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문화지리지

김구라 "방송 분야서 인천 널리 알리고파"

by 김진국기자 2016. 9. 18.

 

 

 

김구라(본명 김현동, 47)가 녹화 중인 CJ E&M스튜디오에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비를 시샘하는 걸까. 바람이 불 때마다 연분홍빛 벚꽃 잎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나풀나풀 땅에 떨어진 꽃잎들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약속시간이 5분쯤 지났을 때, 김구라 매니저가 스튜디오 안에서 걸어나왔다.

녹화가 덜 끝난 것 같아요. 녹화라는 게 끝나는 시간이 일정치 않거든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얼굴에 와 닿는 훈훈한 바람과 봄의 전령사 벚꽃잎들의 군무. 봄비 때문에 하늘이 흐렸지만, 봄은 또 그렇게 우리 곁에 다가와 있었다.

녹화 끝났습니다. 들어오세요!”

스튜디오 마당 벤치에 앉아 게으른 봄을 즐기고 있는 기자를 향해 매니저가 소리쳤다.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일어섰다. 흩어졌던 상념들도 하나둘 주워 모아 분장실로 향했다. 잠시 뒤 프로농구선수 만큼이나 키가 커 보이는 거구의 남자가 들어왔다. TV나 인터넷에서 늘 봐오던 상대방을 깔 보는 듯한 눈빛. 독설을 퍼붓기로 유명한 개그맨이자 MC인 김구라의 얼굴은 친근했지만 184센티미터나 되는 키는 낯설어 보였다.

, .” “, .”

방송에서 늘 보던 것처럼 김구라의 답변은 류현진의 최고 구속을 뛰어넘는 시속 200킬로미터는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신이 뭘 알고 싶은지 난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질문의 마지막 단어가 끝남과 동시에 답변이 튀어나왔다. 김구라는 그러면서도 정확한 어휘와 발음을 사용하고 있었다. 가히 이 시대 최고의 구라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인천 출신이시고 아버지는 서울 휘경동이 고향이세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선친께서 부평 신진자동차에서 일하셨는데 지금 한국지엠의 전신이지요. 67년인가, 68년부터 근무하셨는데 신진자동차 사원아파트가 갈산동에 있었거든요. 거기서 제가 태어났어요.”

 

초등학교 전반기를 보낸 자동차공장의 메카, 부평의 추억

 

김구라의 선친이 근무한 신진자동차1966년 일본 도요타(豊田) 자동차와 기술제휴로 탄생한 자동차 회사다. 이 회사의 전신은 새나라자동차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평에 새나라자동차가 들어선 건 박정희 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 발표 직후다. 재일교포 박노정 씨가 1962년 설립한 이 회사는 같은 해 8월부터 1.2X급 소형 세단인 닛산 블루버드를 조립, 생산한다. 현대식 공장에서 만든 우리나라 최초 승용차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새나라자동차는 9개월 만에 생산을 멈춘다. 외환사정이 악화되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때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한 업체가 신진자동차였다. 신진자동차는 도요타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코로나라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소형차이면서 차체가 각이 진 코로나는 히터, 라디오, 시가라이터까지 갖추고 있었다. 도요타 부품으로 만든 1.5X4도어 세단 코로나는 당시 승용차의 대명사로 불리며 1972년까지 44,248대를 생산하는 기염을 토한다. 부평역사박물관에 가면 코로나자동차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만날 수 있다.

신진자동차는 동시에 19675크라운을 출시한다. 150킬로미터의 최고시속을 자랑한 크라운은 값이 비싸 1972년까지 3,800여 대만 제작됐다. 도요타 퍼블리카를 조립생산한 때도 1968년이다. 800cc 엔진을 얹은 퍼블리카는 국내에 처음 소개된 4도어 왜건으로 4년간 2,000여 대가 출시됐다. 퍼블리카는 차체가 예뻐 꼬마차, 빨간차, 왕눈이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1970년 도요타가 철수하며 신진자동차는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손을 잡는다. ‘GMK’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신진자동차는 시보레1700’, ‘레코드1900’ 등을 선보였지만, 판매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설상가상으로 기아(1962년 설립)와 현대(1967년 설립)의 도전이 거세지면서 결국 1976년 새한자동차로 이름을 바꾸고 197712월 첫 모델 제미니를 선보인다. 1.5X 엔진과 럭셔리한 외모의 제미니는 그러나 기아의 브리사와 현대 포니의 벽에 가로막혀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한다. 이때 자동차 시장에 뛰어든 회사가 대우다. 대우는 1976년 신진 소유의 한국기계(현 대우중공업)를 인수한 데 이어 1978년 새한자동차까지 인수한 뒤 뉴 레코드란 차를 내놓는다. 뉴 레코드가 인기를 얻으며 마침내 1983년 대우자동차는 첫 흑자를 맛본다. 그해 1월 새한자동차의 이름은 대우자동차로 바뀌었으며 GM으로부터 경영권도 넘겨받는다. 대우자동차는 로얄 살롱로얄 프린스등 로얄 시리즈에 성공하며 첫 흑자를 기록한다.

대우자동차는 1986르망’, 1990년 대우 최초의 고유 모델인 에스페로를 선보이며 부평지역을 우리나라 굴지의 자동차산업의 메카로 만들어나간다. 대우자동차는 199210GM과 완전히 결별하고 이듬해인 1993년 판매부문을 전담하는 대우자동차판매를 별도 법인으로 분리한다. 1996~1998년 라노스 등 독자모델에 성공하며 승승장구하던 대우자동차는 1999826일 이후 대우그룹 산하 12개 계열사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면서 2002년 다시 GM대우란 이름으로 출범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버지 직장이 부평에 있다보니 태어나서부터 10살 때까지 갈산동에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는 부평북초등학교에 다녔어요. 집은 갈산동이고 아버지 회사는 청천동인데 공장들이 많았고 당시 아이들이 놀 만한 것들은 별로 없었어요. 다행히 가까운 곳에 계양산이 있었고, 박촌이라는 시골 같은 곳이 있어서 친구들과 자주 놀러다녔지요.”

김구라가 사는 집과 학교, 그리고 아버지의 회사까지 모두 갈산동 청천동에 걸쳐 있었지만 그는 계양산을 자주 올라갔다. 여름이면 개구리를 잡았고 가을엔 잠자리채를 들고 산을 찾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집 근처에서 놀 수 있는 것들이라야 시소와 미끄럼틀만 달랑 있는 아파트 놀이터뿐이었다. 1965년 부평지역이 인천수출산업공단으로 지정된 이후 부평지역은 새한자동차를 중심으로 하는 자동차부품 회사가 속속 들어섰고, 다른 많은 공장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갈산동에 자석공장이 있었어요. 저희 어렸을 때만해도 지금처럼 놀 만한 게 별로 없었잖아요. 자석 주워서 지남철놀이하고, 공장들 밖에 버려진 플라스틱 제품 같은 거 주워서 놀고 그랬지요.”

김구라는 그렇게 조합이 어려운 부평의 공장지대와 천혜의 자연을 오가며 초등학교 전반기를 보낸다. 그의 어린 시절 무대가 주안, 석바위로 바뀐 때는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때인 1970년대 후반부터다.

 

주안초등학교로 전학하며 방송인의 꿈 키우기 시작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간석동 송림아파트로 이사를 했어요. 집 가까운 곳에 주원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저는 주안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지요. 집에서 학교까지 시청 후문 쪽으로 해서 1시간 정도를 걸어다녔지요. 그러다 보니 놀이터가 석바위, 주안이 된 겁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별반 달라진 게 없는데 중간에 길 대신에 돌산이 하나 있었어요.”

1970년대 후반 주안초등학교에서 김구라의 집이 있는 간석동까지는 석바위사거리에서 경인로를 따라 주원사거리와 간석오거리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그렇지만 석바위사거리에서 시청 후문으로 이어지는 길엔 돌산이 있어 이를 깎아 길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 길을 통학하며 어린 김구라는 자신의 나와바리’(영역)를 석바위, 주안 일대로 확장한다.

석바위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석바위시장에서 떡볶이, 도넛 같은 것도 사먹고 오락실도 자주 갔어요. 그 당시 인베이더라는 오락기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재밌는 영화에 몰입하는 것처럼 한번 앉으면 일어나기가 싫을 정도였지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의 여느 아이들처럼 김구라는 오락실과 군것질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런 김구라가 특별히 좋아하는 취미가 하나 있었으니, 팝송 듣기였다.

이모가 주안에 살았는데 매일 라디오 음악방송을 끼고 살았어요. 밖에서 놀다가 심심하면 이모 집에 들렀는데 갈 때마다 음악방송을 켜놓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함께 듣곤 했는데 방송 하는 디제이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정말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나도 커서 디제이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가 말하는 디제이 아저씨들란 김기덕, 김광한, 황인용, 원종배 같은 아나운서들을 가리킨다. 당시 라디오방송 중에서도 팝송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다. 오후 시간대만 해도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김광한의 팝스다이얼이 경쟁하며 청취자들을 끌어모았다. 김구라가 당시 즐겨 들었던 음악은 스웨덴의 4인조 그룹 아바의 음악에서부터 케니 로저스의 좥레이디Lady,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좥헤이Hey좦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파퓰러송이었다. MBC의 경우 김기덕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위까지 선별해 방송해주곤 했는데 김구라는 좋아하는 음악을 녹음테이프에 녹음했다가 재생해 듣기도 했다.

블론디의 좥콜미Call me, 베트 미들러의 좥로즈The Rose, 포리너의 좥웨이팅 포 어 걸 라이크 유Waiting for a girl like you좦 등등 당대 유행하는 음악은 다 좋아했어요. 특별히 재즈라든지, 헤비메탈 분야만 좋아하거나 그런 편은 아니었어요.”

음악을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김구라는 석바위사거리에 있던 인켈inkel대리점을 자주 들락거리기 시작한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당시 인켈대리점은 3층으로 된 인천에서 가장 큰 오디오 전문상점이었다.

그때 인켈에 가면 무료로 나눠주던 <팝 피엠 투 POP PM2>란 잡지가 늘 놓여 있었어요. MBC라디오에서 발행하는 얇은 팝송전문잡지였는데 팝스타 소식도 있고 빌보드 차트, 인기 팝송 악보도 실린 책이었어요. 저처럼 음악 좋아하던 학생들에겐 최고의 잡지였지요. 그거 받으러 자주 갔었어요. 한때는 많이 모았었지요.”

김구라가 혼자 이모집에 다녔지만 엄마와 함께 나설 때면 언제나 배다리를 향하곤 했다.

배다리 부근에 채미전거리라는 게 있었는데요. 거기서 할머니가 구멍가게를 하고 계셨어요. 할머니 사시는 동네에 가면 거리에 과일이 널려 있었어요. 과일향기가 진동을 했지요. 싱싱한 참외와 수박을 깎아주시면 배가 터지게 먹고 한보따리씩 싸서 집으로 가져오기도 했어요. 지금도 과일가게들이 그렇게 많은지 궁금합니다.”

채미전거리는 동인천역 건너편 중구 용동 앞길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래전 이곳엔 동인천 청과물공판장이 있었는데 참외를 파는 상점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동의 닭전거리, 용동 큰우물거리와 함께 인천의 3대 거리로 꼽히던 채미전거리는 1900년 경인철도가 개통된 후 한국인 거주지역에서 동인천을 오가기 위해 생긴 길이었다. 신태범 박사는 저서 좬인천한세기좭에서 당시 철로 양편은 논과 미나리밭이었는데 많은 남녀 기차 통학생들이 채미전거리를 이용했다. 당시 인천에 근교농촌이던 장의리(현 숭의동), 도화리(현 도화동)와 가장 가까운 시내 요지였으므로 이곳으로 참외를 비롯한 청과물이 모이게 돼 이 길을 사투리로 채미전거리라고 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1910년대까지 인천엔 이렇다 할 과일이 없었다. 근교 농가는 벼와 보리농사를 주로 지었고 채소농사는 청국인들이 맡고 있었던 것이다. 인천에 과일이 생긴 때는 19세기 말 일본인이 소규모로 과수 재배를 시작하면서부터다. 1910년대 인구 증가와 함께 일용물자의 수요가 급증하자 인천 근교에서 참외 재배가 성행했고 멀게는 오류동에서 당도 높은 오릿골채미가 들어오기도 했다.

신태범 박사는 참외바리가 모여들던 곳이 철로변 미나리논에 둘러싸인 기다란 습한 2백 평 가까운 공터였는데 군데군데 1(100)씩 쌓아올린 무더기가 즐비했고 바리에 실은 채 서 있는 황소도 있었다. 거의 모두가 재래종 청채미고 간혹 속이 노란 감채미와 하얀 사과채미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탕채미라고 부르던 일본종 조그만 노란채미(깅막가)와 개구리채미(성환참외)가 선을 보인 것은 1930년대의 일이다. 1920~30년대는 참외를 실은 소가 한번에 10여 마리씩 들락거릴 정도로 채미전은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재래종 참외가 멸종하다시피 하고 1960년대 줄무늬가 있는 노란 일본종 은천이 나오기 시작한다. 신태범 박사가 좬인천한세기좭를 쓴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채미전거리 철로변엔 과일 도매상과 농약 종자상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청과회사 쪽에는 넓은 야채시장과, 고추, 마늘 도매상이 즐비하게 자리하고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998년 인천시가 주차장 건립을 위해 청과물시장 부지를 사들이면서 이 지역 상인들은 동구 송림동 동부시장과 같은 다른 시장으로 터전을 옮긴다. 지금 이곳에선 몇 안 되는 과일가게만이 남아 옛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가고 싶은 곳 찾아 인천 곳곳 누비던 구월중 시절

 

그렇게 팝송과 디제이의 목소리에 푹 빠져 살던 구라는 구월중학교로 진학한다. 5층짜리 주공아파트에 둘러싸여 있던 구월중학교는 당시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창 건설 중인 학교였다.

제가 구월중 3회 졸업생인데요. 체육시간이면 학교건물 짓는 공사에 동원되곤 했어요. 제가 살던 송림아파트 뒤쪽, 그러니까 지금 금호아파트가 들어선 자리는 다 논이었어요. 거기서 개구리 잡아 뒷다리 구워먹었던 기억도 나네요. , 집 근처 희망백화점에 가서 에스컬레이터도 타고 새 학기면 노트와 가방을 사기도 했어요.”

지금은 아울렛으로 바뀌었지만 희망백화점은 인천의 대표적 향토 백화점으로 인천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인천 백화점의 대명사다. 희망백화점은 미도파라는 이름으로 1980년 문을 연다. 1983희망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꾼 뒤 이곳은 인천시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백화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남동구 주민들은 물론, 부평지역의 주민들까지 희망백화점을 찾아 발걸음을 할 정도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희망백화점의 연간 매출신장률은 무려 60퍼센트에 이를 정도였다. 희망백화점은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1992년엔 매출신장률 전국 1위를 기록하며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그런 희망백화점이 빛을 잃기 시작한 때는 1997년 관교동에 인천터미널이 개통되면서부터다. 신세계백화점이 들어서면서 한 차례 타격을 입은 희망백화점은 IMF 경제위기까지 맞으면서 1998년 부도를 내고 만다.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간 희망백화점은 2004올리브아울렛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인천시민들을 만나오고 있다.

그렇게 주안, 석바위, 간석동을 누비던 김구라는 중학교에 입학하며 동선을 인천 전체로 확장한다. 코밑에 솜털이 나기 시작하고 키도 훌쩍 큰데다 제법 성숙해지자 동네를 떠나 여기저기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한번은 친구들과 소래로 놀러갔어요. 지금은 기차가 다니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수인선이 오가고 있었거든요. 그때 친구들과 함께 기차가 안 올 때 철교를 건넜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위험한 짓이었지요. 그런데 인천 아이들은 소래철교 건너는 놀이를 많이 했어요. 그 다리가 보기보다 상당히 무섭거든요. 다리에 오르기 전에는 잘 모르는데 막상 다리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지요. 그러다 보니 다리를 건너면 용감한 녀석이 되는 겁니다. 한번은 소래에 놀러갔다가 버스비까지 다 사먹는 바람에 5시간을 걸어서 집에 왔던 기억도 납니다.”

소래철교는 인천과 수원을 잇는 수인선의 일부로 놓여진 다리다. 수인선은 193786일 완공됐다. 수인선은 그 폭이 경인선의 절반인 76.2센티미터에 불과해 협궤열차, 꼬마열차라 불렸다. 수인선은 인천에 사는 일본인들이 상권을 경기 내륙까지 확대시키기 위해 건설한 것이었다. 꼬마열차는 소래와 남동, 군자에서 생산한 소금을 인천으로 실어날랐다. 또 경기도에서 생산한 쌀을 수송하기 위해 건설됐던 수려선(수원~여주)을 인천항까지 연결해주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수인선은 광복 이후 그 용도가 급격히 줄어든다. 산업구조가 개편되고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쌀 수송 용도로도 쓰이지 않았고 이용객마저 급감하게 된 것이다. 197311월엔 종착역이었던 남인천역을 송도역으로 바꾸면서 운행횟수가 크게 줄어든다. 결국 하루 이용객이 60여 명에 그치고, 3년간 60억 원의 적자를 내던 수인선은 19951231일 운행 584개월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소래철교는 많은 사람들이 건너다니는 다리로 사랑을 받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수인선은 현재 송도-연수-원인재-남동인더스파크-호구포-인천논현-소래포구-월곶-달월(미개통)-오이도노선의 전철로 부활해 운행 중이다.

놀기 좋아하고 먹기 좋아했던 구라는 뒷일을 걱정하기보다 당장 땡기는대로 행동하는 편이었다.

극장에도 자주 갔었어요. 주안에 있는 중앙극장을 많이 갔는데 이따금 경동에 있는 애관극장도 갔었어요.”

이처럼 호기심 많고 놀기 좋아하는 그였지만 반에서 10등 아래로 떨어진 기억은 없다.

매일 놀기만 한 건 아닙니다. 열심히 하진 않았어도 가끔 시청 옆 중앙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어요. 도서관에 간 이유는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는데 팝송을 좋아하다 보니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고, 영어성적이 좋으니까 성적이 그리 많이 떨어지진 않더라고요. 좋은 자리 맡으려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시락 싸들고 도서관 앞에 줄 선 적도 많습니다.”

인천시청 옆 중앙도서관 앞은 현재 병원과 음식점 등 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섰지만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다. 시청 근처에는 배추밭을 비롯해 무논이나 밭이 많았다.

중학교 시절 김구라가 새벽부터 일어나는 때가 있었는데 이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형이나 친구들과 함께 도서관에 갈 때였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우표가 나올 때였다.

너도 나도 우표를 모으던 시절이었어요. 집 근처에 남동우체국이 있었는데 새 우표가 나온다고 하면 새벽부터 가서 줄을 서 우표를 사곤 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쓸 일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열성적이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그때는 이메일과 같은 전자우편이 활성화되지 않았고 지금처럼 휴대폰이 일반화된 시대가 아니었다. 따라서 멀리 있는 사람들 간의 소통은 주로 편지로 이뤄졌다. 편지봉투에 붙이는 우표는 실용성과 보관가치를 동시에 지닌 상품이었다. 여전히 방송인의 꿈을 키우며 중학교를 다닌 김구라는 제물포고에 입학한다.

 

사고 많던 제물포고 2학년 시절

 

개그맨이라 하면 학교 다닐 때 사고 한번쯤은 쳤을 법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김구라는 자신이 비교적 무난한 학생이었다고 강조했다.

학창시절 사고 아닌 사고를 친 적이 한 번 있었어요. 2 때였어요.”

1, 2등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김구라는 고2 때 반장을 맡게 된다. 대학입시를 1년여 앞둔 제물포고에선 하나의 미신 아닌 미신이 떠돌고 있었다. 제고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인일여고를 월담해 여학생들이 쓰는 방석을 가져오면 대학에 합격한다는 미신이었다.

대학은 가야겠고, 한창 때다 보니 여학생에 대한 관심도 있고 해서 친구들과 작전을 짜서 마침내 인일여고 월담을 감행했어요. 그런데 다시 저희 학교 쪽으로 담을 넘어오다 선생님에게 걸린 거죠.”

야 이 XX, 반장이라는 놈이 할 짓이 없어서 여학교 담을 넘어? 그런 정신으로 공부에 파고들면 하버드대학교도 가겄다.”

교사에게 딱 걸린 김구라와 그의 반 친구들은 이때 귓불이 시뻘게지도록 귀싸대기를 맞고 이틀간 정학을 받는다.

자신이 반장으로 있는 반 친구들이 집단적으로 친 사고도 있었다.

제물포고등학교가 무감독 시험을 치는 학교거든요. 그런데 선생님들이 시험감독으로 들어오시지 않다 보니 커닝 방지를 위해 학년을 뒤섞어 시험을 치렀어요. 제가 2학년 4반이었는데, 그럴 경우 1학년 4반과 섞어서 시험을 보는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커닝 같은 것은 안 했는데 반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커닝한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김구라가 반장으로 있는 2학년 4반 학생들 가운데 31번부터 60번까지는 1학년생들 1번부터 30번까지 앞 번호와 섞어서 시험을 치른다. 2학년 사이로 1학년이 끼어서 시험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김구라의 반 친구 하나가 김구라 옆에 앉은 1학년 후배에게 , 현동이거 보고 나한테 답 알려줘라하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한 것이다. 당시 김구라의 반엔 유난히 말썽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커닝도 집단적으로 이뤄지곤 했다. 개그맨 지상렬과 염경환도 김구라와 한 반이었다. 문제는 1학년생들이 반성문에 2학년 형들의 커닝 사실을 폭로하면서 발생했다.

매번 시험이 끝나면 반성문을 쓰거든요. 그런데 1학년 애들이 2학년 4반 형들이 커닝을 좀 한다, 그런 반성문을 제출한 겁니다.”

반장 김구라가 다시 선생님한테 불려갔다. 말은 잘하지만 거짓말은 잘 못하는 김구라는 선생님이 너희 반 아이들이 커닝을 좀 한다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고 김구라는 약간 그런 게 있었습니다라고 이실직고를 한다.

제고는 무감독시험에서 커닝을 하다 발각되면 퇴학처분을 내렸다. 그런데 당시 김구라의 반에서 커닝한 학생의 숫자가 무려 27명에 이르렀다.

그 친구들을 다 퇴학시킬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커닝한 과목 수에 따라 적게는 3일 많게는 1주일씩 근신이나 유기정학 또는 무기정학을 받았어요. 저도 키가 크지만 키가 큰 아이들은 작은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 확률적으로 공부를 잘 못하는 것 같아요.”

그 일이 있은 뒤 김구라는 반장 옷을 벗는다.

고교 시절, 그는 그 흔한 미팅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저는 미팅 같은 것도 안 했어요. 공부에 신경 쓸 때라 공부에 전념했지요. 반 친구들 중에는 여학생 만나려고 교회 다니는 친구도 있긴 했어요. , 인일여고 학생들과 꼭 한 번 미팅을 한 적은 있네요. 그때 답동성당 지하에 카페 같은 게 있었는데 거기서 반 미팅한 기억이 있고요. 거의 학교에서 공부했어요.”

그럼 김구라와 당시 같은 반이었던 지상렬과 염경환은 어땠을까.

솔직히 둘 다 공부 잘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러면서 상렬이는 개그맨 되겠다며 그때부터 끼를 부렸고, 경환이는 비교적 얌전한 편이었어요. 제가 개그맨 된 뒤에 상렬이가 전화를 해왔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개그맨 될 수 있냐고.”

김구라가 공부를 한 이유는 사실 개그맨이 아니라 디제이가 되기 위함이었다. 김구라는 입시 스트레스를 당구로 풀었다고 고백했다.

술담배는 안 했는데요, 신포동에 특실당구장, 오색당구장이라는 곳이 있었어요. 공부하다 스트레스 받으면 거기서 당구를 쳤어요. 지금도 신포동 자주 가는데 지금은 상권이 많이 죽었더라고요. 옛날에는 장난 아니었거든요. 지금 금강제화 있잖아요? 거기를 중심으로 옷가게가 많았는데 서울의 명동 이상으로 사람이 많았어요.”

그렇게 고교시절을 보낸 김구라는 89학번으로 인하대 영문과에 진학해 구체적으로는 디제이, 광범위하게는 방송인의 꿈을 이어간다.

 

인하대 영문과 재학 중 SBS 공채 개그맨 합격

 

“80년대 후반만 해도 대학의 낭만이 살아 있을 때 아니겠어요? 수업 빠지고 괜히 잔디밭에서 막걸리 마시며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하고 그랬던 시절이잖아요. 학교(인하대) 후문에서 당구 많이 쳤어요. 정문 쪽에는 동일레나운 공장만 있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인하대는 후문에 상권이 발달돼 있잖아요.”

2학년까지 대학캠퍼스에 머물던 김구라는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한다. 많은 남학생들이 그렇듯이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기 위해서였다.

휴학한 뒤 1년 정도 놀다가 그해 12월 방위병(공익요원) 판정 받고 용인 쪽으로 입대를 했어요. 근데 제가 동사무소방위였어요. 신기촌 쪽에 보면 예비군훈련부대가 있는데 간석2동대에서 근무를 했지요. 집에서 10, 15분 거리니까 저희 집에서 엄청 가까웠죠. 18개월간 통지서 돌리며 군 생활 마감했죠.”

방위병 소집해제 한 달여를 남겨둔 어느 날,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19934SBS에서 공채개그맨을 뽑는다는 공고가 난 것이다.

제가 라디오 디제이를 하고 싶어 영어를 열심히 했고, 영문과로 진학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서클도 영어연극서클에 가입했었거든요. 막연한 생각으로 연예인이 돼야겠다 생각했는데 음악을 좋아하지만 가수는 말이 안 되고, 그럼 개그맨이 돼 방송계에 진출해야겠다, 나름 머리를 좀 쓴 거죠. 대본 같은 거 쓰는 건 어느 정도 자신 있었거든요.”

김구라는 남들 앞에 나서서 웃기거나 그러진 않았지만 남들 앞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도 않았다. 또 친구들로부터 재밌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데다, 탤런트 시험도 두 번 정도 봤다 떨어지면서 방송국 시험에 대한 노하우도 생긴 터였다. 마침내 SBS 공채 2기에 당당히 합격한 김구라. 그러나 그게 찬란한 출발이 아니라 10년 무명의 시작이 될 줄이야.

그때 저와 함께 들어온 애들이 쟁쟁했어요. 서울예전 나온 홍록기 같은 애들은 춤도 잘 추고 못하는 게 없더라구요. 근데 저는 본격적인 연예인 수업을 받지 않았으니까 어울리지를 못하는 거예요. 녹화 끝나면 인천 와서 친구들과 당구치고 술 먹고 그렇게 지냈어요.”

개그맨 초년생 시절 그가 잘 가던 술집은 신포동의 중림이라는 곳이다. ‘로바다야끼라고 해서 알탕 같은 안주를 파는 곳이었다.

비록 방송국에서 주류는 아니었지만 학교에서는 연예인으로 인정받았다. 선배들 밑에서 꽁트 같은 코너의 단역에 많이 출연했는데 그를 알아본 여학생들이 저 오빠 개그맨이야라며 인정해줄 때면 어깨가 으쓱하곤 했다고.

대학 시절 때부터 개그맨 시절에 이르기까지 즐겨 찾았던 장소는 신포동의 호프집과 대한서림 뒤에 있는 삼치골목이다.

뮌헨, 브로이 같은 호프집이 유명했어요. 소시지 야채볶음 같은 거 시켜놓고 호프 마시고 했지요. 또 신포동에서 홍예문 지나 동인천 쪽으로 넘어가면 삼치골목 있잖아요. 거기서 막걸리도 많이 마셨어요.”

지금도 삼치골목엔 10여 개가 넘는 삼치집이 성업 중이며, 신포동 역시 이름은 바뀌었지만 불칸호프같은 생맥주집이 영업을 하고 있다. 한동안 침체기를 겪던 신포동은 최근 인천 중구 개항장 일대가 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다소 활기를 되찾고 있다. 특히 카페와 화랑, 박물관이 잇따라 개관하면서 인천의 대표적 명소로 부활하는 중이다.

주경야독. 개그맨을 하면서도 그는 1996년 가을 졸업장을 받는다. 그때까지도 간석동 511번지 송림아파트에 살던 김구라는 1997년 결혼과 동시에 김포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다.

간석동에서 장가가기 전까지 살았으니 한 20년 산 셈이네요. 결혼하면서 전세금 4000만 원으로 계산동에 신혼집을 마련했어요. 그런데 제가 돈벌이가 시원치 않다 보니까 아내가 일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아내 직장이 김포에 있었어요. 처가도 김포였거든요. 게다가 결혼하자마자 동현이가 들어서서 입덧도 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출산 전까지 아내를 처가에 맡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주말부부가 됐고 떨어져 살다보니 보고 싶고, 그래서 에이, 전세 빼서 김포로 가야겠다 해서 간 건데 지금까지 살게 된 거죠.”

김포에 살지만 그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반드시 고향 인천을 찾는다.

어머니가 산곡동 우성아파트에 살고 계시고요. 그 동네에 제가 다니는 한의원이 있거든요. 인천 오면 어머니댁 들르고 한의원 가서 건강 체크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 술 한잔 하지요. 제가 처음 분양받은 아파트가 청라지구에 있어서 언젠가는 이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염경환 씨도 얼마 전에 청라로 들어갔어요.”

김구라는 얼마 전에도 미국 사는 친구가 찾아와 염경환 씨와 셋이 신포동 진흥각에서 탕수육을 곁들여 소주를 마셨다. 술이건 밥이건 그는 지금도 여전히 고향이 편하다.

 

김구라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

 

김구라와 관련해 인터넷에 떠도는 몇 가지 소문은 사실 잘못된 것이다. 그의 본명이 김현동이고 그의 아들 이름이 동현인 사실을 두고 항간에선 김구라가 1998년 아들을 낳은 뒤 본인과 반대되는 삶을 살기를 바라 동현으로 지었다는 얘기가 알려져 있다. 여기에 덧붙여 김구라의 선친이 김동현이라는 풍문까지 떠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건 아니고요. 항렬이 동자 돌림이라 그렇게 된 겁니다. 김을동 선배님과 같은 항렬이지요. 아버님 존함은 필자 한자를 써서 김필한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대해 김구라는 특별한 목적이나 목표를 두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뭐 특별한 건 없고요. 방송 열심히 하고 제게 주어진 일, 경쟁력 있게 해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고 구라라는 사람 참 재밌는 사람이구나, 맥도 잘 짚고 방송 시원시원하게 잘한다는 그런 얘기만 들으면 행복하겠습니다.”

김구라는 지금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국민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게 꿈이라면 꿈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방송인으로서의 철학은 확고하다고 했다.

방송인이라면 일단은 기본적으로 시대에 뒤쳐져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뭔가 보여줄 수 있을 때 꾸준하게 보여줘야지만 대중들이 인정을 해주시는 것 같아요. 저는 항상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김구라 전성시대라 할 만큼 그는 요즘 여러 방송 프로그램을 종횡무진 누비며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그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없었던 건 아니다.

제가 한 10년 정도 무명으로 있었잖아요. 그 와중에 어려운 일도 있어서 이제 더이상 방송 못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좀 바빠져서 이를 악물고 한 보람이 느껴집니다.”

1993SBS 개그맨 공채 2기로 당당히 합격한 그이지만 동기들과는 달리 오랜 무명세월을 거치며 1999년엔 생활보호대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너무 잘 나가서 행복한 피곤함을 느끼고 있다.

어제도 밤 12시 넘어서 집에 들어갔어요. 요즘 육체적으로 피곤하기는 해도 사실 행복합니다. 집에 못 들어갈 정도는 아니고요. 잠도 7시간 이상씩 자는 편이지요. 대신 녹화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갑니다. 다음 날 방송 없는 날은 간단하게 술 한 잔 먹기도 하지만요.”

지금은 처가가 있는 김포에 살지만 그는 언제가 청라에 마련한 아파트로 이사 올 생각이다. 음악방송 디제이가 되진 못했지만 개그맨으로 데뷔하여 MC로 활약하고 있으므로 그는 어릴적 꿈을 어느 정도 이룬 셈이다. 그 꿈을 이루게 해준 곳이 자신이 나고 자란 땅 인천이라고 그는 늘 생각하고 있다. 고향 인천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다.

제 주변을 보면 인천 출신 연예인들이 꽤 많아요. 인천 출신 연예인들을 보면 생활력도 강하고 연예계에서 스타성도 인정받는 편이지요. 뭐랄까 인천짠물이란 근성이 있는 것 같아요. 서울 분들은 인천 사람들이 좀 거칠다고 하는데 저는 인천사람들의 역동성과 생동감을 그렇게 본다고 생각합니다. 인천사람들 의리도 있잖아요. 요즘은 저희 연예인들보다 인천 자체가 많이 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송도, 영종도, 청라 등 경제자유구역이 있고. 인천사람의 한 명으로, 인천이 발전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제 고향 인천 언제나 응원하고 있습니다. 인천시민 여러분 사랑합니다~”

 

 

金眞國. 인천일보 기자 <저작권자 ⓒ 황해문화, 이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