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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지리지

2016 전국체전,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

by 김진국기자 2016. 10. 7.

 

2016 제97회 전국체육대회에 다시 보는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 전 국가대표 투포환 선수를 만나다 

 

 

 

버스 차창에 무수한 물방울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물방울들이 미끄러지듯 사선으로 떨어져내렸다. 부풀어오르는 연둣빛 이파리에도, 펄럭거리는 푸른색의 비닐우산 위로도 빗방울이 굴러다녔다.

버스 맨 뒤칸에 앉아 차장 밖에 펼쳐진 비 오는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녀가 천천히 일어섰다. 웬만한 남자보다 키가 크고 체격도 아주 좋은 여학생이었다.

우욱…….”

자리에서 일어나던 여학생이 옅은 신음소리와 함께 털썩 주저앉았다. 오른쪽 턱에 붙인 붕대는 이미 시뻘건 피로 물들었고, 오른쪽 팔꿈치는 퉁퉁 부어 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여학생이 낑낑대며 다시 일어섰다. 쿵쿵 소리를 내며 여학생이 차장 있는 곳으로 힘겹게 걸어갔다.

언니, 여기서 내려주세요.”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내려달라고? 차장이 여학생을 힐긋 쳐다보았다. 베레모를 쓴 귀엽게 생긴 차장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차장과 여학생 사이에 눈싸움이 벌어졌다. 소녀의 키가 워낙 컸으므로 차장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올려다보았고, 옥자는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은 풍경이었다.

…….”

…….”

짧고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차장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스토옵요!”

잠시 뒤 버스가 멈춰 섰고, 옥자가 내렸다.

! ! 오라이요.”

옥자를 내려준 버스가 차장의 출발신호와 함께 안개비 속으로 멀어져갔다. 털털거리는 버스의 머플러 구멍으로 짙은 회색빛 연기가 뿜어져나왔다. 계절은 이제 막 여름으로 접어드는 중이었다. 비가 그치면 연초록 빛깔의 벼들이 짙은 녹색으로 변하며 한 뼘 정도 훌쩍 자라 있을 것이었다. 옥자는 경인선 철길을 따라 부평 방향으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얼굴에 와 닿는 촉촉한 이슬비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운동을 계속 해야 하나? 어차피 부모님도 반대하시는 건데, 이제 그만 할까…….’

아냐, 난 꼭 금메달을 따야해, 이왕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보자.’

그렇지만 너무 힘이 들어, 게다가 나는 운동에 재능이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코치 선생님이 내게 그렇게까지 화를 내고 체벌까지 할 이유가 없잖아.’

소녀는 덩치만 컸지 마음은 아기였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이슬비에 젖어, 소녀는 철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갔다. 철로 위로 미립자 같은 빗방울 알갱이들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초여름비는 요술쟁이였다. 굵게 쏟아지다가 가늘게도 내리고, 안개처럼 세상을 흐려놓기도 했다. 옥자는 왠지 그런 비가 좋았다.

학창 시절에 비를 참 좋아했어요.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걸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생각도 정리되곤 했지요. 따뜻한 손길처럼 사람을 다독여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있잖아요, 정말 좋았어요.”

아시아의 철인, 아시아의 여왕 백옥자. 그녀를 가리키는 수식어는 카리스마가 있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들이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는 역시 아시아의 마녀가 틀림없다. ‘절대 극복할 수 없는 투포환의 제왕 백옥자는 전 세계 투포환 선수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자 마녀였을 것이었다.

 

십정동에서 태어나 결혼할 때까지 성장

 

현재 대한육상연맹 여성위원장을 맡고 있는 백옥자가 나고 자란 곳은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479-2번지다. 태어나던 해인 1951년부터 결혼을 한 1976년까지 백옥자는 철길 바로 옆인 이곳에서 살았다. 큰 대회를 앞두고 태릉선수촌에 들어가 몇 개월씩 합숙훈련을 할 때만 제외하고 말이다.

어렸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기찻길이었어요. 주안초등학교에 다녔는데, 그 당시엔 버스가 없었어요. 있어도 매우 드물었지. 십정동에서 기찻길을 따라 계속 걷다보면 어느새 학교에 닿곤 했지요.”

백옥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 십정동은 논밭으로 이뤄진 들판이었다. <은하철도 999>처럼 그런 논밭 한가운데로 길게 뻗어 있는 기찻길은 그에게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신비의 길이었다. 그 길은 학교를 오가는 통학로이자 유일한 놀이터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좋았던 옥자는 동네 머스마들과 어울려 기찻길 사이로 달리기를 하고, 술래잡기, 다방구와 같은 놀이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순발력이 뛰어났던 그는 특히 달리기에서만큼은 웬만한 남자들에게도 지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가끔 아그야, 막걸리 좀 받아오그라며 양은주전자와 100원짜리 지폐를 주실 때도,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도 옥자는 기찻길을 따라 달리거나 천천히 걸으며 동선의 기준점으로 삼았다. 그렇다. 그의 성장기 놀이터였던 기찻길은 우리나라 철도역사의 상징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다.

경인선이 첫 번째 기적을 울린 날은 1899918일이다. 경인선은 이때 인천에서 노량진을 잇는 32.2킬로미터에 달하는 철로였다. 그 위로 증기기관차 4, 객차 6, 화차 28량이 하루 두 차례 인천과 서울을 왕복했다. 당시만 해도 경인선은 요금이 비쌌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고급 통행수단이었다. 일본인들이 설립한 경인철도합자회사는 이같은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역마다 사람을 두고 승객과 화물을 끌어들이려 애를 썼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철길 위에 돌 같은 장애물을 올려놓는 등 철도운행을 방해하고는 했다.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도 주변에 있는 초가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화재도 문제였다. 증기기관차에서 날아오는 불티가 초가 지붕 위에 내려앉아 집을 태우기 일쑤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경영난이 악화되자 일제는 우각동역(현 도원역 부근)을 폐쇄한다. 처음 채미전거리에 있던 축현역은 190812월 지금의 동인천역 자리로 신축 이전하여 1926상인천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인선이 안정화된 시기는 월미도 유원지가 조탕과 해수 등으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름을 날리면서부터다.

개설 초기, 경인선은 서울로 학교를 다니는 기차통학생의 오랜 추억을 갖고 있다. 일제 강점기 경인선과 관련해 기록을 남긴 사람은 고 신태범 박사다. 그는 자신의 저서 좬인천 한 세기좭에서 기차통학생에 대해 회고한다. 그는 1925년 경성중학교에 입학한 이래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마칠 때까지 10년 정도 인천에서 서울까지 이 경인선을 타고 통학을 한 대표적 기차통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신태범 박사가 학교를 다니던 시기는 인천의 인구가 6만 명에서 7만 명으로 늘어나던 때이고 그 가운데 일본인이 1만 명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때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들은 유현역’(현 동인천역)에서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 청사가 준공되기 전 구역)까지 경인선을 타고 다녔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55분 정도가 걸렸고,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18회 운행했다. 표값은 어른이 55전이고 학생들은 한 달 2, 세 달 4, 여섯 달은 6원 하는 통학패스를 끊고 다녔다. 인구가 많지 않아 그다지 사람이 붐비지 않았으며, 객차는 의자가 넓고 등받이가 높아 독서실이나 담화실 같았다고 신태범 박사는 밝히고 있다. 당시 인천에서는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교), 박문학교, 영화학교, 신흥국교, 유현국교에서 매년 400명에 가까운 남녀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었다. 반면 인천의 중등학교는 일본인 전용인 인천남상업학교와 한국인 전용인 인천북상업학교, 일본인 전용 인천고등여학교가 있었는데, 이 세 학교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15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렇다 보니 남는 학생들은 서울의 공사립 중등학교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기차통학생이란 문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신 박사는 책에서 “1915년부터 점차 늘기 시작한 기차통학생으로 1920년에 이르러서는 배제통학생만이 20명 가깝게 인배(仁倍)를 조직, 전인천축구대회에 출전해 우승하기도 했다. 통학생수는 한국 남녀학생이 200, 일본 학생이 100명 정도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경인선을 타는 남학생들은 앞 칸에, 여학생들은 맨 뒷 칸에 타는 불문율을 준수했으며 여학생들의 경우 긴 머리로 댕기를 따고 있었다.

백옥자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는 경인선이 복선공사를 하던 시기다. 경인선은 1969년엔 영등포-용산-서울역구간의 복선공사를 완성했다. 수도권 전철화 계획에 따라 서울-인천38.9킬로미터와 서울-수원41.5킬로미터, ‘용산-성북18.2킬로미터가 전철화 된 때는 1974년이다.

1965112동인천-주안간이, 같은 해 9월엔 주안-영등포구간이 각각 복선 개통됐으며 영등포-용산, ‘용산-서울간의 복선 공사는 19696월과 9월에 각각 완성됐다. 1974815일 수도권 전철화 계획으로 서울-인천38.9킬로미터가 서울-수원41.5킬로미터, ‘용산-성북18.2킬로미터와 함께 전철로 변신했다.

경인선이 전철로 바뀌고 복선화가 추진된 것은 1960년대 이후 급속히 진전된 공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조치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경기가 수도권이 되면서 경인선은 경인고속도로와 함께 서울-인천을 잇는 경기도 서부 지역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한다.

1990년대 들어 경인선의 교통량이 크게 늘면서 기존의 복선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1990년대 복복선화 사업이 시작되면서 구로-부평구간은 19991월에, ‘부평-주안구간은 20023월에, ‘주안-동인천구간은 200512월에 각각 복복선으로 개통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농구로 시작해 투포환으로 전향

 

백옥자는 장녀인 언니, 그리고 오빠 셋, 아래로는 남동생을 하나 둔 6남매의 다섯째였다. 해남 사람인 아버지는 양키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키가 컸고, 부산 사람인 어머니는 골격이 큰 여장부였다.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백옥자와 그 형제자매들의 체격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십정동에 전답이 좀 있었고, 그 땅에 농사와 함께 가축을 키웠으므로 그의 집안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선 그다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1960,70년대 대부분의 집안이 그랬듯이 억척스런 어머니는 굳이 노점상을 하면서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애쓰기도 했다.

학교를 갈 때면 아버지가 꼭 용돈을 주시고 일정 거리까지 바래다주셨어요. 그 돈으로 친구들과 빵도 사먹고, 솜사탕 같은 것도 사먹고 했지요. 반 아이들 중에 고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한테는 학교에서 옥수수로 만든 강력분을 한 주걱씩 주었거든요. 저는 그게 너무 맛있어서 제 도시락하고 바꿔먹고는 했어요.”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잘 먹고, 잘 놀며 성장한 옥자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키가 부쩍 자란다. 그렇게 입학한 중학교가 숭의여중이다.

당시 숭의여중에 농구부가 있었는데요. 중학교 때 제 키가 173이나 174 정도 된 것 같아요. 당시엔 그 정도면 작은 키가 아니었거든요. 키가 크다 보니까 당연히 농구부에 들어갔지요.”

사실 옥자는 키만 큰 것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운동의 기초라 할 수 있는 뜀박질을 잘하고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그렇게 숭의여중 농구부 선수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박문여중 육상코치가 그를 찾아왔다. 숭의여중에 체격이 아주 좋은 여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인천지역 코치들 사이에서 회자됐고, 이 소식을 들은 박문여중 교사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때 코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농구를 하면 세계대회에 못 나가지만 육상을 하면 올림픽 같은 큰 대회에 나가 메달도 딸 수 있다고. 그래서 박문여중으로 전학을 가게 됐어요.”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옥자가 운동하는 것을 집안에선 아무도 몰랐다. 만약 알게 되면 틀림없이 반대를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희 가족 중 행복이란 이름을 가진 오빠가 있는데 권투선수였거든요. 백행복이라고 강펀치의 소유자로 알려졌었어요. 그런데 너무 운동을 잘하다 보니 라이벌 측 건달들이 어느 날 오빠를 두들겨 패서 시합에 못 나오게 만들었거든요.”

백옥자의 부모는 옥자에게 네 오빠가 운동을 그렇게 잘했지만 결국 깡패들한테 맞고 반병신이 됐다가 이제 겨우 살아났다. 우린 너희들이 운동한다고 하면 아주 치가 떨린다. 너는 운동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했던 것이다.

옥자가 운동을 시작할 즈음, 논과 밭, 그리고 공동묘지가 있던 십정동의 풍경도 크게 달라진다. 1960년대 이후 공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며 도시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인근 도화동에 선인재단이 많은 학교를 세우며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십정동으로 밀려와 터를 잡았다. 지금처럼 담이 거의 없는 좁은 계단을 두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지어진 때가 바로 이 즈음이다. 1970년대 갯벌이 매립되고 주안수출공단까지 들어서면서 십정동은 전형적인 도시빈민, 서민 집성촌으로 변해갔다. 인구가 늘면서 시장이 형성되고 주택도 늘어났다.

중학생이 되며 옥자는 버스로 통학을 하게 된다. 제물포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옥자를 위해 아버지는 언제나 석바위까지 배웅해주고, 하굣길에는 마중 나와 옥자를 기다리고는 했다. 옥자는 그런 아버지에게 운동하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어느 날 아버지가 옥자에게 물었다.

너 혹시 운동하는 거 아니냐? 뭐하느라고 맨날 늦고, 도시락은 왜 두 개씩 싸가지고 댕기는 것이다냐?”

얼굴이 벌게진 옥자가 대답했다.

학교에 남아서 복습하느라고 그런 거예요.”

혼자만의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밤마다 통증으로 낑낑대며 잠 못 이루는 딸을 보며 아버지가 채근을 한 것이다.

너 애비헌테 바른대로 말혀야 한다. 너 운동하는 거 맞지? 가시나가 무슨 운동을 하길래 매일같이 늦고, 밤마다 낑낑대는 것이냐? 대체 뭔 운동을 허길래.”

옥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쇳덩어리 던져요, 아부지.”

아버지의 얼굴이 일순간 어두워지더니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옥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뭣이여? 쇳덩이를 던진다고라? 워메, 뭐 그런 운동이 다 있다냐?”

투포환을 한다는 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그날부로 옥자에게 주는 용돈을 딱 끊었다. 매일 마중을 나와 자상하게 딸의 손을 잡고 집까지 데려오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화간 난 것처럼 어두운 표정의 아버지는 가뜩이나 운동 때문에 힘든 옥자를 더 힘겹게 만들었다.

 

학교와 인천공설운동장 오가며 메달의 꿈 키워

 

메달을 따서 부모님의 마음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한 옥자는 이를 악 물고 더 열심히 운동에 전념한다. 주로 널찍한 박문여고 운동장에서 연습을 했지만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는 인천공설운동장을 찾았다. ‘웃터골운동장이라고도 불린 인천공설운동장은 1920년 준공됐을 때도 그랬지만 당시 각종 프로 스포츠가 열린 인천 스포츠의 메카였다.

인천공설운동장이 만들어진 것은 일제가 천황을 존경하는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장소로 쓰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제물포고 교정인 인천공설운동장이 처음 생길 때만 해도 그 자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인 자유공원에서 50미터 거리에 자리한 요지였다. 1934년 인천부립중학교에 자리를 내주고 도원동으로 옮기기 전까지 이곳에선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를 모태로 한 한용단을 비롯해 야구단이 활약을 펼쳤다.

도원동으로 이전을 한 이후에도 야구뿐만 아니라 자전거경주대회, 초등학교 운동회, 연합체육제전 등이 이곳에서 펼쳐졌고 1960, 70년대엔 인천고, 동산고, 인천공고, 송도고의 운동선수들이 이곳에서 체육인의 꿈을 키웠다. 인천공설운동장은 현재 인천축구전용경기장으로 새롭게 탈바꿈했으며, 인천시민구단인 인천유나이티드 축구단이 상주하고 있다. 현재는 건물 지하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중동구 지역민들의 쇼핑장소로 애용되고 있기도 하다.

부모님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도 모자랄 판에 가족의 반대, 코치의 가혹한 지도로 옥자는 지쳐갔다. 그럴 때마다 찾던 장소가 간석동 산 중턱에 자리한 절이다.

사실 제가 천주교 신자였거든요. 그런데 십정동에서 조금 벗어나면 석바위 못 미쳐 동암 쪽에 절이 있었어요. 가끔 몸이 아플 때나 기록이 안 나올 때면 그 절까지 뛰어올라가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곤 했어요.”

잊을 만하면 쿵쿵거리며 뛰어올라와 법당에서 한참동안 앉아 있다 가는 덩치 큰 소녀를 보며 스님들은 오늘도 또 얻어터졌냐?”며 위로 반, 놀림 반으로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럼 옥자는 스님들을 향해 컨디션이 안 좋아서 기록이 잘 안 나온다, 부모님이 걱정할까봐 그게 걱정이다고해성사를 하곤 했다. 그러면 스님들은 껄껄껄 웃으며 옥자의 등을 두드려주고는 했다.

그렇게 절과 산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면 그나마 마음이 가라앉았다. 옥자가 자주 찾았던 사찰은 대한불교화엄종본산인 약사사. 당시만 해도 산중턱의 이름 없는 작은 절이었지만 지금 약사사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다.

약사사는 1932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하던 보월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보월스님이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중 명당을 발견한다. 산이 그리 높지 않으면서도 산 정상에서 보면 동서남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산세가 시가지를 감싸 안은 듯한 모양을 한 게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보월스님은 이때 지금의 위치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작은 암자를 지은 뒤 금강산으로 돌아간다. 이후 인천 해광사에서 수도 중이던 한능해(한상호) 스님이 1960년대 지금의 대웅전을 짓고 약사암이란 이름을 약사사로 개명한 이래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약사사는 대한불교화엄종 본산이자 화엄일승법계도를 전국에서 유일하게 실물로 조성해놓은 곳이기도 하다.

사찰 뒷마당에 있는 화엄일승법계도는 돌벽을 세워 미로처럼 만들어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벽면마다 새겨진 한 글자, 한 글자는 그 옛날 의상대사가 태우다 남은 210개의 글자들을 재현한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약사사 경내의 화엄일승법계도는 화엄일승법계도를 요잡(, 안쪽을 한 바퀴 도는 행위)하면 84000자의 화엄경을 읽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약사사에 화엄일승법계도가 실물로 조성된 때는 20075월이다. 지금의 주지인 화응스님은 저희 사찰이 화엄종 본산이다 보니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를 기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조성 이유를 설명한다. 화엄일승법계도 중앙에는 네 분의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사면불이 있다. 화엄경본존불인 비로자나 부처님, 과거의 부처인 아미타불, 현재의 부처인 석가모니, 59억 년 뒤에 오실 미륵불이 바로 사면불이다. 그 안에는 미얀마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도 하다.

지난 1997년까지 약사사의 주지는 해원스님이었다. 해원스님은 신흥동 해광사주지였던 능해스님의 아들이자 화응스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능해스님-해원스님-화응스님으로 이어지는 화응스님 집안은 대를 이은 불자 집안이다. 화응스님이 약사사에 들어올 때는 8살 아이였다. 약사사에 오기 전까지는 해광사에서 자랐지만 아버지가 약사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따라온 것이다. 그는 초중고를 모두 인천에서 졸업한 인천 토박이다. 절에서 성장하며 23세에 출가한 화응스님은 중도를 지키며 무소유봉사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왔다. 화엄종장학회를 만들어 64명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에게 매년 장학금을 주고 있기도 하다.

 

중학교 때 유망주로 발탁, 본격적인 활동 시작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던가. 그렇게 학교와 인천공설운동장, 산중턱의 고즈넉한 사찰, 빗방울 떨어지는 기찻길을 전전하던 옥자는 중3때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체육신인 발굴대회 때 신인선수로 발탁되어 유망주로 신문에 보도되며 부모님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고 민관식 씨가 대한체육회 회장을 할 때였다.

제 이름이 신문에 나니까 그때서야 허락을 해주시더군요. 올림픽에 나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주겠다는 말씀까지 하셨어요.”

중학교 3학년, 부모의 허락을 받은 옥자는 학교와 인천공설운동장을 떠나 태릉선수촌에 들어간다. 옥자는 이때부터 십정동 집과 송림동에 있는 학교, 서울의 태릉을 번갈아 오가며 금메달리스트의 꿈을 키운다.

박문여고에 진학한 옥자는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하며 훈련에 전념, 2 때인 1968년 멕시코올림픽 최연소 선수로 발탁된다. 그렇지만 아직은 백옥자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노메달로 귀국했지만 옥자의 가능성을 알아본 육상연맹은 옥자를 집에 보내지 않고 태릉선수촌에 묶어두며 세계대회가 열릴 때마다 출전시킨다.

엄마 나 지금 말레이시아 가. 엄마 나 지금 중국 가. 전화로 얘기하면서 경기에 출전한 거예요. 그때부터 동남아로 다니면서 쭉쭉 메달을 따온 거죠.”

태릉선수촌은 옥자에게 꿈의 광장이자 지옥이었다. 겨울철, 눈이 오면 포환을 던질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반경 30, 40미터에 이르는 운동장을 코치와 둘이 쓸어내야 했다. 전방의 군인들이 눈을 쓸고 나면 곧바로 쌓인다고 했지만, 태릉의 눈이야말로 지루할 정도로 쏟아져내렸다. 겨울엔 특히 쇳덩이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갑게 얼기 일쑤였다.

포환을 던지면 턱에서 피가 나잖아요. 손이고 턱이고 쩍쩍 달라붙는 그 느낌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어요. 그렇게 꽁꽁 언 쇳덩이를 100, 200개씩 던지는데 그게 언 데다 모레까지 묻어서 턱에 닿으면 턱이 찢어졌어요. 포환은 턱에 붙여 던지는 거라 얼굴에서 떼면 거리가 안 나오거든요.”

힘은 똑같이 들었지만 모교인 박문여고에서 운동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했다. 무엇보다 옥자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으면 쟤가 백옥자래하며 저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 올림픽에 출전했으니 유명해진 거죠. 촌에서 구경 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운동을 하고 있노라면 선생님과 학생들이 수업을 멈추고 옥자가 포환 던지는 것을 구경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난히 웃음이 많던 옥자는 꺄르르르, 꺄르르르웃으며 신이 나서 투포환을 던졌다.

저도 꿈 많은 여고생인데 좋아하는 선생님이 있었을 거 아녜요, 그럼 운동 끝난 뒤 선생님들한테 밥 사달라고 해 먹기도 많이 먹었어요. 저희 박문여고 앞에 뗀뿌라’(튀김)집이 있었어요. 그건 여고생들한테 보약이었지.”

남학생들한테 인기가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송림동에 있는 학교에 가려면 보통 제물포역에서 내려 역 뒤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야 했다. 그런데 당시 아침시간 제물포역엔 대헌중고, 동산중고, 동인천중고에서부터 인천교대, 인하공과대학의 학생들까지 밀물처럼 몰려드는 그야말로 러시아워였다. 그런 시간, 여느 여학생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옥자는 쉽게 눈에 띄었고, 더욱이 그는 올림픽에 출전했던 스타였다. 남학생들이 떼거지로 달라붙어 사인을 해달라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옥자만 나타나면 제물포역은 아수라장이 되기 일쑤였다. 옥자는 결국 택시를 이용해야 했다.

학교에서 운동할 때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장소가 송도유원지.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그때 백운양이란 감독님이 계셨어요. 육상부 선수들은 빨리 달려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부터 송도유원지까지 뛰어갔다 오는 훈련을 아주 지겨울 정도로 많이 했어요. 뛰어갔다 오면 1시간 정도 걸리는데 내가 주장이니까 맨 앞에서 리드해야 하는데 이건 너무 힘이 드는 거라. 나는 특히 달리기 선수가 아니고 투포환 선수잖아요. 그래서 걸었다 뛰었다 하고 중간에 수도 찾아 물도 마시고 했죠. 그때만 해도 송도유원지엔 사람이 엄청 많았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나 몰라요.”

옥자가 운동을 하던 시절, 송도유원지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1963년 정식으로 문을 연 송도유원지는 수문을 통해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내보내는 국내 유일의 인공해수욕장이었다. 한여름이면 수도권에서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수영은 물론 보트놀이도 할 수 있었다. 물이 빠져나가면 아암도라 이름 붙은 바로 앞 작은 섬까지 조개를 주우며 걸어서 건너가는 것도 가능했다. 연인들은 손을 잡고, 아이들은 선생님들을 따라 송도유원지로 모여들었다. 송도유원지는 월미도와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브랜드였다.

그런 송도유원지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게 된 때는 1990년대부터다. 수도권에 최첨단 시설을 갖춘 대형 놀이공원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송도유원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갔다. 새롭게 들어서는 놀이시설들과 경쟁할 수 있는 시설투자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만 해도 한 해 방문객이 200~300만 명을 넘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수십만 명에 그치게 됐다. 1939년 일본군 휴양지로 처음 문을 열었던 송도유원지는 결국 지난 2011170억 원의 부채를 안고 문을 닫은 상태다. 현재 몇몇 개인의 소유인 송도유원지는 개발투자자를 기다리며 옛날 모습 그대로 방치돼 있다.

 

백옥자, 1970년대 마침내 전성기를 열어젖히다

 

정치적으로 삼엄하고 경제적으로 빈곤하던 1970년대, 마침내 백옥자의 전성기는 시작된다. 백옥자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 출전해 14미터57센티미터를 기록하며 금빛 메달을 목에 건다. 그해 여름, 금의환향한 백옥자는 동인천역 광장에서 인천시장의 영접을 받은 뒤, 사이드카의 에스코트 속에 검은 지프차를 타고 시청(현 중구청)까지 카퍼레이드 했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교시절 동남아를 돌며 각종 대회에서 메달을 쭉쭉 따왔던 옥자는 건국대 1학년 때 아시아의 여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금메달을 따기 전에 투원반에서 동메달을 먼저 땄어요. 그 동메달이 처음 딴 메달이어서 그랬는지 나중에 딴 금메달보다 더 좋더라고요. 김포에서 시청까지 카퍼레이드 해주는데 그게 얼마나 좋던지 웃음이 멈춰지지가 않았어요.”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금메달 딴 사람들을 청와대로 불러 훈장을 주고 격려한 일이었다.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저더러 옆에 서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키가 제일 크잖아요. 멋쩍어서 계속 웃고 있었더니 박 대통령이 괜찮다며 당신 옆으로 오라고 하는 거예요. 옆에 갔더니 백옥자 아주 열심히 한다고 들었다. 선수들을 위해 청와대에서 직접 준비한 음식이니 많이 먹으라며 격려를 해주셨어요. 박정희 대통령께서 날 유난히 예뻐하셨거든. 테헤란 대회를 즈음해서 인간승리라는 TV프로그램에 출연했었는데 그걸 보시고 열심히 하라며 금일봉까지 주셨어요.”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이후 백옥자는 TV는 물론이고 오랜 기간 영화관 대한늬우스의 주인공이 된다. 흐르는 물처럼 세월은 흘러 세계 인구의 3분의 2를 구성하는 아시아인들의 스포츠 대제전이 돌아왔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4년을 준비한 대회였지만 이때 백옥자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신우염을 앓아 인천 동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터였고, 연습을 하다 한쪽 무릎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더 불안했던 것은 중공(중국)이 첫 출전을 하면서 체격조건이 백옥자보다 좋은 선수를 내보낸 것이었다.

저도 작은 키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중국선수를 보니까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거야. 내가 반밖에 안 되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북한선수가 나온다는 얘기도 있었고. 그러잖아도 긴장했는데 다리까지 다쳐 마취약 맞고 붕대 감고 나갔지요.”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그에게 하나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저격됐다는 뉴스였다.

대회 나갈 준비하고 있는데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져왔어요. 처음엔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꼭 금메달을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육영수 여사가 피격됐다는 뉴스로 우리나라 선수단 분위기는 많이 침체되며 우왕좌왕했고, 백옥자는 유명세 때문에 북한에 납치될 수도 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백옥자는 연습은커녕 숙소 안에서조차 조심스럽게 숨어다녀야 했다.

드디어 대회 당일. 육영수 여사에게 묵념을 올린 뒤 백옥자가 그라운드로 나갔다. 세계의 이목이 백옥자와 중국선수에게 쏠렸다. 아시아의 여왕은 중국에 자리를 내줄 것인가. 첫 출전하는 거인 같은 중국선수는 얼마나 던질 것인가. 백옥자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강렬한 태양빛에 눈이 부셨다. 하늘 위로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지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 육영수 여사……. 옥자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성모마리아님, 하나님, 부처님, 제가 꼭 금메달을 따게 해주세요. 그래서 슬픔에 빠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

호각소리를 들은 옥자가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슬픔과 두려움으로 우수에 젖어 있었던 것 같은 그 눈은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만화영화 주인공의 불타오르는 눈동자처럼, 옥자의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된 채 훨훨 불타오르고 있었다. 사람의 눈이 아닌 마녀의 눈이었다.

우우우우 으~!”

백옥자가 발끝에 남아 있는 영혼의 무게까지 실어 투포환을 던졌다. 쇳덩이가 테헤란의 창공을 향해 솟구쳤다. 전 세계의 시선이 작고 동그란 쇳덩어리에 집중됐다. 허공을 날아가는 쇳덩이가 태양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였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지점은 16미터 26센티미터 지점이었다. 중공선수의 기록을 넘어선 수치였다.

~! , , ! , , !”

대한민국 땅에 백옥자를 연호하는 함성이 메아리쳤다. 우리나라 전체가 떠나갈 것 같은 함성은 테헤란의 경기장에서도, TV 브라운관 앞에서도 메아리쳤다. 우승은 물론, 아시아 신기록이었다. 중국선수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그렇게 잘 웃던 백옥자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제서야 통증이 밀려왔다. 옥자는 한국선수단 관계자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며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3, 4차 시기에 16미터 20센티미터가 나왔어요. 그때 출전했던 중국선수가 지금 중국 육상 감독으로 있어요. 가끔 저를 만나면 당신 때문에 내가 졌다고 얘기하지요.”

백옥자가 이날의 영광을 얻기까지는 무수한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던 건 물론이다.

옛날 태릉선수촌 수영장 자리가 제 연습장소였어요. 어떨 땐 하루 천 번씩 던졌는데 그 언덕에 움푹 패인 자국이 있어요. 그걸 사람들이 백옥자 자리라고 부르더라고.”

백옥자는 연습벌레였다. 태릉선수촌의 기상시간이 6시인데 백옥자는 남보다 10분 먼저 나타나 연습을 시작하곤 했다. 이 때문에 운동장에 백옥자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으레 새벽 550분임을 알 수 있었다. 고통과 방황을 이겨내지 못한 영광은 없다. 백옥자는 누구보다 많은 아픔과 시련 속에서 영광을 일궈낸 주인공이다.

기록이 조금만 안 나오면 백옥자는 끝났다, 연애를 해서 그렇다, 뭐 별소리가 다 나와요. 그럼 정말 미치는 거야.”

잠자리에 들면 팔꿈치가 저리고 팔을 들지 못해 세수를 할 수도 없었다. 시합이 끝나면 하루동안은 온종일 누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온갖 보도를 내보내며 옥자를 힘들게 했다. 그럴 때면 태릉선수촌을 도망쳐나왔고, 또다시 잡혀들어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숨어서 더이상 운동 안 하겠다고, 시합도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운 적이 정말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이번에 인천아시안게임이 끝났는데 박태환 선수 기록 안 나오니까 끝났다 뭐다 하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야. 김연아 선수도 보세요. 언론에서 먼저 은퇴를 발표했잖아. 그래서 점수도 적게 나온 거예요. 선수가 기록이 안 나오면 왜 안 좋은가 먼저 과학적으로 분석해야 하는데, 언론에서는 백옥자는 항상 금메달 따야 하고 안 그러면 딴짓하고 있다고 보도하기 바빴죠.”

백옥자가 20대 중반 건국대 체육과 동기인 김진도(부천대 교수) 씨와 결혼했을 때도 언론에서는 결혼이 너무 이르지 않느냐는 등의 보도가 잇따랐다.

그런 일로 스트레스만 받지 않았어도, 올림픽에서도 메달 딸 수 있었을 거예요.”

1978년 은퇴한 백옥자는 5년간 인천체고 교사로 근무하며 아들 김호연(미국 프로골퍼)과 딸 김계령(프로농구선수)을 낳았다. 친정 식구들이 이민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수년간 살던 그의 가족은 1980년대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은퇴한 백옥자를 다시 부른 건 대한육상경기연맹이었다.

“1985년 미국에 있는데 육상연맹에서 전화가 왔어요. 우리나라에서 아시안게임을 개최하는데 나갈 선수가 없다구요. 1년간 열심히 했는데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법이지. 4위했어요.”

오랜 기간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과 서울 태릉선수촌을 오가며 살아온 백옥자 씨는 현재 서울 송파구에 터전을 잡았다. 자신의 이름을 딴 백옥빌라가 보금자리다.

이번 2014인천아시안게임 육상경기 심판으로 줄곧 아시아드경기장에 머물렀던 백옥자는 국내 체육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박태환은 좋은 선수라고 봐요. 금메달을 따지 못해서 그런데 어찌됐던 메달을 하나라도 따는 선두는 엄청 노력한 선수들이지요. 선수 자신은 뭐가 부족해서 금메달을 못 땄는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앞으로 연맹에서 어떻게 지도하고 뒷바라지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결정될 겁니다.”

운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대한 조언도 덧붙였다.

후배들에게 항상 얘기합니다.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이나 4년을 준비하는 것인데 이 기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항상 긴장하고 집중하라고. 특히 컨디션 조절과 몸관리를 잘하라고요. 자기관리가 정말 중요하거든요.”

지독히 가난했던 시절, 그래서 좋은 선수가 나올 수 없었던 시절, 인천에서 나고 자라 국민들의 우상으로 1960, 70년대를 풍미한 아시아의 마녀는 전성기 때에 비하면 몸이 줄었지만 여전히 큰 체구와 남자 같은 스타일은 그대로였다. 입가에 번지는 은은한 미소에서 이제 막 노년을 시작하려는 자상한 한국 여인의 모습이 피어나고 있었다.

 

 

金眞國. 인천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