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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지리지

배우 전무송 “연극의 나의 꿈”

by 김진국기자 2016. 9. 20.

 

어린 시절 뛰놀던 중앙시장과 양키시장의 추억

 

춘향아 너는 어띠하여(어찌하여) 변사또의 수텅(수청)을 거부했던 것이냐. 다토디동(자초지종)을 말해보거라.”

매화 두 송이를 꽂은 어사또 관모를 쓰고 부채로 입을 가린 아이가 대사를 뱉어내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고 녀석 참 야무지네.”

사내아이가 어쩜 저렇게 예쁘게 생겼을까?”

예쁘긴, 애어른 같은 걸.”

이목구비는 물론, 얼굴까지 동글동글한 아이를 보는 관객의 반응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극장에서 열린 학예발표회에서 이몽룡 역을 맡은 여섯 살배기 무송의 발음은 어눌했다. 그렇지만 대사 하나 틀리지 않았고 동선도 자연스러웠다.

영화유치원 병아리들의 연극이 끝나고 박수갈채가 터지자 무송의 큰어머니가 부리나케 무대로 달려나왔다.

어이쿠 우리 무송이 다 컸네, 다 컸어!” 무송을 얼싸안은 큰어머니는 무송의 얼굴에 뽀뽀를 퍼부었다. 아이의 얼굴이 발그스레해졌다. 정작 뛰어나왔어야 할 엄마 아빠는 객석에서 빙그레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큰아버지가 무송을 말에 태우고 중앙시장앞을 지나갔다. 말 등에 오른 무송은 개선장군처럼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또각또각 말발굽소리도, 옷가지와 생선, 과일 등을 앞에 놓고 흥정하는 시장 상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도 자신을 환영하는 음악처럼 들렸다.

내가 살던 집이 중앙시장과 가깝게 있었어. 송림초등학교 건너편 금곡동에 집이 있었는데 실은 큰아버지 댁에서 살았다우. 큰아버지는 중앙시장에서 마차를 끄셨지.”

배우 전무송은 축현초등학교와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중간쯤인 중구 내동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금곡동이다.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 부부가 그를 양자처럼 데려다 키운 것이다. 이 때문에 무송의 어린 시절 놀이터는 중앙시장이었다.

본래 야시장이었던 중앙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옷가지와 잡화를 파는 전통시장으로 변모한다. 설이나 추석이면 중앙시장엔 아이들 명절빔을 사러오는 사람들로 물결을 이뤘다. 지금은 한복가게, 이불가게 들이 즐비한 시장 뒤쪽 배다리철교 부근은 1960년대에는 교복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새 학기만 되면 까까머리소년과 단발머리소녀들이 넘쳐났다.

중앙시장 바로 옆엔 양키시장이 자리했다. ‘미제물품을 파는 시장이었다. 양키시장엔 럭스비누, 추잉껌, 치약, 캐러멜, 초콜릿 등 한국에선 생산되지 않는 물품이 가득했다. 이것들은 부평미군기지나 해안가에 상륙한 다국적군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생필품들이었다. 물자가 크게 부족하던 시절, 없는 게 없던 양키시장은 질 좋은 미제물건들로 인천시민들을 유혹했다. 그렇지만 전쟁 뒤의 슬픈 기억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전후로 미야마치혹은 혼마치라 불렸던 중구 본정통(本町通)위스키메리와 같은 미군클럽들이 문을 열었다. 지금의 신포동 일대가 본정통이었다. 미군클럽엔 미군들을 상대로 웃음을 파는 한국인 여급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미군들에게 술을 따라주고 대가로 받은 팁으로 생활하는 여성들이었다. 일명 양에레나로 불린 이들은 이따금 달러 대신 미군 생필품을 팁으로 받아 양키시장에 내다 팔았다.

부평미군기지와 같은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한국인 군무원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물품도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양키시장을 찾다보니 나중엔 부족한 양을 서울 이태원에서 공수하기도 했다. 신포동의 50, 60년대 미군클럽은 지금은 러시아나 필리핀 등 외국에서 들어오는 선원들이 찾는 시멘스클럽으로 바뀌어 여전히 성업 중이다.

중앙시장엔 큰 한증막도 있었어. 큰어머니가 가끔 나를 데려가셨는데 움막집 같은 한증막 안에서 사람들이 포대를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지금과 똑같았어. 뜨겁고 어두워서 무서웠지만 사우나가 끝나면 큰어머니가 사이다를 사주셨기 때문에 잘 따라다녔다우. 허허.”

7살 무송이 마신 사이다의 이름은 스타사이다였다. 1905년 신흥동 인근에서 창업한 인천탄산이 광복 뒤 경인합동음료()’로 이름을 바꾸며 만든 음료였다. 195059일 서울에서 칠성사이다가 나오기 전까지 스타사이다는 평양의 금강사이다와 더불어 우리나라 탄산음료의 양대 산맥이었다. 스타사이다는 1960년대 초까지 인천의 일간지 <인천신보>순당, 고급음료, 뉴 스타사이다란 광고를 게재할 정도로 칠성사이다와 경쟁하며 명맥을 이어나간다.

 

피란 갔다가 돌아와 축현초 4학년 복학, 야구선수로

 

큰집에 살던 무송이 다시 친부모와 합치게 된 때는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무송이 축현초등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집안은 충청도로 피란을 떠난다. 3년 만에 인천으로 돌아온 무송은 숭의동 집에서 친부모와 함께 살며 축현초등학교 4학년으로 복학한다.

전쟁 전 부모님이 숭의동 로터리 근처에 사두었던 집이 있었어. 그때 숭의로터리 한켠엔 영국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로터리 한가운데 기름탱크 저장소 같은 게 있었어. 주변엔 방공호도 2개 있었지.”

그가 기억하는 1950년대 초중반 숭의로터리에 대한 기억의 편린은 장안극장, 숭의병원, 경향버스회사, 우체국, 공설운동장 등이다. 로터리 부근에 개울이 흘렀고 그 개울을 건너는 독갑다리도 있었다. 그렇지만 무송이 즐겨 뛰놀던 장소는 신흥초등학교 강당 터였다. 전쟁 때 폭격을 맞아 새카맣게 불에 탄 강당 터에서 무송은 졸업할 때까지 야구를 한다.

전쟁을 치른 뒤 축현학교는 콘크리트 바닥이었어. 군인들 임시부대로 쓰기 위해 콘크리트를 씌웠던 거지. 인천중학교도 군인들이 점령해 전부 콘크리트를 쳐놓은 거야. 이 때문에 신흥에 더부살이를 하게 됐는데 본관 건물 뒤 첫 번째 건물은 축현이 빌려 쓰고 맨 뒷 건물에는 인천중이 들어갔지.”

4학년에 복학해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저만치서 누군가 무송을 불러 세웠다.

! 너 이리 와 봐.”

동급생에 비해 키도 크고 덩치가 좋은 녀석이었다. 무송이 쭈뼛쭈뼛 덩치에게 다가갔다. 덩치가 무뚝뚝하게 한마디 던졌다.

! 야구할 줄 알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무송에게 덩치가 야구글러브를 던져주며 공을 받아보라고 했다. 덩치가 던지는 공을 얼떨결에 받은 무송에게 덩치가 말했다.

너 끝나고 남아.”

무송의 찬란한 초등학교 야구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김흥국이라는 이름의 덩치는 일본에서 야구를 하다 귀국한 재일교포 자녀였다. 나이도 무송보다 두세 살이 많았다.

그때 송림, 창영, 숭의, 서린 등 인천의 초등학교엔 대부분 야구부가 있었어요. 창영과 송림 야구부가 좀 셌는데 우리한텐 안 됐지. 김흥국 볼이 워낙 빨랐거든.”

건물 주인인 신흥이 운동장을 빌려주지 않아 불 탄 강당 터에서 연습을 해야 했지만, 당시 축현 야구부는 전국을 제패할 정도로 막강했다. 2루수이자 톱타자였던 무송은 몸이 날래서 코치가 특별히 아끼는 선수이기도 했다. 한명회 역으로 유명한 탤런트 정진 역시 축현 동기로 당시 응원단장을 했다. 현재 인천 연고 프로야구팀인 SK와이번스가 강팀으로 군림하는 것은 인천이 야구를 처음 도입하고 여러 번 전국을 제패한 구도였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1899인천영어야학회학생들 사이에서 보편화된 운동으로 시작된 인천 야구는 항일 정서 속에서 성장한다. 1936, 1939년엔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 야구부가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우승했고 1950년대는 인천고, 동산고가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와 같은 전국 고교야구대회에서 잇따라 우승기를 가져왔다. 무송이 야구를 하던 시기는 그야말로 인천 야구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천의 웬만한 초등학교는 유행처럼 너도나도 야구부를 운영했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야구 유망주로 커 가던 무송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니,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다.

초등학교에서 야구 좀 하는 애들은 모두 동산중으로 진학했어. 그런데 나 때 축현 야구부는 모두 동인천중으로 가기로 약속을 한 거야. 우리가 잘하니까 동인천중에서 여러 가지로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했거든. 그래서 동기들은 몽땅 동인천중으로 갔는데 나만 못 가게 된 거야. 내 그때를 생각하면.”

무송이 인천중으로 진학한 것은 담임교사 때문이었다. 무송은 동인천중 진학을 원했는데 담임교사가 일방적으로 인천중에 입학원서를 낸 것이다.

운동을 했지만 공부도 5등 안에 들었거든. 선생님이 가라고 하시는데 거역할 수가 없잖아. 그때는 선생님들이 제일 존경받고 무서운 존재였으니까.”

야구는 하고 싶고, 선생님 말씀은 따르지 않을 수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무송은 어린 머리로 꾀를 짜낸다. 1950년대 중반께는 중학교도 시험을 봐서 들어가던 시기. 무송은 동기들에게 먼저 가서 자리잡고 있으면 내가 뒤따라 가겠다. 인중 입학시험에 일부러 떨어지면 되지 않느냐고 약속을 한다. 그러나 막상 시험을 보면서 무송의 생각은 바뀌게 된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그렇잖우. 시험문제를 딱 접했는데 아는 걸 틀리게 쓰기가 싫은 거야.”

 

야구부 없는 인천중 진학해 야구부 창설, 그리고 해체

 

무송이 인천중에 합격하자 아버지는 돼지를 잡고 막걸리를 받아 동네잔치를 거하게 연다. 결국 인중에 진학한 무송은 동인천중으로 간 축현 야구부 동기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눈총을 받으며 통학을 한다. 인중엔 야구부가 없었으므로 무송의 스트레스는 나날이 가중됐다. 친구들로부터 듣는 배신자란 소리와 아직까지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야구를 향한 열정이 끊임없이 무송을 다그쳤다. 1의 무송은 마침내 내가 우리 학교에 야구부를 만들고 말겠다는 맹랑한 결심을 한다.

야구를 향한 집념으로 불타는 무송의 눈빛처럼, 태양이 이글거리는 어느 날이었다. 무송은 운동장에서 2, 3학년 형들이 야구글러브를 끼고 공을 주고받는 모습을 목격한다. 무송은 콘크리트 지게를 내려놓은 채 움직이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인중 신입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군인들이 쳐놓은 콘크리트 바닥을 깨 학교 꼭대기로 옮기는 사역을 1년 정도 해야 했다. 지게를 내려놓은 채 죽 치고 지켜보던 무송을 향해 2, 3학년들이 말을 걸어왔다.

하고 싶으냐?”

반색을 하는 무송에게 글러브를 던져준 뒤 몇 차례 공을 주고받던 선배들이 말했다. “짜식 제법인데. 끝나고 캐치볼 하러 와라.”

선배들과 어울려 몇 차례 캐치볼을 하던 무송이 어느 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선배 형들에게 제안을 한다.

, 우리도 야구부 만들자.”

무송의 경력을 알게 된 선배들은 함께 체육선생을 찾아간다. 체육선생은 오케이를 했지만 문제는 교장 선생님이었다.

당시 교장이 길영희 선생님이셨는데 이 분이 허락을 해야지. 이 놈의 자식들, 공부는 안 하고 운동은 무슨 운동이야 하시며 자꾸 야단을 치시는 거야. 공부 핑계를 대시긴 했지만 내 생각엔 돈이 들어가니까 그러셨던 것 같아.”

교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자비로 야구부를 결성한다. 그러나 다른 학교 야구부 앞에서 인중 야구부는 오합지졸이었다.

한번은 축현 동기들이 가 있는 동인천중과 붙었어. 우리 투수가 배건부라는 형이었는데 그 형이 인중 유일한 투수야. 그러다 보니 초반엔 잘 던지다가도 3, 4회만 가면 기진맥진해서 헉헉대는 거야. 동인천중으로 간 김흥국은 1학년 때부터 주전을 했어. 김흥국이가 어느 정도였냐면 동산고에 신인식이라고 동산을 3년 연속 우승하게 만든 피처가 있었는데 실력이 비슷했어.”

인중 야구부 선수들은 하나같이 김흥국의 총알 같은 피칭에 얼어버렸다. 방망이를 들고 있다가 번트 한 번 대지 못하고 삼진으로 들어오는 타자들이 대부분, 아니 전부였다. 유일하게 무송만이 김흥국의 볼을 받아쳤는데 이는 김흥국이 초등학교 때 우정을 생각해 살살 던져줬기 때문이다.

김흥국은 나중에 동인천고로 안 가고 선린상고로 갔어. 거기 가서 1년인가 2년인가 전국을 제패했지만 너무 무리해서 나중에 어깨가 망가졌지. 그때는 코치들이 잘 던지는 선수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던지게 했거든. 무식했지.”

시합 때마다 ‘15대 빵, 20대 빵으로 깨지던 인중 야구부는 무송이 2학년이 되면서 결국 해체된다. 무송은 다시 시름에 빠진다. ‘이제 야구도 끝났고, 앞으로 무얼 해야 하나.’

무송은 결국 살 길은 공부밖에 없다고 판단, 인천의 양대 명문인 인천고와 제물포고를 두고 고민한다. 오랜 시간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한 학교는 인고도 제고도 아닌 인천기계공고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집안 형편이 대학 가기가 힘들어. 또 길영희 교장 선생님이 아침 조회 때마다 강조하신 말씀이 우리나라가 잘 살려면 산업이 발달해야 한다고 하셨거든.”

길 교장의 훈화시간. 앞에 선 친구의 머리와 등에서 스멀스멀 이가 기어다니는 게 보였다. 해머 모양의 DDT통을 들고 학생들 사이를 걸어 다니던 교사가 앞 학생의 머리에 칙칙 살충제를 뿌렸다. 안개비 같은 살충제를 뿌옇게 뒤집어쓴 친구는 시원하다는 듯 움직이지도 않고 교장의 훈화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교장의 훈화가 마이크를 타고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우리나라가 부강하려면, 하려면, 하려면, 공업 농업 어업이 발전해야 하고, 하고, 하고, 몸이 튼튼해야 합니다, 합니다, 합니다.”

그래, 공고로 가자. 기술을 배워서 나도 잘 살고, 나라도 부강하게 만들자.’ 그렇게 무송은 마침내 인천기계공고 기계과에 진학한다.

 

인천기계공고 밴드부로 보낸 3년의 세월

 

그때 인천기계공고는 깡패학교라고 그랬다고. 운동 좋아하고 싸움, 놀기 좋아하는 애들이 모이는 학교였지. 기계과, 건축과, 화학과는 좀 세긴 했지만. 아마 그때 자동차과도 처음 생겼을 거야.”

산업역군의 꿈을 안고 인천기계공고에 입학한 무송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선배들의 선택에 휩쓸린다.

입학해서 학교에 갔는데 3학년 형들이 조회 끝나고 1학년은 모두 남는다, 그러더니 우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거야. 바짝 얼어서 서 있는데 아주 멋있게 생긴 형이 다가오더니 너 이리 따라와하는 거야.”

무송을 찍은’ 3학년생은 그를 별관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팔과 피아노 등 갖가지 악기가 빼곡한 방으로 들어갔다. 밴드부 연습실이었다. ‘, 이거 잘못 걸렸다생각하며 괴로운 표정을 짓는데 3학년생이 눈을 부라렸다.

끝나고 안 오면 죽는다.”

근심에 쌓여 교실에 들어간 무송 앞에 이번엔 다른 선배들이 나타났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장딴지가 굵은 3학년생들이었다. 172센티미터로 당시로선 작지 않은 키였던 무송은 또 다시 선배들에게 찍힌다.

또 걸려서 따라가 보니까 이번에 럭비부인 거야.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지. 럭비라는 게 잘못하면 뼈도 못 추리는 운동 아냐, 그래서 내가 실은 저 밴드부라고 하는데 시끄러 이 새꺄!’ 그러는 거야.”

럭비부로 가면 죽는다고 생각한 무송은 차라리 밴드부에 들어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다.

인천기계공고엔 밴드부, 럭비부를 비롯해 여러 동아리가 있었고 각 동아리는 좋은 후배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신입생만 들어오면 피 튀기는 쟁탈전을 벌이곤 했다.

신입생 데려오기 쟁탈전에서 승리, 무송을 차지한 곳은 밴드부였다. 밴드부 군기는 군대보다 더 센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음악실로 가야 했고 공부는 수업시간에 듣는 게 전부였다. 다음날 악기에 지문이 남아 있으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으며, 방학 때는 아예 학교에서 합숙하며 연습을 했다. 밴드부원이 된 게 좋았던 시간은 여학교 앞에 가서 유니폼을 입고 멋지게 나팔을 불 때뿐이었다.

인천시에서 중고등학교 체육대회 같은 걸 열거든. 그럼 각 학교 밴드부들이 가서 뿡짝거리잖아. 그럼 우린 인천여상 응원해주고, 인고 애들은 인천여고 응원하고 그랬지. 괜히 유니폼 입고 여학교 앞에 가서 왔다 갔다 하면 여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지.”

밴드부가 합숙할 때는 당연히 학교에서 먹고 자고 해야 했다. 당시 독정이고개를 비롯해 학교 주변은 중국인들의 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학생들은 밤이면 중국인 밭에 몰래 들어가 시금치, , , 당근 같은 것을 서리해 먹으며 방학을 났다.

중국인들은 밭을 아주 깨끗하게 잘해놨어. 그런데 군데군데 거름으로 쓰기 위해 인분을 모아놓은 곳이 있어요. 서리하러 갔다가 잘못하면 거기 빠져. 근데 그게 그렇게 재밌었어.”

방학이 끝나면 학교 정문 앞엔 어김없이 중국인들이 찾아와 시위를 벌였다. 그럼 교사들이 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하거나, 간신히 달래서 보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산업역군의 꿈을 안고 들어갔다가 딴따라가 돼버린 고등학생 무송은 이따금 중학교 때의 일을 회상하며 갈등에 빠진다.

중학교 때 가끔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올라가 수채화를 그렸거든. 여학생들 지나가면 진짜 화가처럼 괜히 폼 잡으면서 더 열심히 그림을 그리곤 했지.”

이따금 학교 옆 만국공원에 오른 무송은 이젤을 촤악 펼친 뒤 세일러의 꿈을 그려나갔다. 타이타닉 호 같은 커다란 배가 ~하고 입출항을 할 때면 저 배에 올라 미지의 세계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처럼 솟아올랐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검푸른 바다 위로 세계 곳곳을 항해하는 뱃사람을 꿈꾸던 무송은 해군사관학교 진학을 결심한다.

이런저런 꿈도 많고 생각도 많았지만 밴드부 생활로 꼬박 3년을 보낸 무송은 졸업을 앞두고 철도청 인천공작창에 수습사원으로 입사한다. 시력이 나빠지면서 해군사관학교 진학을 포기한 터에 기계과 교사가 그를 취직시켜준 것이다.

인천공작창은 철도부속품을 가공하거나 수리하는 공장으로 동구 송현동 66번지에 자리했다. 며칠간 근무를 하며 테스트에 합격한 무송은 정식 직원으로 채용된다. 인천공작창은 낮과 밤, 새벽으로 나누어 3교대로 근무하는 곳이었다. 무송의 업무는 철도에 들어가는 볼트와 너트를 깎는 일이었다. 말이 깎는 일이지 쇳덩이를 기계에 물리기만 하면 자동으로 깎아줬으므로 제대로 깎이는지 지켜보기만 하면 됐다.

야근을 하게 된 어느 날, 어느 정도 일에 익숙해진 무송이 쇠가 깎이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바이트에 물린 쇳덩이가 천천히 돌아가며 점점 볼트의 모양을 갖춰갔다. 쇳덩이는 똥을 싸듯 기계 아래로 쇠톱밥을 툭툭 떨어뜨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쇠톱밥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수북이 쌓여갔다. 톱밥이 어느 정도 쌓이자 무송이 발을 놀려 쇠톱밥더미를 흐트러뜨렸다.

쇠톱밥을 바닥에 헤쳐놓는데 갑자기 벌거죽죽한 빛깔이 눈에 들어왔다. 맨 아래 쌓여 있던 쇠톱밥이 벌겋게 녹이 슬며 내뿜는 색이었다. 어디선가 둔탁한 무엇이 날아와 하고 머리를 때렸다. 만화영화의 한 장면처럼, 바닥의 녹슨 쇠톱밥들이 수백 명의 전무송으로 변신해 상처를 입은 채 신음하고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내가 기계에 깎여 녹이 슬어가는 쇠톱밥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기계의 부속품 같은 생각도 들고.”

너 뭐하니, 뭐 하고 있는 거니? 니가 여기 있어야 해? 대체 몇 살인데 이렇게 앉아 있는 거지?’ 어디선가 무송을 나무라는 환청이 들려왔다. 이어 야구복을 입고 푸른 하늘로 공을 날리는 야구선수 전무송과, 파이프를 입에 물고 새하얀 세라복을 입은 채 바다를 항해하는 전무송의 모습이 눈앞으로 휙휙 지나갔다. 그러나 그 두 가지의 꿈 모두 이제 막 성인이 된 무송에겐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었다. 며칠을 괴로워하며 고민하던 무송의 머릿속에 번쩍 하고 친구들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넌 반반하게 잘생겼으니까 나중에 배우나 해라.’

 

첫 직장 인천공작창나와 배우 지망생의 길로

 

첫 직장을 그만둔 무송은 극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배우들이 어떻게 연기하는가 보기도 하고 시간을 때우기에도 극장은 최고의 장소였다. 당시 인천 중동구 지역엔 10개가 넘는 영화관이 번성하고 있었다. 개봉관은 동방, 키네마, 애관, 인현극장 정도였는데 동방과 키네마는 주로 외화를, 애관은 방화를 상영했다. 이와 함께 인현, 장안, 세계, 자유, 현대, 미림, 오성, 피카디리 극장 등은 2편을 동시에 상영하는 재상영관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60년대, 극장은 실업자들의 천국이었다. 가끔 필름이 끊겨 암전이 오고, 20, 30도 기울어진 스크린을 감수해야 했지만 동시상영하는 극장에 들어갈 경우 서너 시간은 후딱 지나갔고 한 번씩 더 보면 한나절이 지나갔다.

군것질거리를 담은 나무상자를 천으로 묶어 목에 걸고, 상자 옆을 손바닥으로 탕탕 두드리며 오징어 있으아~ 땅콩 있으아!” 하고 악을 쓰듯 소리치는 극장 안 판매원도 60, 70년대에 볼 수 있던 극장 풍경이다. 동시상영 하는 극장들의 경우 필름값을 아끼기 위해 극장끼리 필름을 맞바꿔가며 상영을 하기도 했다. 극장직원들이 자전거에 필름을 싣고 이 극장에서 저 극장으로 옮겨다니는 시간 동안 관객들은 멍하니 기다려야 하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지금은 영화제작비용의 30퍼센트를 홍보마케팅 비용으로 사용할 정도지만 당시 영화홍보는 극장간판이 전부였다. 대부분의 극장들은 극장간판을 그리는 장소를 극장 옆에 두었는데, 한 예로 중구 외환은행 자리에 있던 키네마극장의 경우 지금의 주차장이 극장간판을 그리는 작업장이었다. 학생들은 이 작업장이나 화장실과 같은 개구멍을 통해 몰래 극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극장에선 이따금 귀를 잡힌 학생들이 밖으로 끌려나오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이 사복을 입고 몰래 들어갔다가 선도교사에게 적발돼 끌려나오는 것이었다.

인천의 옛 극장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 인천엔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관들이 성업 중이다. 멀티플렉스들은 나무상자에 담은 오징어 땅콩 대신 극장 안에 현대적이고 깨끗한 라운지에서 팝콘과 콜라를 팔며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 다만 1895년 협률사란 이름으로 등장한 중구 경동의 애관극장만은 독자적 멀티플렉스로 변신해 고군분투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부평지역엔 대한극장 정도만 남아 있다. 추억의 영화관은 사라졌으나 인천의 경우 지자체가 세운 영화공간주안이라는 예술영화상영관을 운영함으로써, 영화도시 인천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영화를 보지 않을 때면 무송은 유명한 배우의 이야기가 실린 잡지를 뒤적였다. 어느 배우는 어떻게 스카우트 됐다더라, 어느 배우는 어떻게 배우가 됐다더라 하는 유의 기사들은 무송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쩌다 용돈이라도 생기면 충무로 태양다방에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어느 감독이 스카우트 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갔던 건데 누구 하나 안 쳐다보더군. 그때 충무로 다방엔 나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많이 있었지. 그렇게 헤매고 있는데 최성연 선생이 서울의 한국배우전문학원을 찾아가보라고 추천을 해준 거야.”

 

개항과 양관역정의 저자 소안 최성연 선생과의 인연

 

소안(素眼) 최성연(崔聖淵·1914~2000) 선생. 그는 인천 출생으로 1959년 인천향토사 책인 개항과 양관역정을 쓴 시조시인이다. 기자, 영화제작자이기도 했던 최성연 선생과 전무송은 어떤 인연으로 만났던 것일까.

그 얘기를 하려면 다시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야 해. 내가 인천중에 입학한 뒤 걸어서 통학을 하는데 어느 날 여고생 누나들 셋이 날 따라온 거야. 인천여고를 다니는 누나들이었는데 우리 집 안까지 따라들어왔다우.”

길거리에서 키가 크고 잘생긴 무송을 본 인천여고생들. 나뭇잎 떨어지는 것만 보고도 꺄르르 웃어대는 나이였다. 세 명의 여고생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더니 무송을 졸졸 따라왔다. 불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 한참 가다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면 여고생들은 자신들도 멈춘 채 키득거리며 무송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숭의동 집까지 따라온 여고생들은 무송의 집 안에까지 쑥 들어왔다. 무송의 아버지가 아들을 따라 들어온 여고생들과 무송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송이 난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데 그중 한 여학생이 다른 여학생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얘가 쟤(무송)를 동생 삼고 싶대요.”

무송의 아버지가 짐짓 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 아들 귀한 녀석이라 맨입으로는 안 되는데.”

여고생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저희가 맛있는 도나쓰 사드릴 게요.”

도넛과 단팥죽. 그 시절 인천엔 학생들이 즐겨 찾는 최고의 간식장소인 인천도나쓰집이 있었다. 기독병원 옆 골목 판잣집을 개조한 인천도나쓰집엔 도넛과 젠사이’(단팥죽을 당시엔 일본어로 그렇게 불렀다)를 먹으려는 학생들로 바글바글했다. 초코시럽을 뿌린 가운데가 뻥 뚫린 동그란 도넛은 학생들에게 차라리 환상이었다. 우동냄비와 냉면, 볶음밥도 이 집 주요 메뉴였다. 인천도나쓰 집은 중고생들의 은밀한 데이트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엔 중고생들이 갈 곳이 더더욱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분식집이 훌륭한 만남의 장소였던 셈이다.

그때부터 인천여고 삼총사는 무송을 마스코트처럼 데리고 다녔고, 장남이라 의지할 형이나 누나가 없던 무송도 인천여고생들을 친누나들처럼 잘 따랐다. 그 여고생들 중 한 명의 아버지가 바로 소안 선생이었다.

잘 아는 동생이 연극을 배우고 싶어한다는 딸의 얘기를 들은 소안 선생은 무송에게 서울의 한국배우전문학원을 찾아가라고 말해준다. 당시로선 최고의 배우양성소였던 곳이다. 학원을 찾은 무송에게 김인걸 원장이 말했다.

내일부터 나와라.”

한참을 쭈뼛거리던 무송이 입을 열었다.

, , 그런데 돈이 없습니다, 나중에 갚으면 안 될까요?”

무일푼으로 어렵게 들어간 학원을 그만둔 건 1년도 안 돼서다.

“6개월을 다니는데 도저히 양심상 못 다니겠는 거야. 배우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수업료 내는 날만 되면 괴로워 죽겠더라고. 그래서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겨 나중에 오겠다고 말씀 드리고 포기를 했지.”

무송이 학원을 그만두고 또 다시 방황을 시작하자 소안 선생이 그럼 자신이 일하는 사무실에 나오라고 말한다. 소안의 사무실은 지금의 중구청 앞 바그다드카페 자리에 있었다. 당시 서울신문인천지사장이던 소안 선생은 바그다드 카페 자리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인천지역에 서울신문을 배급하는 책임자였다. 서울신문 보급소가 생기기 전까지 이 자리는 소금생산 유통을 담당하던 염업사무소였던 곳이다.

서울신문 인천지사에서 일하게 된 청년 무송은 매일 아침 일찍 동인천역으로 나가 서울서 내려오는 신문 뭉텅이를 확인한 뒤 이를 배달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이따금 무송 자신도 신문을 돌렸지만 배달원들을 관리하고 수금을 하는 총무일이 주 업무였다.

서울신문을 돌리는데 가는 곳마다 신문사절이란 글씨가 써 있어. 관보니까 안 보겠다는 거였지. 그럼 그거 떼내고 다시 신문 넣고 그랬어. 그러다 보니 수금이 안 되는 거야. 운영이 어려우니까 겨울엔 사무실에 있는 구멍탄 난로 위에 호떡을 구워 식사를 해결하곤 했지.”

지금 신문은 SNS와 방송 등 뉴미디어에 밀려 경쟁력을 잃고 있다지만, 예전에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돈을 내고 신문을 보려고 하지 않았고, <서울신문>과 같은 관보는 더더욱 거부했다. 그렇지만 인천으로 내려오는 신문은 한 장도 남김없이 거의 다 소비됐다. 주 소비자는 다름 아닌 시장상인들이었다. 왼쪽 겨드랑이에 수십 부의 신문을 잔뜩 끼고 신문이요! 신문이요!” 하고 외치고 다녀봐야 팔리는 건 몇 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남은 신문들은 신포시장이나 중앙시장과 같은 시장으로 들어갔다. 시장상인들이 신문을 구입한 건 포장지로 쓰기 위해서였다. 두부, 콩나물은 물론 어리굴젓, 조갯살, 생선에 이르기까지 당시 신문은 최고의 식품 포장지였다. 그뿐인가. 신문은 훌륭한 화장실 휴지 대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흔하면서 귀한 것이 신문이었다.

 

신문보급소 총무일 하며 영화, 연극계 기웃거려

 

신문보급소에 다니며 틈틈이 영화를 보던 무송은 어느 날 극장 안에서 서라벌예대로 진학해 연극을 하는 친구를 만난다.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친구가 무송에게 제의를 해온다.

너 잘 됐다, 나랑 같이 연극 안 할래?”

그 친구가 2학년이 되면 <용감한 사람들>이란 연극을 해야 하는데 함께 하자고 하는 거야. 귀가 솔깃해지더라구.”

무송은 그 친구를 며칠 뒤 신포동 아이스께끼집에서 다시 만난다. 빵과 함께 맹물에 주스가루를 넣어 그대로 얼린 아이스께끼를 파는 집이었다.

연극에 참여할 또래 예닐곱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연극지망생 청년들은 프린트한 대본을 나눠 갖고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때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회의가 끝날 때쯤 발생했다.

회의가 끝나고 하나둘 아이스께끼 집을 빠져나가는데 아무도 돈을 내지 않는 것이었다. ‘~? 저러면 안 되는데제일 늦게 나가게 된 무송은 주머니를 탈탈 뒤져보았지만 먼지만 나왔다. 당황한 무송이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시계를 풀었다. 소안 선생의 딸, 그러니까 누나가 졸업식 날 선물해준 시계였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 술집에서도 분식집에서도 돈 대신 시계를 잡히는 일이 잦았던 시대였다.

사무실로 들어간 무송은 소안 선생을 쳐다보지 못한다. “너 왜 그러니?”라고 물어오는 소안 선생에게 무송은 선생님, 사실은 친구들이 연극을 하자고 해서라고 입을 뗀 뒤 이러쿵저러쿵 하다가 시계를 맡겼다고 이실직고를 한다. 그때까지 무송이 젊음의 객기로 연극을 하겠다고 나섰다고 생각했던 소안 선생은 안주머니에서 티켓 2장을 꺼내준다. 티켓에는 <햄릿>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KBS가 남산에 있을 땐데 그 앞에 드라마센터가 생기면서 개관공연으로 <햄릿>을 한 거야. 서울역에서 내려 물어물어 찾아갔지.”

드라마센터에 들어선 무송의 입이 딱 벌어졌다. 드라마센터는 원형극장으로 그때까지 무송이 보던 극장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극장이었던 것이다. 화려한 세트의 원형극장을 오가며 죽느냐, 사느냐를 외치는 배우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번쩍이는 의상들. ‘세상에 이런 곳도 다 있었구나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극장에서 눈부시고 아름다운 배우들을 목격한 무송은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연극에 깊이 빠져든다. 2장의 표를 갖고 있던 무송은 다음날도 햄릿을 보러 드라마센터로 향한다.

? 이거 다음날 보니까 주인공이 달라졌네? 그런데 더 멋있는 거야. 무대 위에서 칼을 획획 휘두르는데 영화하고는 정말 다르더라고. 대사는 어찌나 멋있던지 귀에 쏙쏙 들어오고. 박진감, 생동감이 정말 대단했지.”

첫날 주인공은 김동원이었고, 둘째 날은 훗날 KBS 피디가 된 최상현이 출연했다. 장민호, 황정순 씨도 볼 수 있었다.

그래, 난 이걸 해야 한다.’ 커튼콜이 끝난 뒤 굳게 마음먹고 극장을 나오는데 호호, 공연 처음 봤어요?” 하며 누군가 팸플릿을 내밀었다. 드라마센터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소안 선생의 셋째 딸이었다.

인천으로 내려오는 경인철도에서 팸플릿을 유심히 보던 무송의 눈에 한국연극연구소(드라마센터) 부설 연극아카데미 학생 모집이란 문구가 들어왔다.

소안 선생을 찾아간 무송은 연극아카데미 오디션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소안 선생은 그럼 유치진 선생을 찾아가라고 조언한다. 유치진 선생은 당시 한국연극연구소 소장이었다.

니가 전무송이냐? 괜찮구나. 열심히 해라.”

소안 선생으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은 유치진은 무송을 합격시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안과 유치진은 한국전쟁 때 알게 돼 연락을 하고 지내던 사이였다.

입학은 했지만 역시 돈이 문제였다.

등록금이 서라벌예대와 똑같았는데 돈이 있어야지. 그때 막내이모부가 경향버스 사장이었어. 한 학기 등록금 4만 원을 빌렸지. 한 가족이 한 달 1~2만 원으로 살던 시절이야.”

 

이모부에게 등록금 빌려 드라마센터 1기 입학

 

19624월 전무송은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 1기에 입학한다. 드라마센터는 훗날 서울예술전문대학으로 이름을 바꿨고 지금은 서울예대로 불리고 있다. 그때 함께 입학한 동기들이 신구, 민지환, 이호재, 김기수, 반만희(반효정) 등이다. 그렇게 인천에서 통학하며 1학기를 마치고 학년말 공연하는 연극발표회 시간이 다가왔다. 그간의 학습상태를 돌아보고 배우로서의 소질을 평가하는 공연이었다.

두 시간에 걸친 유치진의 작품 <>가 끝나고 막이 내려갔다. 연출을 지도했던 오사량 선생이 출연자들을 무대에 한 줄로 쭉 세웠다. 무대에 올라온 선생은 성큼성큼 전무송 앞으로 걸어갔다. 오사량 선생이 전무송 앞에 멈추는 순간, 무송은 양 볼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 불꽃싸대기를 날린 것이다.

야 이 자식아! 너 때문에 연극 망쳤어. 네깐 놈이 배우가 되겠다고? 그게 깡패 걸음걸이지, 농부 걸음걸이냐? 넌 틀렸으니까 가서 깡패짓이나 해 임마!”

전무송이 <>에서 맡은 역할은 술 한 잔 걸치고 천천히 걸어가며 여보게 국서, 우리 집 타작은 모레니까 오게, 내 실컷 술대접 할 테니라고 말하는 단역이었다.

뒷풀이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가기 위해 센터를 빠져나왔다.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눈물인가, 눈발인가. 무송의 얼굴로 주르륵 물기가 흘러내렸다. ‘틀렸어! 틀렸어! 틀렸어!연출 선생의 틀렸어란 말이 비수가 되어 무송의 심장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남산을 내려와 서울역 대우빌딩 앞에 닿았을 때 허름한 포장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무작정 포장마차로 들어간 무송이 막걸리를 시켰다. 김치 한 쪼가리를 안주 삼아 벌컥벌컥 들이켠 무송은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눈깨비는 굵은 눈발로 바뀌고 있었다. 누가 보건말건 무송은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칭찬을 들을 줄 알았는데 불이 나도록 뺨을 맞고 나니 눈 내리는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앞이 캄캄했다.

난 열심히 했는데, 난 게으르지 않았는데. 연극을 반대하는 아버지 어머니께 3년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는데.’

서울역 대합실까지 어떻게 걸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대합실 의자에 쭈그리고 앉은 무송의 눈두덩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만둘까? 아니 겨우 1년 만에 그만둘 수는 없다. 그러나 안 돼, 틀렸다고 하시잖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갈등하던 무송의 머릿속으로 문득 고등학교 때부터 자신에게 자상했던 한 선배가 떠올랐다. 자하문 밖에 살고 있는 선배는 집에 가기 싫으면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사내자식이 그렇게 용기와 배짱이 없어서 어떡하냐. 뭐 때문에 틀렸는지 알아내 해결하면 됐어가 될 거 아냐.”

선배와 함께 밤늦도록 술을 마신 무송이 다음날 집을 나섰다. 밤새 내린 흰 눈이 골목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노랗고 까맣게 보이던 하늘은 새파란 빛깔을 띠고 있었고, 햇빛은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찬란한 빛깔로 무송을 비추었다. ‘그래, 더 열심히 하자.’

방학이 끝난 뒤 무송은 아예 드라마센터에 들어가 살게 된다. 부모님이 계시는 인천에 있기가 괴로웠고, 통학하는 시간을 줄여 더 열심히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짐을 싸 올라온 것이다. 무송은 사무실 옆 층계 밑, 조그만 방에서 기거했다. 단원들이 탈의실로 쓰는 곳이었다. 끼니는 동기들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훗날 KBS 탤런트가 된 민지환도 무송과 함께 방을 썼다.

드라마센터가 창단 기념공연 <마의태자>를 준비하고 있을 때다. 장마철이라 후텁지근하고 끈적끈적하여 불쾌지수가 최고조로 이르고 있었다. 연습이 끝나자마자 단원들이 우르르 집으로 귀가했다. 잠자리에 누운 무송이 현기증을 느꼈다. 점심을 먹지 못한 탓이었다. 점심은커녕 저녁까지 건너뛰었으므로 3일 하고도 두 끼를 굶은 셈이었다. 전무송이 조용히 누워 있는데 민지환이 들어와 몸을 흔들었다.

무송아 자니? 배고프지?”

무송은 대답하기가 싫었다. 눈을 감은 채 무송이 말했다.

형 나 건드리지 마, 에너지 소모돼.”

머쓱해진 민지환이 자리에 누웠다. 무송은 막상 말은 뱉었는데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민지환 역시 굶은 건 마찬가지였다. 무송이 머리를 돌려 슬며시 민지환 쪽을 쳐다보았다. 날이 더운데도 그는 추운 사람처럼 등을 돌린 채 몸을 말고 있었다. 남자의 등이 가녀리게 들썩였다. 무송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여러 개의 북소리가 한꺼번에 울리듯, 창밖에서 굵은 빗줄기가 대지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 훌륭한 배우일까

 

<마의태자> 주인공은 영화배우 김진규로 정해졌다. 전무송은 언더스터디(대역)를 맡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전무송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든다. 영화배우로 잘 나가던 김진규는 1주일에 한 번 정도 나오는데, 그 마저도 빠지기 일쑤였다. 공연 1주일을 남겨놓고 김진규가 말했다.

이번 공연 네가 하는 게 어떠냐?”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전무송이 표정관리를 하며 말꼬리를 얼버무렸다.

그거야 뭐.”

나는 속으로 좋아죽겠지.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우. 내 딴에는 두 달간 공연하면 한 번쯤은 주인공 시켜주겠지 하고 생각하며 열심히 한 거야.”

공연은 잘 끝났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전무송에게 말할 수 없는 고독과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온 열정과 영혼을 바쳐 작품을 하고 내려온 배우들에게 흔히 있는 현상이었다. 외로움과 굶주림 속에서 집에도 안 가고 드라마센터 안에서 비틀거리는 전무송을 보다 못한 유치진이 김진규에게 말했다.

얘 좀 데려다 먹여 살려라.”

그렇게 2년간 김진규 집에서 얹혀살던 전무송은 1966년 군에 입대, 6910월 제대한다. 1971년 결혼을 하고 드라마센터 조교로 일하게 된 전무송은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조교생활은 학생들 커리큘럼에 맞춰야 했으므로 방학 때는 적은 월급마저 나오지 않았다.

첫 딸 현아가 태어났는데 아내는 젖이 말라 있었다. 당장 아기에게 먹일 우유값이 필요했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결혼반지는 전당포에 간 지 오래였다. 하릴없이 연습장에 나가려고 문을 나서는데 아내가 졸졸 따라오더니 한참을 망설인다.

왜 그래?”

피아노를 팔면 어떨까요?”

무송은 그래라고도 안 된다고도 말하지 못한 채 그 특유의 연민어린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피아노는 아내가 시집올 때 가져온 가보1호였다. 피아노가 들어오던 날 아내는 피아노 건반을 하나하나 누르며 행복한 모습으로 노래하듯 지저귀었다. 인천여상 다니던 시절, 음악을 좋아해서 피아노가 너무도 갖고 싶었다고. 그래서 그때부터 저축해 마련한 피아노였다고.

부모의 바람을 뿌리치더니 이제 처자식에게마저 아픔을 줘야 한단 말인가.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이 징글징글하게 보였다.

에잇! 나 연극 안 한다. 이제부터 장사할 거야.”

무송이 대본을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깜짝 놀란 아내가 대본을 집어들며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연극배우와 결혼했지 장사꾼하고 결혼한 게 아니에요.”

한마디 던지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아내가 대본을 건네주더니 집안으로 들어갔다. 대본을 들고 있는 전무송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다시 대본을 움켜쥐고 집을 나선 무송이 역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무송의 머릿속으로 아내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메아리쳤다.

나는 연극배우와 결혼했지 장사꾼 하고 결혼한 게 아니에요.’

며칠 뒤 피아노가 실려나갈 때 아내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전무송은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반드시 훌륭한 연극배우가 되겠노라고 다짐한다.

전무송은 이후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연극을 하며 점차 연극계의 떠오르는 별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1975년 국립극단 단원으로 스카우트된 전무송은 5년 뒤 국립극단을 나와 소속 없이 활동한다. 그런 그에게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와 같은 연극과,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같은 영화 출연 제안이 줄을 잇는다. 점차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된 전무송은 마침내 국민적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후배 중에 지금은 고인이 된 조일도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걔가 서울서 활동을 했어. 그런데 어느 날 형 내가 먼저 인천 가서 연극할 거니까 뒤따라 오슈 하는 거야.”

언젠가는 고향 인천에 소극장을 만들어 좋은 작품을 올리고 싶었던 전무송은 서울에서 활동을 하며 고향에서의 연극을 위해 잠깐 내려온다. 조일도는 사람을 모아놓고 전무송의 인중 담임이었던 국어교사 최승렬 선생과 최성연 선생을 고문으로 모신다. 그때 만든 극단이 바로 집현이다. 집현의 첫 작품은 <리어왕>이었는데 지금은 시민공원으로 바뀐 주안시민회관 무대에 올렸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극단 집현엔 지금도 열정이 넘치는 전무송의 연극후배들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무송은 연극과 영화, TV를 넘나들며 왕성한 배우생활을 해왔다. 현재 고양시 행신동에 살고 있는 전무송은 가끔 고향 인천을 찾아 후배들을 만나고 추억이 서려 있는 길을 산책하기도 한다.

인천은 옛날부터 예향이라고 하지 않았어, 훌륭한 예술가들을 많이 배출해낸 도시이지. 그런데 지금은 인천예향의 훌륭한 정신이 어딘가 안 보이게 묻혀 있는 것 같아. 고향 선후배들이 그걸 좀 찾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나 역시 내 고향 연극발전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어요. 줄리어드 음대와 같이 그 분야의 알아주는 기관을 만들어 후배들과 함께 연구하고, 부단한 연습을 하며 좋은 배우를 만들어냈으면 좋겠어.”

배우생활만 반세기를 해온 전무송은 지금도 자신이 좋은 배우인지는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드라마센터에 있을 때 한번은 술을 먹고 난동을 피운 적이 있어. 연극이 제대로 안 돼서 연출과 갈등을 겪었을 때지. 그때 유치진 선생이 나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시더군. ‘무대에 제대로 서려면 10년이 걸린다. 무대에서 제대로 말을 하려면 또 다시 10년이 걸린다. 그런데 너는 이제 겨우 시작하는 놈이, 너는 무대에 서면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너는 민들레 씨앗처럼 우리나라 연극의 씨를 뿌려라.’ 그렇게 하신 말씀이 나한테 평생 숙제가 됐어요. 내가 훌륭한 배우가 못 되면 내 숙제를 다 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해. 훌륭한 배우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내가 무덤에 들어갔을 때나 알게 될 것 같아. 누군가 내 무덤에 찾아와서 훌륭한 배우였다고 하면 다행이고, 그런 말 없이 짜아식 잘 죽었다 하면 아직 덜 된 거겠지.”

전무송 선생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수에 젖은 그의 눈동자로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칠순을 넘긴 배우가 천천히, 따뜻한 원두커피 잔을 들었다. 그가 한평생 걸어온 배우의 향기와도 같은 구수한 커피향이 카페 가득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金眞國 <저작권자 ⓒ 황해문화, 이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