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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지리지

송창식 "노래는 나의 꿈 나의 고향"

by 김진국기자 2016. 9. 17.

어린 시절의 추억 긴담모퉁이

 

긴담모퉁이를 돌아가면 엄마가 있을 것만 같았다. 긴담모퉁이 담벼락에 피어난 개나리처럼, 화사한 웃음으로 창식아하고 부르며 달려와 와락 끌어 안아줄 것만 같았다. 모퉁이를 따라 몇 십 바퀴를 돌았던가. 벚꽃처럼 부서져 흩날리던 봄 햇살은 사라지고 하늘이 시나브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던 사내아이는 때에 절어 딱딱해진 옷소매로 쓰윽 눈물을 훔쳤다.

우두커니 서서 초저녁 하늘을 바라보던 아이가 털썩, 모퉁이 한쪽에 주저앉았다. 아이는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냈다. 삼촌이 군에 입대하며 선물한 것이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팔 베고 스르르 잠이 듭니다

아이가 <섬집아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뿜어내는 멜로디가 오선지처럼 길게 뻗은 긴담모퉁이를 따라 흘러갔다. 하모니카 음계는 하나 둘, 검푸른 밤하늘로 올라가더니 크고 작은 별이 되어 반짝였다.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에선 전쟁 때 전사한 아버지의 얼굴이, 생계를 위해 어디론가 떠나간 엄마의 얼굴이 코흘리개 아이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일곱 살배기 창식에게 배고픔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엄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아버지가 6·25 때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하신 뒤 어머니는 저와 여동생을 할아버지 댁에 맡기고 집을 나가셨어요.”

1970년대 국민가수 송창식.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초반부터 여동생과 함께 할아버지 집에서 성장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를 키운 8할은 인천의 바닷바람이었다.

우유와 쌀 가루를 배급으로 타먹던 신흥초등학교, 동네 친구 녀석들과 제기 차고 연을 날리던 팔팔로, 공부와 노래에서 재능을 드러냈던 인천중학교, 질풍노도의 시기에 만난 동인천의 별음악감상실, 음악적 영감을 얻었던 해광사, 콩쿠르대회의 추억을 간직한 인천여상 강당인천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은 그의 노래에, 또 그의 인생에 깊이 용해돼 있다. 고향 인천의 아이콘들은 지금도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며 음악처럼 살아갈 수 있는 힘으로 그를 받쳐주고 있다.

본적지는 전동인데 태어난 곳은 답동이예요. 신흥동으로 이사한 건 제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쯤이었어요. 긴담모퉁이가 있는 동네였지요. 그때부터 세시봉에서 노래를 부르기 전까지 쭈욱 신흥동에서 살았어요. 송도고등학교 옆 넓은 땅이 본래 우리 집이었지요. 그런데 6·25 때 피란 다녀온 사이에 군부대로 바뀌어 있더라고요.”

송창식은 인천시 중구 답동, 지금의 송도중학교(구 송도고등학교) 옆 가옥에서 1947년 태어난다. 그때만 해도, 아니 한국전쟁이 나기 전까지 그의 집안은 너른 땅뙈기를 갖고 몇 대의 트럭을 굴리며 운수업을 하던 비교적 넉넉한 집안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고 가족들이 제주도로 피란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 그 땅은 군부대가 돼 있었다. 북파공작원을 양성하는 육군첩보부대HID였다.

피란을 다녀오니까 우리 땅에서 무섭게 생긴 군인 아저씨들이 훈련을 하고 있는 거예요. 보통 다른 사람들은 보상을 받는다고 하던데 우린 아무것도 받지 못했어요. 전쟁통이라 다들 정신이 없잖아요. 억 소리도 못 하고 전재산을 몰수당한 셈이지요.”

지금은 유료주차장이 된, 송도중학교를 정면으로 봤을 때 학교 왼쪽에 붙어 있는 땅이 바로 그의 집안 재산이었다. 그렇게 전쟁 전까지만 해도 유복했던 송창식의 집안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끝없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전쟁 기간, 남편의 전사통보서를 받은 어머니는 일곱 살배기 창식과 네 살 여동생을 할아버지에게 맡긴 뒤 집을 나간다. 이후 창식과 그의 여동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 그보다 나이가 한 살 어린 고모, 세 살 어린 삼촌과 함께 살게 된다.

할아버지 댁이 숭의동 독갑다리에 있었어요. 집에서 조금 나가면 벌판에 큰 미군부대가 있었고, 몇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지요. 집도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숭의로터리를 중심으로 공구상가, 자동차정비업소, 인천축구전용경기장과 같은 대형 시설이 들어서 있지만 1950년대 초만 해도 숭의동은 허허벌판에 집이 몇 채 있는 정도였다고 그는 회상한다. 그가 처음 살았던 독갑다리는 지금의 평양옥식당에서부터 숭의공구상가 입구에 이르는 골목길 일대를 가리킨다.

독갑다리란 이름에 대해선 도깨비다리, 혹은 외다리라는 유래가 전해지는데 송창식은 자신이 어렸을 때만 해도 도깨비다리라고 불렀다고 말한다. 1920년대 숭의동은 바닷물이 들어오던 갯가였고 송창식이 어렸을 때까지도 주안에서 흘러온 개천이 흐르고 시멘트로 만든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숭의동을 장사래마을이라고 했는데 말 그대로 사래가 긴 마을이란 뜻이다. 물이 흐르는 긴 고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갑다리 부근은 외져서 밤이면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도깨비가 나오는 다리란 뜻으로 독갑다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하모니카를 곧잘 불고 노래도 잘하던 창식은 미군들에게 인기 최고의 코리안 보이였다.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던 미군들은 부대 앞을 지나가는 창식을 불러 하모니카 연주와 노래를 시키고 초콜릿과 껌 같은 간식을 주곤 했다. 미군뿐만 아니라 창식은 어려서부터 이미 온 동네에 떠들썩한 독갑다리 최고의 가수로 통하고 있었다.

독갑다리는 땅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일대는 지금, 60년이 넘은 평양옥을 비롯해 이화순대’, ‘시정순대와 같은 전통을 지닌 식당들이 여전히 사람들의 발걸음을 끌고 있다.

 

독갑다리, 숭의동 미군부대, 창신조의 추억들

 

창식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그의 집안은 신흥동으로 이사를 한다. 새롭게 이사한 집은 긴담모퉁이 뒤쪽에 위치한, 요즘으로 말하자면 다가구주택이었다.

제 기억에 우리가 사는 집이 창신조라고 들었어요. 건물 이름이 창신조였지요. 적산가옥과는 다른 형태인데 똑같이 생긴 방 여러 개가 있는 집이었어요. 집 주인이 따로 있고 한 가구가 방 하나씩을 얻어서 사는 형태였지요.”

창신조는 인천개항 초기, 부두의 하역인력을 총괄하던 조직 중 하나였다. 말하자면 지금의 항운노조와 같은 조직으로 일제 강점기 3개의 조직이 있었는데 크게 외국 선박의 하역을 담당하는 영신조, 국내 선박의 하역을 책임지는 창신조, 쌀 하역만 맡은 인신조로 나뉘어 운영됐다. 그런데 그가 살던 집이 창신조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살던 집이 창신조 사무실로 쓰였거나 아니면 창신조에 소속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집이었다는 얘기다.

글쎄요, 개념은 잘 모르겠고요, 아무튼 제가 살던 집을 창신조라고 했던 건 분명히 기억해요. 또 하나 웃긴 것은 창신조 화장실이 아주 커요. 공중화장실인데 칸막이도 없이 화장실 하나에 구멍 6개가 뚫린 형태라 여섯 사람이 한꺼번에 볼일을 봐야 했지요.”

창식의 가족은 방 한 칸에서 일곱 식구가 함께 살았는데 몸을 지그재그로 묘하게 엮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방은 비좁고 식구는 많다보니 창식과 여동생은 이따금 송도고 부근에 사는 삼촌 집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그러나 삼촌 집 역시 넉넉한 편은 아니어서 창식과 여동생은 할아버지 집과 삼촌 집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동생과 함께, 혹은 동생과 번갈아가며 할아버지 집과 삼촌 집을 전전하면서 배고픔과 그리움을 잊게 해준 건 오직 음악뿐이었다. 그저 으로 하모니카를 불고, 노래를 부르던 창식이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한 때는 신흥초등학교(당시 신흥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8세 때 한글을 깨친 창식은 음악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한글을 알게 되면서부터 가장 먼저 접한 게 음악책들이었어요. 저로선 음악이 제일 취미 있는 것 아니었겠어요?”

창식은 틈 날 때마다 음악책을 앞에 놓고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다가 음표에 붙어 있는 계이름을 보며 계명을 알게 됐고 나중엔 자신만의 멜로디로 초보적 수준의 작곡을 하는 단계에까지 이른다. 말하자면 초등학교 음악책을 통해 독학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제 주변엔 특출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요즘처럼 놀거리, 볼거리가 없는 시절이다 보니 자신이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았던 아이들이 많았던 거지요.”

초등학교 시절 신흥초등학교 운동장은 그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는 신흥의 학생 수가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았다고 기억했다.

학생 수가 5천 명이었는데, 교가에도 인천이라 한복판 새로이 피어나는 오천 어린이란 가사가 나올 정도였지요. 그때 서울에 신흥보다 더 큰 학교가 하나 있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인천에서는 신흥 다음으로 학생 수가 많은 학교가 창영이었는데 신흥하고 학생 수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지요.”

초등학교 시절 창식은 아이들에게나 교사들에게나 이상한아이로 통했다. 공부도 잘하고 음악 실력도 뛰어난데 말을 할 때면 바보처럼 더듬거리고, 행동 또한 어눌했기 때문이다. 잔뜩 주눅이 든 모습으로 툭 하면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감수성과 재능은 바다처럼 풍부한 소년이 부모도 없이 가난한 할아버지, 삼촌 집에 얹혀살며 굶기를 밥 먹듯이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성정을 드러낸 때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이다.

“3학년 올라가서부터는 꽤 유명하고 인기 있는 학생이 됐어요. 공부하는 것도 노래하는 것도 모두 앞으로 드러냈거든요. 물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꾀죄죄한 모습 때문에 여학생들한테는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초등학교 3학년 이후 반장을 하던 창식은 5학년 때 학교에서 열린 학예회에서 연극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남자주인공 바보온달 역을 맡아 열연할 정도로 활동적인 학생으로 성장한다. 그렇다고 가난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그의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보면 바지 끝단은 무릎 바로 아래, 팔소매 끝은 팔꿈치 바로 아래 닿아 있는 모습이다. 초등학교 6년간 몸은 자랐지만 저학년 때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천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결식학생’ ‘인천중 3대 거지란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중 그를 제외한 2대 거지는 현재 인천의 유명한 정치인들이다.

 

배고픔과 그리움 해광사에서 하모니카와 노래로 이겨내

 

초등학교 시절, 학교 수업이 끝나면 창식은 집 근처인 긴담모퉁이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답동로란 이름으로 불리는 긴담모퉁이는 1907년 일제가 만든 신작로다. 신흥동에서 경동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인천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일방통행로를 따라 긴 담으로 이어져 있어 이름 지어진 긴담모퉁이는 한때 신흥동 일대 정미소 단지가 있을 때 여자들이 새하얀 머릿수건을 쓰고 출퇴근하는 풍경을 볼 수 있는 길이었다. 지금은 기독병원을 오가는 사람들이나 경동에서 신흥동으로 넘어오는 차량들이 오가는 길이 됐다.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위쪽에 언덕에 위치한 팔팔로역시 그의 또다른 놀이터였다.

이름이 왜 팔팔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팔팔로, 팔팔로 하셨어요. 아무튼 그리 높지 않는 언덕이었는데 아이들이 놀기에 최고의 장소였어요.”

현재 인천여상이 있는 구릉 일대를 가리키는 팔팔로는 해방 직전 동공원(東公圓)이란 이름이 정해진 지역이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인천 사람들은 계속 이 지역을 팔팔로라고 불렀는데 팔팔로는 팔판루(八阪樓·야사카로)가 와전된 말이다. 팔판루는 인천여상이 세워지기 전 있던 인천신사(仁川神社) 안에 있던 일본 요정의 이름이다.

고 신태범 박사는 자신의 저서 인천한세기에서 필자가 출입하기 시작한 20년대에는 얕은 돌기둥 담으로 둘러싸인 경내에 동북쪽 언덕에 인천신사, 서북쪽에 일본 요정 팔판루가 있었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남향받이에 이, 삼백 평가량의 광장이 조성돼 있었다. 이것이 전부였으니 공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빈약했을 뿐 아니라 인천신사 경내라고 부르기도 싫고 해서 계속 팔팔로로 불러왔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적고 있다. 팔팔로는 지금 승용차 두 대가 지날 정도의 폭으로 바뀌었다. 길 양쪽으로는 빌라와 오래된 가옥들이 혼재한 모습이다.

창식은 동무들과 함께 있으면 긴담모퉁이나 팔팔로에서 제기차기, 칼싸움, 말타기와 같은 놀이를 즐겼다. 하모니카를 불거나 노래를 부르는 경우는 혼자 있을 때였다.

워낙 공부를 잘하던 창식은 인천중학교에 무시험으로 입학한다. 인천의 명문교였던 인천중은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이 시험에 합격해야 갈 수 있었던 학교였다. 1등을 한 학생은 시험을 보지 않고 입학할 수 있었는데 1등으로 졸업한 창식은 무시험으로 입학한 것은 물론, 영재반에 편입된다.

영재들이 모였다고는 했는데, 사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섬 지역에서 온 아이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성적이 떨어지지만 내신등급이 좋으면 합격할 수 있었거든요.”

중학교에 올라간 창식의 아지트는 해광사란 절로 바뀐다. 해광사는 대웅전 앞마당이 넓었을 뿐만 아니라, 조용했고, 종교적 신비로움까지 품고 있는 절이었다. 너무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성숙하지도 않은 중학생들이 시간을 보내기엔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다. 그에게 낮 시간의 해광사는 친구들과 뛰노는 놀이터였으나 밤 시간의 해광사는 음악연습실이자 명상의 장소였다. 그의 음악이 어딘지 모르게 토속적이면서 불교적 색채가 짙게 배어나오는 이유는 이 시기 해광사를 드나들었던 영향 때문이다.

제가 학교에선 모범생이었는데 학교를 나와 동네만 오면 건달이 되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네 친구들은 거의 시쳇말로 노는 애들이었고, 학교는 모범생들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동네 친구들하고는 주로 해광사에서 놀았는데 노는 것이라 해봐야 맨날 싸움 얘기나 하고 친구들이 정학 당하거나 하면 반성문 대신 써 주고, 뭐 그런 정도였어요. 스님한테 쫓겨나기도 많이 쫓겨났었지요.”

해광사는 6·25 때 북한인민보위부가 점령했던 곳으로 경찰, 공무원, 교사, 사회단체 인사들을 잡아다 심문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 해광사 바로 아래는 우리나라에서 사이다를 처음으로 생산한 인천탄산수주식회사가 있던 자리다. 이 회사는 처음 성인표(星印票)’ 사이다를 만들었는데 이게 광복 뒤 스타사이다로 이름이 바뀌었고, 훗날 칠성사이다가 스타사이다를 흡수하며 별 1개가 7개로 늘어나게 된다.

그는 중학교 시절, 이처럼 성격이 상반되는 두 그룹의 친구들을 사귀며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다. 그가 장래 희망을 음악가로 굳힌 시기도 이 때인데 결정적 모티프가 된 장소가 인천여상 강당이었다.

1 때 서울에서 오케스트라가 인천으로 내려와 공연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인천여상 강당에서 공연을 했는데 단체로 관람을 하러 간 겁니다. 그때 딱 정했어요. 난 어른이 되면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될 거라고.”

1 때 처음 접한 오케스트라 연주는 그에게 비현실적인 세상을 경험하게 만든다. 관현악에 타악까지 강당을 가득 메우는 오케스트라의 웅장하면서 섬세한 선율은 창식이 마치 황홀한 꿈을 꾸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인천여상 강당과의 인연은 2학년 때도 이어진다. 인천여상 강당에서 열린 경기도 음악콩쿠르에 참가해서 1등 없는 2등을 한 것.

그게 뭐냐면요, 니가 1등 할 실력은 아니지만 너보다 잘하는 놈은 없다는 얘기였지요.”

인천여상은 인천신사를 부순 자리에 지은 학교다. 본래 월미여중이란 이름으로 개교했지만 나중에 인천여상만 남고 중학교는 사라졌다. 변변한 공연장이 없었던 인천에서 인천여상 강당은 당시 최고의 공연장이고, 집회시설이었다. 소프라노 김자경과 인중 양윤식 선생 독창회 등 중요한 음악공연은 대부분 인천여상 강당에서 이뤄졌다.

또다른 중요 문화시설로 1960년대 인천공회당을 부수고 그 자리에 지은 시민관’(지금의 인성여고 체육관)이 있었다. 다목적홀인 시민관에선 영화, 3·1절 기념식이나 서영춘·백금녀 쇼, 장소팔·고춘자 만담, 임춘앵과 국극단과 같은 공연이 상연됐다. 시민관은 인천시립교향악단 창단연주회가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한편 동산고 강당은 안익태 선생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코리아판타지>를 지휘했던 명소로, 극장식 의자를 처음으로 설치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후 논과 염전이 있던 자리에 주안시민회관이 지어지면서 인천의 대표적 공연시설 역할을 담당했고, 시민회관이 공원으로 탈바꿈한 지금은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주요 공연이 상연되고 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 되려고 제물포고 대신 서울예고 지망, 합격, 그리고 중퇴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려고 결심했던 창식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뜻하지 않게 선생님이 아닌 친구와 진로상담을 하게 된다.

인중 친구 중에 태권도를 하던 친구가 있었어요. 보통 인중을 나오면 제고로 진학하는 게 코스였는데 이 친구가 자기는 서울에 있는 예술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 친구는 연극인이 장래 희망이었거든요. 이 친구, 어디서 들었는지 유명한 예술고등학교는 서울의 서라벌고등학교와 서울예고라며 주뼛주뼛 서울을 다녀왔어요. 그러더니 제게 서울예고엔 음악, 미술, 무용과밖에 없더라, 그래서 나는 서라벌고를 갈 테니 너는 서울예고를 가라 이러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라벌고는 예고가 아니라 연극반이 좀 센 학교였을 뿐이었죠. 어쨌거나 그 친구는 서라벌고를 지망했고 저는 서울예고로 갈 결심을 굳히게 됐지요.”

그가 제물포고가 아닌 서울예고를 간다고 하자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많은 교사들이 음악을 할 거면 제고를 나와 서울대 음대에 가는 편이 낫다고 창식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시 제고는 서울대 톱이 자주 나올 정도로 전국의 명문고로 발돋움하고 있었고, 그런 상승세를 유지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른 학교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교사들은 창식을 혼내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워낙 황소고집인지라 그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창식은 1지망으로 서울예고를 지원했고 덜컥 합격한다. 필기시험에서 톱을 차지하긴 했지만 실기 위주의 서울예고에 합격하기란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제가 중 1 4·19가 터졌고, 3 5·16이 났어요. 5·16 뒤 정부가 군경유자녀를 우대했는데 한 달 400원의 장학금을 주고 모든 학비를 면제해줬지요. 또 고등학교를 평준화시키고 특수고를 없애려고 할 때였어요. 전국 고등학교가 공동으로 시험을 봤고, 원하는 학교에 가려면 그 학교 석차로 600등 안에만 들어가면 가능했어요. 제가 일단 서울예고 필기시험에서는 톱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공부를 잘해서 간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실기시험은 아주 웃겼어요.”

창식이 실기시험을 보러 갔을 때 실기 담당 선생님이 이렇게 물었다.

너 성악과라며? 그럼 반주자를 데려왔어야지.”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던 창식은 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심사위원들을 쳐다보며 이렇게 대답한다.

반주자가 없는데요.”

심사위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분위기는 어색해졌다. 그때 서울예고 교감이던 오현명 선생이 물어온다.

너 무슨 노래 할래?”

“<, 솔레미오>. 아니면 <돌아오라 소렌토로>.”

심사위원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서울예고 지망생들은 어려서부터 11 레슨으로 다져진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레퍼토리 또한 정통성악으로 무장하고 시험에 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창식은 정통으로 레슨을 받지도 못했고, 레퍼토리 또한 정통성악이라기보다 대중음악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심사위원석에서 조소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창식은 결국 오현명 선생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고 우여곡절 끝에 합격통지서를 받는다.

실기시험 보러 오라고 해서 덜렁덜렁 갔네? 그런데 이건 아닌 거야.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하는 아이들 실력이 장난이 아니고, 성악 하는 아이들도 레퍼토리 자체가 다르더라고. 그 아이들은 부잣집 아이들로 아주 어려서부터 레슨으로 다져진 아이들이었던 거지요. 이건 뭐 내 노래는 노래도 아닌 거야, 허허.”

지금은 세검정에 있지만 그의 고교시절 서울예고는 덕수궁 뒤에 위치했다. 서울예고 1학년 첫 학기, 창식은 하인천에서 서울역을 잇는 경인선을 타고 통학을 한다. 동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어서 오간 것이다.

처음 통학을 하는데 처음엔 학교에서 나온 장학금으로 회수권을 샀지요.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회수권을 사기가 어려운 거야. 6개월짜리 회수권에서 6자를 오려 9자로 만들어 3개월 연장하기도 하고 별별 방법을 다 썼는데, 점점 회수권 사기가 어려운 거야. 돈 생기면 먹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거든. 회수권 위조하고 열차를 훔쳐 타다 걸려서 매 맞고 그럭저럭 1년은 버텼는데 2학년 때부터 통학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때부터 학교도 잘 못 나가고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그랬지.”

경제적 어려움과 더불어 그가 학교로부터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학교로 가던 기차에 오르던 동인천역 삼거리에 있던 별음악감상실이다.

지금의 대한서림 건물 5층이 바로 별음악감상실이었다. 1, 2층은 별제과, 3, 4층은 별다방, 5층은 별음악감상실이었다. 당시 서울 종로에 세시봉이 있으면 인천엔 별음악감상실이 있다고 회자되었다.

별음악감상실은 1960년대 인천의 명물 중 명물이었다. 좌석이 100여 석 정도였는데 하루 이곳을 찾는 인원만 1,000여 명에 달했다. 만원버스처럼 서서 음악을 듣는 사람도 있었고, 한번 들어왔다 나가면 40원의 입장권을 다시 끊어야 했다. 매주 토요일에는 댄스경연대회도 열렸다. 지금 싸이의 말춤이 대세라면 그 당시 젊은이들의 춤은 트위스트였다. 매주 토요일마다 트위스트 대회를 열어 1등에겐 금반지 한 돈을 선물로 줬는데 1980년대 그룹 와일드캐츠의 리드싱어 임종님 역시 이곳에서 잘 나가는 댄서이자 가수로 유명했다.

별음악감상실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었지요. 제가 서울예고에 진학한 뒤에 중학교 때 동네 해광사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이 별음악감상실에서 한번 보자고 하는 겁니다. 거기 가서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놈들이 갑자기 시비조로 나오는 거야. 그래서 나도 좋지 않게 얘기했죠. 그랬더니 이놈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달려드는 거야. 그때 5층부터 1층까지 두드려 맞고 내려왔어요. 어찌나 억울했던지 내가 징징 짜면서 얘기했어요. 내 이 새끼들 다시는 상종 안 할 거라고.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지들은 고등학교도 못 갔는데 내가 서울예고 다닌답시고 자주 나타나지도 않지, 넥타이까지 매고 신사처럼 가다마(정장) 입고 다니지 하니까 아니꼬왔던 거지.”

가난과 고향 친구들의 배신 속에서 2학년을 맞은 창식은 아예 학교에서 먹고 자기로 결심한다.

집안은 맨날 그 모양이지, 고향 친구라는 놈들은 날 내쳤지. 그렇다고 학교를 안 다닐 수도 없고

2학년이 된 창식은 고민 끝에 학교 창고에서 자며 수업을 듣기로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교사에게 발각되고 만다. 그 교사는 창식을 앞세우고 신흥동 할아버지 집으로 찾아온다.

선생님이 와보니까 아홉 가구, 열 가구가 방 한 칸씩에 사는데 우리 집은 특히 오글오글 모여 살고 있거든. 선생 표정을 보니까 얘가 예고에 올 학생은 아니었구나하며 포기하는 듯한 눈빛이더라고요.”

이후 그는 학교 창고에서 기숙하며 밥은 친구들이 싸오는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그러다가 수위들과 친해져 수위실에서 자기도 하고, 학교 양호실에서 눈을 붙이기도 하며 2학년을 보낸다. 2학년은 무사히 마쳤으나 이제 또 3학년이 문제였다.

학교 교칙이 학업성적은 60점 이하, 실기성적은 80점 이하가 되면 낙제를 하게 돼 있었어요. 근데 실기시험은 아무나 치는 게 아니었지. 학생 1인당 한 명의 교사가 따라붙어 내가 이만큼 가르쳤으니 한번 봐주쇼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나는 레슨 선생이 없으니 시험을 볼 수 없었지요.”

1학년 때 어떤 교사가 뭣도 모르고 그를 레슨해줬고, 2학년 때는 창식의 사정을 알았음에도 이우근이라는 교사가 1학기까지 레슨을 담당했다. 그런데 2학기 때 그 교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창식은 외톨이로 남게 된다.

예고에 들어가서 처음 정식으로 노래를 배웠잖아요. 그런데 제 사정이 알려진 뒤부터 어떤 선생님도 레슨을 안 받아주는 거야. 어린 마음에 얼마나 난처했겠어요. 받아주지 않는 명분도 레슨비를 내지 못해서 안 된다가 아니라 네가 공부를 안 하고 꾀를 부려서 받아주지 않는 거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 레슨비가 천 원이었거든. 장학금으로 1600원 정도 받기는 했지만, 그런데 난 천 원 생기면 밥 먹어야 되거든. , 이거 참 웃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반발심도 생기더군요.”

결국 레슨을 받지 못한 채 창식은 돈이 들어가지 않는 공부와 음악이론에 집중하기로 결심한다. 실기시험을 보지 못한 창식은 청음과 시창 등 이론에 전념한다. 2학년 겨울방학이 되면서 창식은 아예 고향으로 내려온다. 학교에선 유급통지서를 보냈지만 어차피 학교 다니기를 포기한 상황이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자존심은 많이 상했다.

내 입장으로는 학교를 중퇴한 것인데, 나중에 보니까 퇴학이 아닌 졸업생으로 돼 있더라고. 어떻게 된 건지는 나도 모르겠어. 지금도 10, 11회 두 곳에서 동창회 모임 소식이 오거든.”

2학년 겨울방학 이후 창식은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따금 학교를 찾았다.

그땐 학생이 아니고 거지로 찾아간 거지. 가면 친구들 도시락 얻어먹을 수 있으니까.”

동급생들이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창식은 밥 한 술 얻어먹기 위해 서울 음대로, 홍익대로 친구들을 찾아다닌다. 이처럼 열패감으로 가득했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창식을 위로해주던 공간이 하나 있었으니 배다리 헌책방거리가 그곳이다.

학교는 포기했지만 지휘자의 꿈을 포기한 건 아니었거든요. 배다리에 가서 음악자가 들어간 책은 죄다 찾아본 거예요.”

그렇지만 당시 음악이론서라는 게 종류가 너무 적었고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전국을 통틀어 10권도 안 되는 책을 창식은 보고 또 보며 화성악, 음악평론과 같은 음악이론을 공부한다. 그러다 보니 음악이론에 대해서만큼은 그 또래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박식해졌다.

배다리의 모습은 그때 어땠을까. 배다리는 배가 드나들던 자리로 경동 큰길이 끝나고 중앙시장 앞 금곡동 초입 지점을 말한다. 19세기 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이곳은 1900년 경인철도가 부설되고 주변이 개발될 때까지 배가 닿는 다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 헌책방이 들어선 때는 1960년대다. 헌책방거리는 까까머리 학생들의 단골서점으로 수학의 정석에서부터 영어사전, 소설, 잡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책을 사고팔았다. 지금은 몇 집 안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1960년대만 해도 20개가 넘는 헌책방들이 성업 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세시봉 무대

 

스무 살이 되던 1966. 송창식은 인천의 배다리와 서울의 대학가를 맴돌며 동가식 서가숙하는 나날을 지낸다. 그는 자신이 우리나라 최초의 노숙자일 거라며 웃었다. 배다리에서 곰삭은 영혼을 만난다면 밥을 얻어먹기 위해 올라간 서울에선 푸성귀 같은 청춘과 조우했다.

가끔 강의실에 들어가 도강도 하고 잔디밭에서 기타 치며 노래도 부르고 그렇게 1년을 보냈어요. 그러다가 해태제과가 조각상을 맡긴 동양공예란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지요.”

동양공예에서 일을 하던 어느 날, 사업주와 다툰 송창식은 고향으로 가는 열차표를 구입한다.

인천행 열차표를 사서 기다리는데 이건 뭐 고향에 내려가기가 그렇게 창피한 거예요. 집은 그 모양일 거고, 친구놈들 하고는 웬수를 진 상태고. 그래서 어떡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저기서 빠~앙 하고 부산행 열차가 다가오는 거예요.”

부산행 열차를 본 창식은 에이, 무전여행이나 떠나보자며 겁도 없이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아니나 다를까. 검표원에게 발각돼 흠씬 두드려 맞은 창식은 중간에 강제로 하차당하고, 또 몰래 올라탔다가 걸려 쥐어터지고 하면서 부산에 닿는다. 때는 농번기라 농사 도와주고 밥 한 끼 얻어먹고 그렇게 닿은 부산이란 땅이었다.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진지하게 미래를 고민했던 시기였어요. 처음으로 내 인생을 심각하게 생각한 거죠. 내 꿈은 지휘자인데 이건 물 건너 갔고, 그럼 어떻게 살 거냐 고민을 한 거죠. 하다 못해 누구는 만나고 누구는 안 만나고까지 시시콜콜한 계획까지 다 짰지요.”

5월에 시작한 무전여행은 6월 장마철을 지나 7월에 끝이 났다. 40여 일 간의 무전여행 뒤 창식이 찾은 곳은 무의도였다.

매년 여름엔 무의도에서 한 달씩 지내곤 했어요. 고향의 바닷가이고 사람도 없고 해서 친구들한테 쌀 한 되 줘라 해서 가면 여름을 다 보내고 돌아오곤 했거든요. 무의도에 사는 또래 친구들이 쌀도 주고 감자도 캐다 주고 했으니까 먹는 건 걱정 없었어요. 잠이야 텐트에서 자면 되고.”

지금 하나개 해수욕장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피서지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무의도는 동네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무명의 바닷가였다.

무전여행에 무의도 코스까지 마친 창식은 다시 서울 생활을 재개한다. 그렇게 밥 얻어먹으러 가서 낮엔 캠퍼스에서 노래하고 밤엔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그의 인생에 불쑥 터닝포인트가 찾아든다.

잔디밭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데 누가 날 찾아왔어요. 세시봉이란 음악감상실의 주인 아들이라는데 홍대에 명물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날 찾아왔다는 거예요.”

서울 종로의 음악감상실이었던 세시봉은 대학생의 밤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각 대학의 명물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옳다구나 해서 세시봉을 찾은 송창식은 오페라 아리아를 노래한다. 노래를 들은 세시봉 주인은 먹여주고 재워줄테니 세시봉이란 그룹을 만들어서 매주 출연해달라는 제안을 해온다.

저더러 함께 노래할 친구들을 지목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목한 사람이 윤형주와 이익균이었어요. 그렇게 세시봉트리오를 만들었지요. 그런데 두 친구가 클래식이 아닌 팝송을 하겠다고 해서 그때부터 팝송을 배우기 시작했지요. 그때가 196711, 12월이었어요.”

팝송공부에 전념한 송창식은 이후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하며 밥벌이의 걱정에서 해방된다. 마침 그해 12월 스타가 된 조영남은 자신이 활동하던 TBC 방송국 프로듀서에 세시봉트리오를 추천하면서 송창식은 한 쪽 겨드랑이엔 음악의 날개, 다른 쪽 겨드랑이엔 인생의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오른다.

“<한밤의 멜로디>란 프로그램이었는데 22일 첫 방송을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익균이 영장이 나와 윤형주와 둘이 부랴부랴 트윈폴리오로 이름을 만들어 방송출연을 하게 된 거죠.”

1968~69년 트윈폴리오로 이름을 날린 송창식은 1973년 군대 입대했다가 1974년 의가사 제대하며 본격적인 솔로로 데뷔한다. 이후 그는 지금까지 작곡가 겸 가수의 외길을 걸어왔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세상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를 가리켜 세상 사람들은 기인이라고 하지만 그는 내 생활이 일반 사람들과 달라서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기인은 뭐 사람 아닌가요?”라며 껄껄 웃어넘긴다. 그는 세상에 잘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돈을 너무 많이 벌고 싶지 않아서라고 짧게 답한다. 그렇지만 퇴촌에 살면서 여전히 하루 몇 시간씩 연습을 하고 있고, 카페에서 팬들을 만나고 있다.

그의 음악은 하나같이 고향 인천의 정서를 품은 것들이라고 송창식은 고백한다. <담배가게 아가씨>는 배다리를 배경으로 작곡했고, <한번쯤>은 긴담모퉁이를, <영희야>란 노래는 창신조 주인집 딸을 생각하며 만든 노래다. <내 나라 내 겨레>는 무의도에서 작곡했고 <선운사>란 노래엔 해광사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그는 자주 고향에 대한 꿈을 꾼다고 고백한다.

지금도 자꾸만 꿈에 나타나요. 긴담모퉁이도, 창신조 집도, 답동의 우리 삼촌 집도, 우리가 세들어 살던 집주인 모습도. 언젠가 꼭 한 번은 고향 인천에서 살고 싶어요.”

 

金眞國. 인천일보 기자 <저작권자 ⓒ 황해문화, 이너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