현재의 부평전통시장으로 강제 이주당한다. 19715월 이들이 떠난 자리엔 부평자유시장이란 이름의 새로운 시장이 들어서고, 8월엔 부평동 252번지에 부평진흥자유시장까지 설립된다. 1978년 부평백화점과 대도백화점, 1979년 부평종합상가와 부평로지하상가가 조성되는 등 1970년대 부평의 상업은 눈부시게 번창한다.

 

인일여고 진학한 뒤 3학년 때 자퇴, 2년 간 책보며 지내

 

 

술을 많이 드실 때면 아버지는 가끔 외박을 했다. 그럴 때면 순례는 도시락을 갖다드리고는 했다.

아버지가 근무하는 부대가 백마장에 있었는데요. 미군부대 담벼락에 가시철망이 크고 둥글게 말려 있던 게 기억나네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부평에 주둔한 미육군병참본부인 애스컴ASCOM(Army Support Command Korea)은 지역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부평 주민들은 하역이나 차량 정비에서부터 취사, 세탁, 이발 등 서비스업은 물론 일반 노무자 경비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직종에 근무했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범죄와 환경오염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등 부작용도 있었다. 하지만 부평미군부대는 1960년대 부평공단이 들어서기까지 부평의 경제와 지역주민의 생계에 일정부분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1970년대 초중반 애스컴이 경북 왜관으로 이전하면서 순례의 아버지는 직장을 접고 1976년 중학생 순례는 인일여고로 진학한다.

저희 바로 위 학년부터 뺑뺑이로 바뀌어 제가 뺑뺑이 2년차였지요. 아시겠지만 인천에서는 인일여고가 제일 명문이잖아요. 그래서 학교를 가보니까 3학년 선배들이 1,2학년들에게 후배 대접을 안 해주는 거예요. 자신들은 시험 봐서 들어온 사람들인데 저희는 그렇지 않다는 거였지요. 그래도 선생님들은 좋은 분들을 만났지요. 오히려 1,2학년 학생들이 선생님들 수업을 못 따라갔지요.”

숙제는 안 해갔지만 수업시간만큼은 집중했던 순례의 성적은 중학교 때까지 전교에서도 상위권이었다. 그런데 명문고에 진학하면서 성적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숙제도 안 했고 과외도 안 한 순례가 명문고에서 상위권에 들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일여고는 당시 한 학년을 10개 반으로 나눠 6개 반은 대학진학반, 4개 반은 취업반으로 구분해 수업을 진행했다. 600명 가운데 360등 안에 들어가야 진학 반에 갈 수 있었으나 순례는 그렇지 못해 취업반에 편입된다.

결국 성적이 안 좋아 취업반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2학년 2학기 때 미용, 타자 이런 걸 가르치는 거예요. 정말 적성에 안 맞았죠.”

담임 선생에게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한 뒤 겨우 대학 진학반으로 옮겼으나 순례의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진학반 또한 우반 열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순례는 열반에 속한 상태였다.

선생님께 큰소리친 것만큼 성적이 향상되지 않았어요. 열반에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도 상하고, 대학 진학에 대한 압박도 심해졌지요. 게다가 구산동에서 제물포까지 소신여객이라는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매일 지각을 하는 겁니다. 그때 선생님께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너 그래서 대학 가겠냐였어요.”

그렇게 3학년 첫 학기 월말고사 결과가 과거시험 결과처럼 으로 학교 한 켠에 붙여졌다. 임순례의 성적은 360명 가운데 353등으로 적혀 있었다. ‘하고 충격을 받은 순례는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의 만류가 있었던 건 물론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 이후 단 한 차례도 숙제를 안 해갈 정도로 고집 세고 반항심이 강한 순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인일여고 3학년이던 19783월 순례는 자퇴를 하고 방콕생활을 시작한다. 당시는 자퇴가 굉장히 드문 일이었을 때이다.

지금 살은 그때부터 찌기 시작한 겁니다. 제 딴엔 수업과 제 실력 간 격차가 있어 제 수준에 맞게 공부를 하려고 했던 거지요. 그런데 공부는커녕 누구도 뭐라는 사람이 없으니까 너무 놀기가 좋은 거예요.”

자퇴 후 순례는 교과서나 참고서 대신 소설책을 뒤적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때까지도 순례에겐 영화감독에 대한 꿈은커녕 그 어떤 것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저 평범하게 적당히 좋은 대학에 가서 적당히 좋은 직장에 입사해 편안하게 살겠다는 게 그의 꿈이라면 꿈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의 무의식 속에 영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싹텄던 때가 있기는 하다.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란 영화를 찍던 정회철 감독에 대한 기억이다.

2 때였으니까 1977년이었어요. 어느 날 영화배우들이 저희 반으로 찾아온 겁니다. 영화를 찍으러 말이죠. 사실 인일여고 교정이 굉장히 아름다워요. 장미가 있고 아치도 있고. 그때 임예진이 여주인공이었는데 마침 저희 반에서 3일간 촬영을 한 거예요. 임예진 씨 자리가 바로 제 뒷자리였는데 저희 반은 3일 동안 내내 공부를 안 하고 영화 촬영만 했어요.”

임순례와 동갑인 임예진은 당시 하이틴영화 최고 스타였다. 쟤는 천사나 선녀가 아닐까? 순례가 본 임예진은 백옥 같은 피부에, 너무 예쁜, 비현실적인 사람이었다. 학생들은 촬영을 쉴 때마다 임예진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물어보며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나 순례는 배우보다는 감독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당시엔 어떤 감독인지 몰랐는데 제가 영화를 하면서 정회철 감독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런데 메가폰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정말 근사해 보이는 겁니다. , 영화감독이 저런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하며 3일 동안 유심히 감독님만 쳐다봤습니다. 그런 정회철 감독님을 다시 만난 건 1990년대 말쯤 스크린쿼터 투쟁할 때였어요. 제가 옛날 얘기를 하니까 굉장히 반가워하시더군요.”

고교 시절 임순례는 미팅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이성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나마 신포시장에 가서 친구들과 주전부리를 하거나 학교 근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낙이라면 낙이었다.

신포시장에 가면 쫄면, 튀김, 우무 등을 사 먹었어요. 우무와 쫄면은 인천에서 나온 음식일 겁니다. 또 미림극장, 중앙극장에 가서 성룡이 주연한 홍콩영화를 많이 봤던 것 같아요. 1 <겨울여자>를 본 기억이 나고요.”

인일여고가 있는 전동엔 인천을 상징하는 몇 가지 아이콘이 있었다. 현재 동인천동사무소와 중구문화원 자리는 당시 인일여고와 라이벌 학교라고 할 수 있는 인천여고였으며 더 이전엔 동전을 주조하던 전환국이 있었다. 신식화폐를 발행한 전환국은 18925월 착공해 12월 준공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건축이었다. 전환국에선 압인기로 大朝鮮(대조선)’이란 글씨를 새긴 5냥짜리 은화를 발행했다. 그런데 청나라 위안스카이가 청나라가 대국이고 조선은 소국이라고 문제를 제기해 한동안 대()자를 빼고 조선만 새겨넣은 동전을 찍어내기도 했다. 이후 용산에 전환국이 설립되고 1899년 경인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전환국 기계들은 서울로 이동한다. 전환국이 서울로 옮겨가자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이곳에 주둔했으며 철도청 전신인 철도감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자리에 인천여고가 들어선 때는 1907년이다. 이때 인천여고의 전신인 인천여자실과학교 분교가 세워졌는데 나중에 인천고등여학교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 학교에서 교육한 것은 고등보통교육과 기예였다. ‘실과라는 이름에 맞게 재봉틀 기술을 익히는 가사실업교육이 이뤄졌다. 학생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며 한국인은 한 학급에 한두 명에 불과했다. 인천고녀 8회 졸업생 가운데 이옥경은 졸업 뒤 도쿄 일본여자음악학교에서 수학한 뒤 경성방송국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로 이름을 남긴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 패션디자이너인 노라노가 그의 친딸로 알려져 있다.

인일여고 정문 앞 아우구스또 수도회는 해군인천병원이 있던 자리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조선해안경비대에서 독립, 창설한 해군은 1952111일 해군본부 직속 해군병원을 이 자리에 설립한 뒤 포항으로 이전하는 1964년까지 의료 활동을 펼쳤다. 인일여고 옆 은행 직원 합숙소는 일제강점기 인천조선은행 은행장 사택이었던 곳이다. 배다리 헌책방 역시 본래는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아래 공구상가에 자리했었다. 그러나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공구상회가 하나둘 들어섰고, 헌책방들은 지금의 창영동 쪽으로 이동했다.

고교 시절의 추억과 아픔이 새겨진 전동, 송월동, 신포동을 떠나 임순례는 구산동에 머물며 자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 시간이 해방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갑자기 집에서 자유시간이 주어지니까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는 거예요. 제가 워낙 문학작품을 좋아해 학교에서 교과서 사이에 소설책을 끼워놓고 읽다가 선생님한테 걸려 매도 맞고 했거든요. 그 좋아하는 문학작품을 아무 간섭 없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되니까 교과서가 손에 잡히지 않더라고요. 그렇게 루즈하게(긴장이 풀어진 상태로) 2년을 논 거예요. 그때부터 살이 엄청 찌기 시작한 거죠.”

특별한 꿈이 없었고,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던 순례는 놀고 먹고 책 읽는 것에 중독된 나날을 보낸다. 고향 집에서 책을 읽으며 낄낄거리던 어느 여름 날, 순례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소리에 깜짝 놀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것은 북소리가 아니라 소나기가 대지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왜 그것이 순례에게는 심장을 뛰게 하는 북소리처럼 들렸을까.

창밖으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그렇게 클 수가 없는 겁니다. 어쩌면 무위도식하면서 내재했던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죠. 사람들은 자신이 양심에 꺼리는 일을 하면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법이잖아요.”

순례는 그 비를 보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순례야, 이게 네가 원했던 거니? 네가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래, 고등학교 중퇴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니?’

아니었다. 순례는 소설책을 집어던지고 다시 참고서와 교과서를 잡았다. 동네에서 가까운 독서실에 터를 잡고 영어와 수학은 서울역에 있는 대일학원 단과반에 다니면서 공부했다. 그렇게 1980년에 검정고시에 패스한 순례는 남들보다 2년 늦게 한양대학교 영문학과 81학번으로 입학한다.

 

한양대 영문과 다니며 접한 프랑스 영화의 충격

 

영문과에 진학한 이유는 취직이 잘 되는 과였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었고 졸업해 안정된 직장에 다니며 내가 좋아하는 책이나 읽자 하며 영문과로 갔어요. 그런데 1981년도는 전두환 독재시대라 학교에서 거의 매일 데모를 하던 시대였지요. 1980년대 학번들이 다 겪었듯이 저 역시 매일 매캐한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학교를 다녀야 했지요.”

임순례는 그러나 운동권 학생은 아니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다.

정상코스로 79학번으로 들어갔다면 데모를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남들보다 늦게 입학하다 보니 나이가 좀 있어 어울리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과 분위기도 한몫 했어요. 인문대에서도 철학과나 독문과 같은 경우 데모를 많이 하는데 영문과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했거든요.”

운동 방식에 대한 회의 역시 임순례가 운동권에 뛰어들지 않은 이유로 작용했다.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게 돌멩이나 화염병 던지는 것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열심히 던지며 내려가다 보면 밑에서 전경들이 최루탄 쏘며 올라오고, 쭉 내려갔다 쭉 올라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저는 운동의 효율성을 생각했어요.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때 생각으로는 저렇게 해서 독재타도를 할 수 있을까 회의를 가졌던 거죠. 세월이 흘러서 저는 영화를 한 이후 사회적 발언들을 좀 하는 편인데 그때 운동권이던 학생들 중에 사회 나와서 더 보수적이 되고 그런 경우도 많이 봤어요.”

그렇지만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마다 임순례는 사회에 나간다면, 사회에서 당신들 몫까지 하겠노라고 다짐하며 공부에 전념했다. 그렇게 운동권에 대한 미안함과 고등학교를 자퇴했다는 반작용으로 임순례는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런 임순례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비로소 자신만의 꿈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만난 건 1983년 대학교 3학년 때다.

저희 과 동기 중 하나가 CC였는데, 어느 날 저에게 어제 프랑스문화원에 가서 영화를 봤는데 너무 좋더라는 거예요. 그래, 그런 게 있었어? 하며 호기심이 가더라고요. 그때까지는 홍콩영화, 하이틴영화, 상업영화만 봤지 프랑스 예술영화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강력한 호기심으로 프랑스문화원을 찾은 임순례는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처음 본 영화는 장 들라누아Jean Delannoy 감독의 <전원교향곡Pastoral Symphony>(1946)이라는 고전영화였다. 앙드레 지드의 초기 대표작을 영화로 만든 것으로 시각장애인이었던 소녀가 자라서 시력을 회복한 뒤 자신을 길러준 양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단순한 오락성을 넘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프랑스 예술영화를 보며 임순례는 저거야말로 진정한 내 스타일이야라고 마음을 굳히게 된다.

문학작품을 읽고 반추하듯, 사람과 인생, 삶에 대해서 곱씹게 해주더라고요. 영화가 사람들에게 이런 것까지 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일엔 공부를 하고 주말이면 프랑스문화원을 찾은 임순례는 2시간 간격으로 하루 4편의 영화를 섭렵한다. 점심은 자장면으로 때우며 프랑스 예술영화에 열광해 1년 반을 살게 된 임순례. 그는 마침내 문화원이 소장하고 있던 모든 영화를 보게 된다.

그런 생활을 1년 반 정도 이어가자 예전에 했던 영화를 다시 틀어주더군요.”

4학년 1학기가 끝나고 노란 은행잎들이 금관의 장식처럼 흘날리던 어느 날, 임순례는 배낭을 메고 치악산으로 향한다. 1년 반 동안 축적된 영화에 대한 잔상을 안고서.

졸업을 앞둔 저는 학점이 정말 좋았어요. 학점이 좋으면 삼성 같은 대기업에 추천을 받아 입사할 수 있었거든요. 교수님들은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하셨고, 제 마음속에선 어서 영화 현장으로 달려가라는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죠.”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치악산 민박집에 머물며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임순례는 마침내 영화를 하기로 결심한다.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많은 모험을 해야 하는 길이었다. 지금처럼 한국 영화가 활성화된 시기가 아니었고 더군다나 여자 감독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 여자 감독님은 이미례 감독님 한 분 계셨어요. 현실적으로 영화는 제일 가기 어려운 길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물론 지금은 정말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지만요.”

영화인이 되기로 결심한 임순례는 85학번으로 한양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한다. 임순례는 또다시 영화를 하긴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란 문제에 봉착한다.

충무로 어느 감독님 밑에 들어가서 도제로 조감독을 하느냐, 아니면 이론을 공부하느냐 고민을 했어요. 그때 이장호, 배창호, 임권택 감독님들이 계셨는데요. 영화를 모르는 상태에서 도제로 들어가면 10년 이상 옮기지도 못하고 수발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한 겁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영화대학원은 학문적 정립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다.

커리큘럼에 실망을 정말 많이 했어요. 제가 대학원에 진학한 이유는 학교에 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장에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었는데 현장을 알 수 있는 과목이 없는 거예요. 이를테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라는 영화를 책에서 배우는데 그걸 분석하는 과목이 있었어요. 그런데 평생 보도 듣도 못한 영화를 책만 보고 분석한다는 게 말이 안 되더라고요. 대부분의 과목이 그런 식이었어요.”

현장을 알기 위해 진학한 대학원에서는 영화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지 못했다. 파리로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살아 숨 쉬는 영화학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었다.

제가 프랑스 영화를 많이 보았고, 프랑스에서 영화가 나오기도 했고, 결국 프랑스로 가게 됐지요.”

1988년 프랑스 제8대학에 입학한 임순례는 영화학 방법론과 함께 심리학, 철학, 미학과 같은 영화연출에 필요한 과목을 정신없이 섭취한다. 그러나 유학 전 대학원 지도교수와의 마찰로 수료 상태였으므로 임순례는 학사부터 다시 공부해야 했다.

프랑스에 가보니 애큐밸런스라는 학력인정 동등제도가 있었어요. 프랑스 학생들은 12과목만 들으면 리쌍스(학사과정)를 마칠 수 있는데 저는 옵션으로 5과목을 더 들어서 17과목으로 졸업할 수 있었어요.”

학사에 이어 프랑스 제8대학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치는 동안 임순례는 한국에서처럼 영화만 보러 다녔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파리서 생활하며 1천여 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학교 수업과 영화상영이 겹칠 경우 저는 그냥 영화관으로 갔어요. 파리엔 영화관이 굉장히 많았어요. 프랑스 영화를 보러 갔지만 일본 영화도 많이 보고, 중국의 제5세대 감독 첸 카이거 같은 영화, 남미와 동구권 영화도 많이 봤어요.”

프랑스 국립대학은 학비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므로 숙식만 잘 해결하면 됐다. 프랑스 유학 때 뒷바라지를 해준 사람은 큰오빠다. 큰오빠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도서관이나 강의실보다 영화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그였지만 좥미조구치 겐지에 관한 연구좦로 석사학위를 받는다.

프랑스 가서 일본 영화들도 많이 봤는데 오즈 야스지로 논문은 많은 반면 미조구치 겐지는 상대적으로 적더라고요.”

 

조연출 1년 만에 단편 <우중산책>으로 독립

 

1992년 귀국한 임순례는 다시 구산동 본가로 들어가 생활하며 이듬해인 1993년 여균동 감독의 영화 <세상 밖으로> 조연출로 영화계에 첫 발을 내딛는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라 영화를 좀 쉽게 만들지만 그때만 해도 전부 필름으로 만드는 시대였어요. 제작비가 많이 들어 단편영화 한 편 만들기조차 쉽지 않았어요.”

제작비도 제작비이지만 영화를 보고 읽는 것만 했지 실제 현장 경험이 전혀 없던 임순례는 영화제작 실습을 위해 충무로에 뛰어든다. 조연출 1년 만인 1994년 독립한 임순례는 <우중산책>이라는 단편영화로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대상 및 젊은비평가상을 받으며 감독타이틀을 얻게 된다. 변두리의 3류 영화관에서 표를 파는 노처녀의 공허함과 나른함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영화였다. 이어 1996년엔 영화 <세 친구>를 통해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을 수상한다. 아시아평론가들이 주는 상이었다.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1996년도는 김기덕, 홍상수 같은 감독들이 막 등장하던 시기예요. 이전까지는 충무로에서 도제식으로 영화를 배웠다면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신예들이 대거 데뷔한 때이지요. 그전까지는 충무로에서 전통적으로 만들어오던 영화만 있었다면 이때부터는 유학파 스타일이 등장하며 한국 영화가 더 다양해지기 시작한 거죠.”

<세 친구> 다음에 만든 영화가 <와이키키 브라더스>(2002). 38회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수상한 <와이키키 브라더스> 역시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를 널리 알리게 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관객들이 시작한 와라나고운동을 부르기도 했다. 와라나고는 2000년대 초반 개봉한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그리고 <고양이를 부탁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작품성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상영관들이 관객 부족을 이유로 조기 종영하자 관객들이 나서서 팔을 걷어부쳤다. 관객들은 이 작품들을 보고 싶다는 캠페인을 펼쳤고 제목 첫 글자를 딴 와라나고 운동을 펼쳐나갔다. 관객들의 성원에 힘입어 이들 영화들은 각각 재개봉되거나 연장상영 방식으로 관객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네 작품이 한 자리에서 상영되는 이벤트가 열렸으며 상영극장 임대 등의 방식으로 영화 살리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세 친구><와이키키 브라더스> 사이엔 5년의 공백이 있다. 이 기간 동안 임 감독은 무엇을 했을까.

“<세 친구> 끝나고 지방에 내려갔다가 가야대학교에서 3학기 정도 있었어요.”

임 감독은 <세 친구>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자 상업적인 영화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정작 만들고 싶은 영화는 상업영화와 약간 어긋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 감독이 추구하는 지점과 상업성이 어느 정도 타협한 영화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이다.

그 안에 한 작품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캐스팅과 펀딩이 안 돼 진전되지 못한 부분이 있었어요. 제가 부지런하게 움직이지 않은 부분도 있고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가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 경기를 본 뒤 임 감독에게 제의를 하며 만들어진 영화다.

이후 <남쪽으로 튀어>, <날아라 펭귄> 등의 작품을 만들어온 임 감독은 오는 10<제보자> 개봉을 앞두고 한창 마무리 작업 중이다.

황우석 박사 사건, 실화에 기반한 상업영화이죠. 진실을 지키려는 언론인의 자세, 진실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를 메시지로 전하는 영화입니다. <우생순> , <세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같은 영화만 봐도 제가 마이너 정서를 갖고 있는 게 보이실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중과 만나는 지점이 적어지고 그럼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없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겠지요. <제보자> 역시 제 스타일은 아니지만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 제작한 영화입니다.”

임 감독은 제작자로부터 연출 의뢰가 온다면 어떤 영화라도 마다할 생각이 없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가능한 자신의 것을 많이 녹이려고 애쓴다. 자신의 스타일과 상업영화의 간극을 좁히는 방안이 그가 가장 고민하는 지점이다.

지금 양평에 살고 있는 임 감독은 이따금 구산동의 고향 집을 찾는다. 오빠와 어머니가 살고 있고 몇 가구가 모여 계모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던 구산동에는 지금 주유소와 대형 상업 시설, 아파트가 들어섰다.

농촌에 살면서 일용직으로 일했던 노동자들과 같은 도시빈민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싸웠던 고향이 어린 시절엔 정말 싫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지지고 볶으며 살던 마을의 풍경이 지금은 따뜻하게 다가온다. 그래, 그 마을엔 사람냄새 나는 끈끈한 무엇이 있었다.

제 영화에서 가난하고 못 배우고 평범한 사람에 대한 애정의 시선이 보이는 작품이 있다면 아마도 제가 어려서 자란 동네일 겁니다. 지금은 대로 위로 외곽도로 지나가고 하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아직 농촌풍경의 고향이 살고 있거든요.”

고향 인천과 인천 사람들에 대해 그는 서울과 인접해 있지만 인천 사람들은 독립적인 정치적 프라이드와 반골 기질이 있는 스타일이 강하다그런데 지금은 그 기질이 희석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공간 역시 너무 많이 파괴하지 말고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보존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임 감독은 카라라는 동물보호단체 대표 일을 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 일에 버금가게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동물 보호하는 일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굉장히 좋아해서 동네 개들 수십 마리가 저를 따라다녔어요. 학교에서 돌아오는 논길로 수십 마리의 개들이 떼지어 달려가면 어머니께서 아, 우리 딸 오는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죠.”

복날이 되면 동네 어른들이 개를 나무에 거꾸로 매단 뒤 사정없이 후려패고 검게 그을려 잡아먹는 모습이 지금까지 트라우마로 남은 것도 동물보호단체 대표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미혼인 임 감독은 결혼계획을 묻자 그럴 나이는 지났다며 수줍에 웃었다.

어쩌면 제가 어렸을 때 주변에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잘 못 봐서 그럴 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물어보면 제가 5,6살 때부터 커서 결혼 안 한다고 그랬대요.(웃음) 영화 일이라는 자체가 지방도 많이 가야 하고 가정적인 직업이 아니고요. 죽어도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예순 넘어서 할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은 희박할 것 같아요.”

2014년 여름, 중장년으로 접어든 순례가 고향 땅을 밟는다. 가족, 사촌들과 복닥거리며 자랐던 작은 마당은 그대로다. 그런데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던 맑은 시냇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순례의 얼굴까지 껑충껑충 뛰어오르던 개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임순례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폐부 깊숙이 고향의 향기를 들이마시는 그의 표정에서 산골소녀의 작은 얼굴이 되살아난다.

 

 

金眞國. 인천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