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문화지리지

탤런트 전노민의 삶과 꿈

by 김진국기자 2016. 9. 29.

 

 

메이저리거 꿈꾸던 소년의 영화 같은 삶

 

 

 

형아 같이 가아~, ~

재용이 수봉산으로 올라가는 형의 뒤꽁무니를 쫓아가며 소리를 질렀다. 재용의 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봉산 꼭대기로 줄행랑을 쳤다. 산이라고 해봐야 해발 100미터도 되지 않는 야트막한 동네뒷산이었지만 일곱살 아이가 뛰어올라가기엔 히말라야 못지않은 난코스처럼 느껴졌다.

~, ~

얼마 못 가 멈춘 재용이 가쁜숨을 몰아쉬었다. 형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고, 날쌘 형을 따라잡기란 수봉산에 사는 다람쥐를 맨손으로 잡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약이 오른 재용이 제자리에 서서 돌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아이만큼이나 작은 돌들은 몇 미터 가지 못해 툭툭 떨어졌다. 허탈해진 재용이 씩씩거리며 산 정상 쪽을 노려보았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더이상 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재용아! 형 놀다 올 거니까 너 먼저 집에 들어가!”

태권도장을 나오자마자 재용의 형은 수봉산 정상 방향으로 내빼는 것이었다. 달리기도 느리고, 어딜 가나 챙겨줘야 했던 동생이 귀찮았던 것이다. 형은 재용과 잘 놀아주긴 했지만 가끔은 3살 터울의 어린 동생을 혹처럼 생각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재용이 왜 울었어?”

어깨가 축 처진 채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오는 재용이를 보며 누나가 다가왔다. 인천시 남구 도화동 578번지, 재용의 집은 수봉산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쓱쓱, 누나가 빨래를 하던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더니 재용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유심히 얼굴을 살폈다. 상처가 없는 것으로 보아 넘어지거나 누구에게 맞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아 아~

씰룩씰룩 잔뜩 튀어나와 있던 재용의 입에서 마침내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큰누나를 보자 작은형에게 버림받은 설움이 또다시 복받쳐오른 것이다.

이런, 작은 엉아가 또 우리 아기 놔두고 도망갔구나. 이눔의 새끼, 들어오기만 해봐라. 누나가 혼내줄 테니까. 그래도 울면 안 돼, 태권도 배우는 사람은 울면 안 되는 거야. 얼른 씻고 밥 먹자.”

큰누나가 양은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재용의 얼굴과 몸을 씻겨주었다. 누나의 손길이 닿자 아이의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재용은 누나가 목욕시켜줄 때 가장 행복했다. 큰누나의 따뜻한 손길이 재용의 몸 구석구석을 씻어줄 때면, 슬픔도 설움도 모두 사라지고 마음마저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네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저희 형제가 33녀였는데 그중 제가 막내였어요. 그러다 보니 큰누나가 가장이 돼 저희 형제들을 키우셨지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읜 재용에게 큰누나는 엄마였고, 큰형은 아빠였던 셈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요. 저를 낳은 뒤 몸이 쇠약해져서 돌아가셨다고만 들었어요. 어머니가 아픈데 제가 자꾸 무릎에 앉으려고 해 미움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조금 있어요. 미군부대를 다니셨는데, 주말엔 집에서 도넛, 빵을 만들어 자식들을 먹이시곤 했지요. 가정적인 분이셨어요.”

 

수봉산 자락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보내

 

탤런트 전노민(50, 본명 전재용)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수봉산은 1970년대만 해도 지금과 같은 한적한 공원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봄이면 벚꽃이 흩날리고 산책로가 예쁘게 조성된 산이 아닌, 털보아저씨의 삐죽삐죽 솟은 털처럼 나무가 듬성듬성한 야산이었다. 산기슭을 따라 집들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빼곡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수봉산은 재용에겐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다.

집과 태권도장 말고는 딱히 뛰어놀 만한 장소가 없었던 재용은 작은형과 숨바꼭질을 하며 수봉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태어난 동네에서 기억나는 건 후지카공업사.

지금 중고자동자매매단지 자리에 후지카 공장이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후지카공업사는 석유난로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전기와 물이 귀했던 그 당시 겨울, 후지카난로 하나만 있으면 온가족이 한겨울을 거뜬히 날 수 있었다. 불꽃심지에 불을 붙일 때 나는 석유냄새도 좋았고, 성냥을 그어 심지에 불을 붙이면 처음엔 주홍 불꽃이 일다가 이내 새파랗게 타오르는 불길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심지가 타는 바람에 불이 잘 붙지 않거나 심지를 제대로 앉히지 못해 검은 그을음만 피어오르는 경우도 있었으나 연탄난로에 비하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난방기구가 틀림없었다.

난로에 들어가는 석유는 동네 석유가게에서 됫박으로 팔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딜 가든지 석유를 파는 집에선 얼음을 팔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빨간 페이트로 석유라고 쓴 간판 옆엔 어김없이 어름’(얼음)이란 글씨가 부부처럼 나란히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마케팅, 브랜딩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 석유와 얼음을 함께 판매한 것이 일종의 생존전략이란 사실을 이해하게 된 건 어른이 다 돼서다. 석유는 겨울에 잘 팔리지만 여름엔 잘 팔리지 않는다. 반대로 얼음은 여름에만 잘 팔릴 뿐 겨울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품이다. 석유와 얼음은 사계절 내내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닌 각각 한철장사품목인 것이다. 석유와 얼음은 전혀 다른 상품이지만 계절의 변화에 따라 서로의 빈자리를 메워주었고, 둘 다 서민들의 생필품이며 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공통점도 있다. 승용차로 치면 그랜저처럼 모양이 전체적으로 크고 각이 진 짐자전차뒤에 사람의 두 배쯤 되는 커다란 얼음이나 석유통을 싣고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재용이 살던 수봉산이 공원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건 1976년부터다. 이때부터 산책로가 조성되고 점차 지금과 같은 공원의 모습을 갖춰갔다. 수봉산이 공원으로 조성되던 1978, 한국 국궁의 산 역사인 무덕정이 도원동에서 이전해온다. 무덕정은 19879월 대전 대덕정에서 열린 대한궁도협회장기 대회에 명궁 5명을 출전시켜 다섯 발씩 모두 25발을 명중시킨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수봉산에선 자유와 평화의 탑, 망배단, 인천지구전적기념비, 현충탑,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등 나라와 민족, 조상들의 공을 기리는 상징물이 유독 많이 눈에 띈다.

이곳엔 한때 유원지에서나 볼 수 있는 놀이동산이 운영되기도 했다. 허니문카, 범퍼카, 바이킹에서부터 기차에 이르기까지 월미도와 자유공원에서 가져온 놀이기구가 있었던 것이다. 놀이동산은 현재 어린이놀이터로 바뀌었다.

수봉산에선 지금 많은 공연과 행사가 열린다. 매년 현충일에 범패와작법무보존회가 중심이 돼 현충재를 지낸다. 나라를 위해 순국한 무명용사와 순국선열을 기리는 행사다.

벚꽃이 흩날리기 시작하면 수봉공원은 예술의 향연장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공원 입구 인천문화회관 상설공연장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61호 은율탈춤을 비롯해 여러 공연이 열리는 것이다. 이 같은 예술잔치는 인천문화회관 옆 국악회관과 은율탈춤전수관이 주도하고 있다.

수봉산에서의 구슬치기나 딱지치기가 지겨워질 때면 재용은 친구들과 함께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소래와 송도, 영종도, 월미도와 같은 바닷가가 그의 원정놀이터였다.

소래엔 철교가 있잖아요. 밑으로 바다가 훤히 보이는. 그 다리를 엉금엉금 기어서 건너가 커다란 조개를 잡곤 했어요. 지금은 귀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갯벌에 들어가면 손바닥만 한 조개가 발에 밟혔거든요. 그래서 먹지도 않으면서 잔뜩 잡아오곤 했어요. 영종도 가서 낚시하던 생각도 납니다. 낚시라고 해봐야 긴 대나무에 낚시바늘 하나 매달아놓은 게 전부였지요. 그런데 그걸 바다에 드리우면 팔뚝만 한 망둥어들이 올라오곤 했어요.”

재용이 어렸을 때만 해도 영종도는 만석부두나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영종도는 이후 국제공항이 들어서면서 연륙교가 건설됐고 이후 서구 경서동(장도)을 지나 중구 운북동(영종도)으로 들어가는 길이 새로 생겼다.

영종대교는 총 길이 4,420미터, 교량너비 35미터, 주탑높이 107미터, 교각 수 49개의 다리로 199312월에 착공해 200011월에 완공한다. 현수교와 트러스교, 강상형교가 혼합된 복합교로 영종도 쪽에 1,140미터, 인천 쪽에 480미터 걸쳐 있는데 상층에는 6차로의 도로가 지나고 하층에는 4차로의 도로와 복선철로가 지나가는 도로·철도 병용 2층 교량으로 인천대교와 함께 인천의 명물다리로 알려져 있다.

주교량인 현수교는 주탑과 주탑을 잇는 케이블을 다리 상판에 직접 걸어놓는 방식으로 시공한 세계 최초의 3차원 케이블 자정식(自定式) 현수교다. ‘행어로프는 수직이 아니라 주 케이블과 보강형 트러스에 경사진 3차원 형상으로 연결됐는데, 이처럼 3차원 케이블과 경사 행어로프는 교량의 내풍안정성 확보에 뛰어날 뿐 아니라 케이블 모양이 한국 전통한옥의 처마 형상을 띠고 있어 야경이 아름다운 편이다.

 

4학년 때 창영초로 전학가며 야구부 입단

 

도화초등학교에 다니던 재용이 창영초등학교로 전학을 간 건 큰누나가 동구 금곡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다.

저희 집은 따로 있었지만 저희 형제들은 도화동 큰집을 오가면서 자랐어요. 큰집엔 할머니도 계셨고 하니까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저희 형제들 때문에 큰집은 북적북적 했어요. 그러다 큰누나가 독립해서 금곡동에 집을 마련했는데, 여섯 형제가 우르르 갈 형편이 못 되니까 저와 작은형만 먼저 데려간 거죠.”

말이 없고 숫기가 없는 얌전한 재용이었지만 운동 하나만큼은 정말 즐겨했다. 창영초등학교 야구부에 들어간 것도 운동을 워낙 좋아한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창영초등학교의 교문을 열고 처음 들어갔을 때 재용은 운동장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했다. 더욱 놀란 것은 그 큰 운동장을 누비는 새하얀 유니폼의 전사들이었다. 새하얀 야구유니폼에 야구모자를 쓴 야구부원들은 차라리 눈부셨고, 재용은 마치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자신의 꿈을 찾은 것만큼이나 행복했다. 그가 전학을 갔을 때 마침 야구부원을 모집하고 있었고, 이에 응시한 재용은 당당히 창영초등학교 야구부 유니폼을 입게 된다.

창영초등학교는 야구명문교로 창영초를 졸업한 학생들은 상인천중, 인천고 등 중고등학교 야구명문교로 진학하며 야구인의 꿈을 키워갔다. 현재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류현진도 창영초등학교 야구부 출신이다.

재용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인천은 전국에서 야구를 가장 잘하는 도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천은 야구가 처음 들어온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야구를 소개한 사람은 1901년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를 이끈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Phillip L, Gillett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899인천영어야학회학생들은 이미 야구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한국야구협회가 펴낸 좬한국야구사좭는 당시 이 학교 학생이 남긴 일기에서 베이스볼이라는 서양 공치기를 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인천에선 1920년대 한용단’, ‘기봉’, ‘상우회와 같은 한국인팀과 미나도’, ‘인천세관’, ‘미신’, ‘실업단’, ‘은행단등 일본인팀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금의 제물포고 교정인 웃터골 공설 운동장에서 시합을 하곤 했다. 특히 경인기차통학생 모임이 주축이 돼 1911년 결성한 한용단야구단은 인천시민들에게 인기가 높아 경기만 열리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한용단이 일본팀과 경기를 할 때 마치 항일운동을 하는 것처럼 격렬하게 경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듯 항일운동과도 같은 인천 야구는 일제강점기 때도 꾸준히 성장해 1936년과 1939년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야구부가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1950년대 들어서는 인천고와 동산고가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등 전국 고교야구대회를 휩쓸며 인천 야구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힌다.

앞서 1946년부터 시작한 ‘4대 도시 대항 야구대회와 같은 사회인 야구대회가 도원동 인천공설운동장’(현 인천도원축구전용경기장)에서 자주 열리는 등 인천은 야구도시의 명성을 계속 이어나갔다. 인천에서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중학교, 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야구 붐이 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셈이다.

1970년대에 창영초등학교를 다닌 재용은 수업이 끝나면 밤늦게까지 운동을 했고, 집에 가면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몸이 허약했음에도 운동은 남보다 두 배, 세 배 하다 보니 운동이 아닌 노동이 됐던 것이다.

사실 야구부 아이들 중에 부잣집 아이들이 많았어요. 그 아이들은 잘 먹고 하니까 얼굴도 좋고 똑같이 운동장을 돌아도 쌩쌩한데 전 못 먹다 보니까 키가 작고 얼굴이 시커먼데다 금세 지치곤 했거든요.”

동사무소에서 밀가루를 배급받아 수제비만 끓여먹는 재용과 흰쌀밥에 계란후라이, 소시지와 장조림을 먹는 아이들과의 체력은 천지 차이였다.

, 두고봐라.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야구선수가 될 거야.’

말이 없고 조용했지만 지기 싫어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재용은 힘들수록 이를 악물고 더욱 열심히 운동에 전념했다. 그런 재용을 큰누나가 안타깝게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상인천중학교에 진학하면서다.

상인천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야구부에 들어갔는데 코치 선생님이 갑자기 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황당했지요.”

쪼그맣고 깡마른 게 야구를 한답시고, 집에 돌아오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픽 쓰러져 자는 동생을 볼 때마다 재용의 큰누나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어린 것이 좋아서 한다고 하지만 잘 먹이지도 못하고, 경제적인 지원도 할 수 없다 보니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밥을 굶지 않으면 다행이었고, 그나마 밀가루 배급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형편이었으니.

아침을 못 먹고 가거나,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어렸을 때 잘 먹었다면 지금 제 키가 180은 넘었을 겁니다.”

재용이 다닌 창영초등학교는 야구뿐 아니라 인천에선 역사적으로 매우 유서 깊은 학교다. 창영초등학교의 역사는 19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 최초로 조선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인천공립보통학교란 이름으로 문을 연 창영초등학교는 1910318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 창영초등학교가 민족학교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인천에서 3·1운동이 시작된 학교이기 때문이다. 19193월 인천공립보통학교 상급반 학생들은 3·1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할 때 항일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만세운동에 합류한다. 이들은 36일 정오 학교를 출발하여 배다리에서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 학생들과 만나 동인천역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선언문을 나눠준다. 그렇지만 25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당시 3학년이던 김명진(18)은 징역 2, 각각 2학년·4학년이던 이만용(18)과 박철준(19)은 태형 90대를 선고받는다. 이에 김명진은 판결에 불복하고 복심원(고등법원)에 항소한다. 일본인 판사 앞에서 당당하게 나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바탕한 의사 발동이지 결코 범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나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16개월의 징역형을 받는다. 김명진은 1996815일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애족장을 받는다. 그보다 앞선 199536일에는 이들의 공을 기리기 위한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가 세워진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빨간 벽돌의 교사(校舍)’1922년 조선인 유지들이 모금한 2만 원으로 세운 건물이다. 창영초등학교에 야구선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최초의 고미술학자 우현 고유섭 선생, 전 서울대 총장과 부흥부 장관을 역임한 신태환 박사, 법무부 장관과 대법원장을 역임한 조진만 씨, 월남 파병 훈련 중 산화한 강재구 소령 등도 창영초등학교 출신이다.

 

야구의 꿈이 좌절된 중학교 시절

 

상인천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야구의 꿈이 꺾인 재용은 한동안 엄청난 후유증을 경험한다.

그때부터 학교는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다녔어요. 큰누나에 대한 원망도 컸고요.”

말이 없는 재용의 성격상 큰누나에게 대놓고 반항을 하지는 않았다. 학교를 빠진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를 하지 못하게 됐다는 아쉬움으로 공부는 제쳐두고 공놀이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재용은 집에 들어오면 가족들로부터 말 좀 하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말수가 적었다. 워낙 내성적이던 아이가 꿈이 좌절되면서 더 말이 없어진 것이었다.

중학생 재용은 금곡동에 살면서도 태어난 동네인 도화동을 찾아 친구들과 공놀이를 하곤 했다. 놀이가 끝나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재용은 시장통에 들어가 떡볶이를 사먹곤 했다.

그땐 돈은 없는데 배는 무지 고픈 거예요. 떡볶이 먹으러 가면 10원에 두 개, 뭐 그렇게 팔았는데 10원 내고 떡볶이 하나 찍어 쪽쪽 빨다가 주인 아주머니가 한눈을 팔면 막 집어먹고 그랬어요. 나쁜 짓이었지요.”

헌책방이 즐비했던 배다리와 중앙시장, 그리고 양키시장의 풍경은 지금도 그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맛있는 노란 캐러멜과 초콜릿, 땅콩버터를 비롯해 없는 게 없었던 양키시장, 입학철이면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발걸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중앙시장. 양키시장과 중앙시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지금은 중저가 옷가게와 한복가게들이 들어섰다. 특히 생각나는 것은 양재기점포들이었다.

동구청에서 배다리 헌책방 방향에 있던 금곡동 53, 54 산업길 삼거리 일대를 지날 때면 쇠 두드리는 소리,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다름 아닌 양재기라고 부르는 알루미늄 그릇을 만드는 소리였다. 금곡동에 즐비했던 그릇공장에서 기술자들은 얇은 알루미늄 원판을 컴퍼스로 동그랗게 오려낸 뒤 로구로라고 부르는 기계로 물린 뒤 양재기라고 부르는 크고 둥근 그릇이나 냄비, 쟁반을 뚝딱 만들어냈다. 일단 모양이 잡힌 그릇은 도금공장으로 갔다가 샛노란 양재기, 양은냄비가 되어 중앙시장 가게 앞에 진열됐다. 여기에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찌그러진 냄비나 구멍 난 양재기를 사는 엿장수 아저씨들의 모습도 그 당시 풍경이었다. 동네 아이들 가운데는 강냉이나 엿을 먹기 위해 엄마 몰래 새 냄비나 새 양재기를 갖고 나와 바꿔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중학교 3년 내내 멘붕 상태로 야구만 생각하며 지내던 재용.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엄청난 용기를 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는 거예요. 중학교 3년을 허송세월로 보냈는데 고등학교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누나 몰래 야구를 다시 하기로 결심을 했지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재용은 야구부가 있는 학교를 직접 찾아간다. 그가 인천이 아닌 서울의 고등학교를 알아본 것은 큰누나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제가 중3 때쯤 위의 형 누나들은 대부분 성장해서 독립을 했고, 둘째 형과 저만 남았는데 누나가 결혼을 하며 서울로 갔어요. 저는 큰누나를 따라 서울로 왔는데 작은형은 인천에서 살겠다며 도화동 큰집에 남았죠. 서울로 이사 온 뒤 전철을 타고 상인천중학교를 다니며 김재박이 나온 대광고등학교나 야구 명문인 성남고등학교, 충암고등학교 등 야구부가 있는 학교들을 찾아다녔어요. 가서 야구부원이 될 수 있는지 알아본 거죠.”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였지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 용기의 원천은 자신의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모두 퇴짜를 맞고 마지막으로 찾아가 희망어린 약속을 받은 곳이 동대문상고였다. 동대문상고 야구부 감독은 예쁘장하게 생긴 중학생을 보더니 일단 학교에 합격해 들어와서 얘기해라, 내가 받아주고 싶어도 니가 학교 떨어지면 소용없는 거 아니냐고 말한다.

3년 동안 어두운 터널을 걷던 재용은 드디어 자신에게 서광이 비추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발걸음도 가볍게 집에 돌아온 재용은 책상 옆에 산더미처럼 책을 쌓아두고 밑줄 쫙, 별표 콕공부를 시작한다.

세상이 갑자기 달라 보이는 겁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험기간이었지만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죠.”

1980년대 초반은 상고가 인문계보다 커트라인이 높던 시절이었다. 동대문상고는 특히 졸업 뒤 은행, 증권사, 공무원으로 쉽게 갈 정도로 취업률이 좋은 학교였다. 그런 학교에 아무 생각 없이 허송세월을 보냈던 재용이 덜컥 합격을 한다. 합격증서를 받아든 재용이 부리나케 야구부로 달려갔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저 합격했습니다. 이제 야구부원으로 받아주시는 거죠?”

동대문상고 야구부 감독이 생게망게한 표정으로 재용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감독이 입을 열었다.

누구냐, ?”

재용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합격증서를 흔들며 소리쳤다.

감독님, 지난번에 이 학교에 합격하면 야구부원으로 받아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 표정은 지금까지 내성적이고 말 없던 재용의 얼굴이 아니라 야구 경기에서 승리했을 때 피어나는 구원투수의 모습이었다. 그런 재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감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제?”

아이 참, 지난번에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이제 합격했으니 야구부에 들어와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이 고개를 돌리더니 아무 말 없이 야구공을 닦았다.

감독님! 저 받아주시는 거죠?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거죠?”

재용이 어린아이 조르듯 계속해서 보채자 감독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가 이 새끼야, 바빠 죽겠는데 자꾸 귀찮게 하고 지랄이야. 너 같은 놈이 어디 한둘인줄 알아? 지금 중학교 야구부에서 올라온 애들도 다 못 받고 있구만.”

재용이 얼굴이 새카매지더니 손에서 합격증서가 툭 하고 떨어졌다. 합격증서가 겨울바람을 타고 두둥실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어깨가 축 처진 재용이 감독방을 나와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겨울바람이 세차게 그의 뺨을 후려치고 저만치 달아났다. 새파랗던 겨울 하늘은 어느새 노래져 있었다. 그때부터 6개월간 재용은 또다시 멘붕상태로 하루하루를 지낸다. 재용은 그러나 외유내강의 영민한 학생이었다. ‘이러다 나 바보되는 거 아닐까?’

 

악착같이 살아온 학창시절

 

다시 정신을 차린 재용은 학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로 야구를 포기한 재용은 큰누나의 품을 떠나 독립, 자취생활을 하며 주산, 부기, 펜글씨, 타자 2급 자격증을 취득한다. 몸만 독립한 것이 아닌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 쓰는 진정한 독립을 한 것이다. 그때부터 재용의 몸은 학교나 도서관, 아니면 일터 현장에 있었다. 그에겐 친구도 여유도 없었고 오직 일과 공부뿐이었다.

제가 펜글씨를 좀 써서 학교에서 서기를 하기도 했거든요. 학교에서 성적표나 생활기록부는 제가 다 썼고, 방학 때면 선생님이 소개해준 회사에 가서 서류 작성해주는 일을 했어요. 그럼 방학동안 11만 원 정도 벌었고, 그걸 모아 방세와 학비 내고 쌀 사고 했지요.”

독립생활을 해나가느라 여느 고등학생들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해야 했던 그였지만 고등학생은 고등학생이었다. 재용에게 다른 건 모두 사치였지만, 꼭 하나 사고 싶은 게 있었다. 그것은 나이키운동화 한 켤레였다. 지금은 흔하다 못해, 중저가브랜드로 전락했지만 나이키운동화는 1980년대 초만 해도 서울에서 있는 집아이들만 사 신는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하얀 바탕에 파랑색, 혹은 빨간색 브이자 마크가 그려진 나이키운동화가 정말 갖고 싶더라구요. 아마 그 시절에 중고생이었던 사람들의 마음은 똑같았을 거예요. 돈 아끼고 아껴서 그 운동화를 한번 사 신은 기억이 납니다. 그거 외에는 절대 다른 데 돈을 쓰지 않았어요.”

웬만한 자격증은 다 취득한 재용은 다음 단계로 대학을 생각하게 된다. 상고를 졸업하면 취직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대학을 가려고 인문계 커리큘럼을 보니까 제가 다니는 상고와 너무 다른 거예요. 고민 끝에 대입학원을 다녀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또 다 돈인 거예요.”

이래저래 재용은 죽어라 알바를 하며 주경야독을 한다.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한 기억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른다. 그렇지만 단 1분도 노는 데 보낸 기억은 결단코 없다. 재용은 돈 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남들과 똑같이 살면 전혀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하며 악착같이 살았다. 그렇지만 일찍 하늘로 가신 부모님도, 돈이 많지 않은 형제들도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임에도 그는 당시의 처지가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일과 공부에 전념했다.

내가 부모라고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자식들 놔두고 눈을 감고 싶었겠어요? 돌아가시면서 마음이 좋으셨겠어요? 그걸 생각하면 나는 절대 그래선 안 되겠다. 일단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누굴 원망하고 누굴 탓할 이유도, 시간조차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은 지금 현실을 살고 있는 내가 개척해야 하는 것이고, 모든 것은 제 책임이었던 것이죠.”

현실에 당당히 맞서고자 하는 재용의 성격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처음 면접을 치른 면접장에서 드러난다. 재용은 졸업을 앞두고 선생님이 추천해준 곳으로 면접을 보러 간다. K은행이었다. 그런데 서류를 쭉 훑어보던 면접관이 재용에게 대뜸 고아네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발끈한 재용.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고아는 누구도 돌봐줄 사람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건데, 저는 누나도 있고 형도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고아입니까?”라고 따진 뒤 면접장을 박차고 나온다. 물론 떨어졌다. 이 같은 전재용의 가슴엔 자신이 어렵고 외롭게 자랐다는 인식보다는 당당히 세상에 뛰어들어 남들과 똑같이, 혹은 남들보다 월등히 잘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숨쉬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85. 전재용은 결국 충남 천안에 있는 순천향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합격한다. 대학생이 돼서도 재용은 공부보다는 아르바이트에 더 전념한다. 대학은 고등학교에 비해 학비가 훨씬 비쌌던 것이다.

하루에 알바를 세 건씩 하는 날들도 있었어요. 그러면 피곤해서 수업시간에 엎어져 자고, 수업 끝나면 일하러 가고 뭐 그랬던 기억만 납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당구를 치거나 호프를 마시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담배와 술을 32세가 되어서야 처음 입에 댄 건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면서 가졌던 습관 때문이었다.

나중엔 과 친구들이 왕따를 시키더군요. 저 놈은 그런 놈이니 어울리지 말고, 말도 걸지 말라는 식이었어요.”

수업 끝나고 과 친구들이 술 한잔 먹으러 가자고 하면 너희들이나 가라고 하고, MT 같은 공식행사에도 빠지는 재용을 과 동급생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재용이 자꾸 귀찮게 하는 친구들에게 너네들은 집에서 해주는 따뜻한 밥 먹고 다니고, 용돈 받고 다니지 않느냐고 버럭 화를 내고 만다. 이때부터 재용은 좋게 말해서 홀로서기, 나쁘게 말하면 왕따를 당하게 된다.

술 담배를 안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살면 제가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한 거지요. 저로서는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는데 친구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 거지요. 그때 학비가 60만 원인가 그랬어요. 대학생이 그걸 번다고 생각해보세요. 저는 정말 단 하루도 놀아본 기억이 없어요.”

너무도 힘겨운 나날들. 전재용은 그러나 자신이 부모 없이 고생하면서 자랐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전노민은 지금도 학창 시절 얘기나 친구 얘기가 나오면 입을 굳게 다물어버린다. 할 얘기가 없기 때문이다.

입학할 때는 졸업장만 따면 된다는 생각을 했던 재용은 시간이 지나면서 졸업 후의 진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군대가 면제된 사실은 재용에게 이점으로 작용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다른 친구들보다 직장생활을 빨리 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그때는 군대생활이 36개월이었을 거예요. 대학 졸업 뒤 항공회사에서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때 과 친구들과 상황이 역전된 거죠.”

친구들이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재용은 일찍 취직을 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89년 서울 마포에 있는 항공화물회사에 입사한 전재용은 빠르게 안정을 찾기 시작한다.

졸업을 하고는 무조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회사에 다니다 보니 내가 조금만 열심히 하면 얼마 안 가 금방 성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20대 후반에 길거리 캐스팅되며 방송 시작

 

그렇게 안정된 직장에서 6년 정도 일했을 때, 전재용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찾아든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누군가의 잔칫집을 찾았는데 옆 자리에서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중 한 사람이 재용 앞으로 다가왔다.

혹시 아르바이트 안 하실래요?”

낯선 남자가 재용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아르바이트죠?”

재용이 낯선 남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냥 오셔서 해떨어질 때까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누구신데요?”

“CF감독입니다.”

얼마 주실 건데요?”

“50만 원이요.”

물을 마시던 재용의 목에 컥 하고 사래가 걸렸다.

하루 일하는데 50만 원이라고?’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좀 힘들 겁니다.”

상관 없습니다.”

회사원 전재용이 CF모델로 길거리 캐스팅되는 순간이었다.

약속한 날 휴가를 내고 촬영 장소를 찾아갔다. 촬영 장소는 서울 강남의 뱅뱅사거리라는 곳이었고 KBS 공익광고였다.

당시 광고시간이 보통 20, 30초였어요. 그런데 저는 14초짜리 공익광고를 찍은 겁니다. 그것도 골든타임에 방송되는 것이었고, 제 목소리까지 들어가는 광고였어요.”

이 광고는 교통안전 캠페인으로 운전자도 차에서 내리면 보행자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운전자에게 보행자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캠페인 광고였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진 촬영을 마치고 귀가한 재용은 그때부터 심한 몸살로 이틀간 자리보전을 하게 된다. ‘아 씨, 이거 약값이 더 들겠는 걸.’ 그러면서도 마음만은 따뜻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픈 건 아픈 거고, 일단 돈 받은 게 기분이 너무 좋더라고요당시 광고 콘셉트가 운전 함부로 하던 사람이 사고 날 뻔한 경험을 토대로 자신도 이제 보행자 입장에서 운전을 하는 콘셉트였거든요. 그런데 그게 방송되면서 CF 섭외가 들어오는 거예요.”

첫 번째 광고가 나간 뒤 전재용에게 무수한 전화가 걸려온다. 광고에이전시의 개념을 모르던 전재용은 아무것도 모른 채 거절을 하다 결국 두 번째 광고를 찍게 된다. 이번엔 몸값이 100만 원으로 뛴 상태였다.

회사에 병가를 내고 100만 원을 받고 한화기업 광고를 찍은 기억이 나요. 두 번째 작품에서 100만 원을 받으니까 야, 이거 괜찮네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 이후로 계속 광고 출연 요청이 이어지면서 전재용은 자신의 집안 식구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직장생활하는 사람이 핑계도 한두 번이지, 마땅한 변명이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누구 돌아가셨다, 누구 돌아가셨다 하면서 광고를 찍으러 다닌 거죠.”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직장생활 8년차가 됐을 때 전재용은 중대한 결심을 한다. 어차피 자신은 돈을 벌어야 했고, 그러려면 CF를 찍는 게 훨씬 빠를 거란 생각을 하고 사표를 던진 것이다. 워낙 성실하고 스마트했던 전재용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사장은 전재용에게 한 달에 두세 번 빠지는 정도는 용인해줄 테니 계속 회사에 다니라고 했지만, 전재용은 결국 사표를 내고 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사표를 던진 뒤부터 CF 섭외가 거짓말처럼 뚝 끊어진 것이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 늦게까지 일하던 사람이 할 일이 없어지니까 이상해지는 거예요. 불면증으로 한동안 고생도 했지요.”

일이 없는 한 달 동안은 잘 참았다. 그런데 2개월, 3개월째 접어들면서 앉아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이러다 백수 되는 거 아냐?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광고 섭외가 들어왔다. 금액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너무나 반가웠던 전재용은 즉각에서 제안을 수락하고 다시 모델활동을 재개한다. 그때부터 다시 방송은 물론, 신문 등 미디어에 한 달에 열 몇 개씩도 찍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CF모델 전재용이 탤런트로 변신하는 계기를 만난 건 32세가 되면서부터다.

“MBC 방송국이라면서 전화가 왔어요. 나는 모 국장인데 뭐 하는 사람이길래 그렇게 광고를 많이 찍는 거냐고 물어보더라구요. 혹시 누가 밀어주는 사람 있냐고. 그래서 아무도 없다고 했더니 한번 보자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왜 보자는 거냐고 따지듯이 물었더니 전화를 끊더라고요. 그때까지 저는 방송국에선 PD 선생님이 제일 높은 분인 줄 알았지 국장이 뭐 하는 사람인지 전혀 몰랐거든요. 방송국에서 제일 높은 국장한테 그렇게 쌀쌀맞게 대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전노민은 일주일 뒤 MBC 이창한PD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국장을 대하던 태도와는 달리 전노민은 깍듯하게 인사를 한 뒤 방송국으로 나가겠다는 답을 보낸다. 이창한PD는 전노민을 탤런트로 데뷔시켜준 사람으로 현재 중국에서 외주제작을 하고 있다.

그때 처음 출연한 작품이 <강릉가는 길>이란 설날 특집 드라마였다. 여기서 전노민은 단역으로 몇 신 출연했다.

사실 제가 연기엔 소질이 전혀 없었어요. 하면서 조금씩 늘어난 것 뿐이지요. 지금도 옛날 촬영한 작품을 보면 손이 오그라들곤 합니다.”

모델에서 탤런트로 변신하면서 전노민에겐 새로운 시련이 찾아든다. 모델을 할 때는 사람들이 한껏 추켜 세워주며 대접을 해주었는데, 탤런트가 된 이후 찬밥신세를 맞게 된 것이다.

“CF 할 때는 영화와 똑같아서 촬영하면서 점심때 되면 밥 차려놓고, 밤 되면 숙소 잡아주고 했는데, 탤런트는 전혀 그런 게 없는 거예요.”

배우로 데뷔하면서 나도 이제 뭐가 됐구나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방송국에선 탤런트들이 자신들이 찍을 신만 PD의 지시 아래 찍었고 나머지는 모두 각자 알아서 해야 했다.

전재용 씨 나오세요, 해서 찍고 나면 가타부타 아무 말도 없는 거예요. 점심시간이 되니까 다들 불을 끄고 나가서 혼자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밥 안 주나? 기다렸는데 점심시간 끝나니까 하나둘 들어오더라고요.”

그 다음날 역시 촬영 뒤 “2시까지 점심시간입니다하더니 모두 방을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전노민은 그렇게 이틀째도 밥을 굶어야 했다. 그래서 한 사람한테 밥을 안 주냐고 물어보았고 그는 밥을 누가 주냐, 각자 사먹는 거다라고 말해준다.

3일째 되는 날 탤런트 강남길이 다가왔다.

, 너는 밥도 안 먹냐?”

쭈뼛거리는 전노민에게 강남길은 야 가자, 내가 자장면 사줄게라며 그를 데리고 나간다. 캐스팅 되면 자연스럽게 스타가 될 줄 알았던 전노민은 방송계의 쓴맛을 본 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문제는 탤런트가 되면서 CF가 끊겼다는 사실이었다. 주연이 아닌 어설픈 단역으로 알려지다 보니 CF계에서 그를 찾지 않게 된 것이다.

CF전속모델과 탤런트의 모델료는 천지차이였다. ‘야 이거 괜히 시작했나?’ 전노민은 또다시 고민에 빠진다. 방송에 널리 알려진 것도 아니고, CF계에서 연락도 끊겼고. 전노민은 , 나는 왜 맨날 이렇게 되는 거지?’ 하고 자괴감에 빠진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그렇게 몇 차례 단역만 연기하던 전노민은 2002년 처음 일일연속극의 주인공으로 데뷔를 하게 된다. 그리고 3년 뒤엔 김수현 작가의 <사랑과 야망>에 캐스팅되면서 조연상까지 받게 된다. 2004년 전노민으로 개명하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그는 2009년엔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의 정부 설원 역을 맡으며 큰 인기를 얻는다. 전노민은 늦깎이로 성공한 대기만성형 배우라고 할 수 있다.

 

고향 인천에서 영상문화산업 중흥 위한 초석 놓고파

 

그는 배우인생만큼이나 개인적 삶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28세 때 결혼한 첫 아내와 헤어진 그는 2004년 탤런트 김보연 씨와 재혼했으나 지난해 결별했다. 그에겐 현재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대학교 2년생인 딸이 하나 있다.

50년 삶을 살아오는 동안 온갖 평지풍파를 겪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전노민은 이제 인천 문화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현재 인천영상위원회 이사인 그는 고향 인천을 위해 정말 열심히 뛰고 있는 중이다.

아직 가족들이 인천에 살고 있고,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고향이 편해집니다. 인천에 자주 와서 일도 하고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합니다.”

그가 인천영상위원회 일을 하게 된 이유도 권칠인 인천영상위원회 위원장과 송영길 전 인천시장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는 인천이 제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하며 뼈 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여건이 되는 대로 고향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싶다.

전국 어디를 통틀어도 인천만큼 촬영하기 좋은 장소가 드뭅니다. 시대적으로 변해왔으면서도 개항지구를 비롯한 구도심과 송도신도시와 같은 신도심이 공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스튜디오가 있다면 금상첨화일 겁니다.”

전노민은 문화가 발전하려면 단체장의 전폭적인 지원과 시민들의 성원이 있어야 가능하다인천을 최고의 영상도시로 만들어가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강조한다.

인천영상위원회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인천영상위는 단지 초석을 놓을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초석이 없다면 성장과 발전은 불가능하겠지요. 저는 제 고향 인천에 그 초석을 놓는 데 작은 벽돌 하나를 쌓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전노민은 부산영화제 역시 15년 만에 자리를 잡은 것이라며 인천 역시 인천영상위의 기능이 좋다 나쁘다 얘기하는데 지금은 과도기이므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고향 인천에 오면 편합니다. 사람에게 고향은 수지타산 없이 안아주는 어머니 품 같은 존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잘생긴 중년 탤런트의 서글서글한 눈매에서 고향을 생각하는 애틋한 사랑의 물결이 일렁였다.

 

 

金眞國. 인천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