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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 쉬는 인천여행

전등사와 갯배생선구이

by 김진국기자 2016. 9. 16.

'전등사'를 찾아가는 여정은 즐겁고도 엄숙하다. 속노랑고구마와 개똥참외를 파는 노점상이 늘어선 48번국도. 그 노랑풍경이 넘실대는 국도와, 벚꽃처럼 흩날리는 봄햇살을 맞으며 질주하는 '잔차(자전거)'. 그 평화로운 풍경은 김포에서 강화를 잇는 초지대교를 건널 때까지 깨어지지 않는다. 즐거움이 엄숙함으로 바뀌는 때는 남문 혹은 동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전등사를 오르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그 진지함은 전등사에 계신 부처님을 의식하거나, 무수한 외침을 온몸으로 막아 낸 역사적 장소란 사실을 깨닫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전등사의 부처님은 1600여년 전에 모셔진 '고구려의 부처님'이다. 서기 381(고구려 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은 정족산 중턱에 '진종사'란 이름의 사찰을 창건한다. 전등사란 이름으로 바뀐 때는 그로부터 900년이 흐른 뒤인 고려 충렬왕 때다. 원나라 세조의 딸에게 남편(충렬왕)을 빼앗긴 '정화궁주'는 진종사를 찾아 밤낮으로 기도를 올린다. 이때 '옥등'을 시주하면서 전등사란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전등사는 이후 정화궁주의 원찰로써 고려말까지 고려왕실의 보호를 받는 국찰의 성격을 띠게 된다.

 

전등사가 호국사찰로 자리하게 된 것은 1232년부터 몽골의 침입에서부터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온갖 외적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낸 강화도의 역사와 흐름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강화로 천도한 1232~1270년에도, 미국함대가 함포를 앞세우고 들어온 신미양요(1871)에도 전등사는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전등사를 요새로 서양의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펼친 때가 있으니, 바로 병인양요(1866).

 

서양 세력으로는 가장 먼저 우리나라에 야욕을 품고 있던 프랑스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탄압을 빌미로 18861014일 강화도에 상륙한다. 강화읍과 강화성을 파죽지세로 점령한 프랑스군은 화풀이라도 하듯 외규장각을 불 태운다. 동시에 조정엔 프랑스 선교사 학살 책임자를 처벌할 것과 한불통상협정을 체결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117일 전등사 정족사고 입구까지 온 프랑스군은 뜻밖의 반격에 놀란 토끼처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등사 정족사고를 배수진으로 승병과 범포수들이 합세한 조선군의 리더 양헌수 장군은 한국호랑이 같은 기세로 프랑스군을 격퇴한다. 창과 화승총으로만 무장한 조선군이 어떻게 덩치 크고 새파란 눈을 가진 서양인들과 최신 병기에 맞설 수 있었을가.

 

이에 대해 <총의 울음>이란 소설을 쓴 손상익씨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엔 범포수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화승총만 갖고 백두산을 넘나들며 호랑이를 사냥하던 사람들이었지요. 범수가 호랑이를 어떻게 잡는줄 아세요. 화승총의 유효사거리는 20m에 불과합니다. 20m 이내여야 총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이 호랑이라는 놈은 한 번에 10m를 뛰는 겁니다. 범포수는 밤새도록 땅을 파고 호랑이를 기다렸다가 호랑이가 20m 안에 들어오면 방아쇠를 당기게 됩니다. 그것도 단 한 발. 이 한 발이 빗나가면 범포수는 호랑이의 밥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화승총알 단 한 발로 호랑이와 '맞짱 뜬' 범포수들이었으므로 서양인들에겐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범포수들은 오직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프랑스군과 맞짱을 떠 결국 쫓아내 버린다. 작고 새카만 사람들이 땅 속에서 눈만 반짝이고 있다가 가까이 오면 한 방 "!" 하고 쏘는 절묘한 타이밍과 용맹성에 프랑스군은 차라리 질려버렸던 셈이다. 전등사 동문 옆 오른편에 서 있는 '승전비''비각'은 그 당시 조선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전리품'이다.

 

정족산은 단군의 숨결이 흐르는 산이기도 하다. 전등사를 품은 산은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이다. 강화도 주봉인 마니산의 줄기는 온수리에서 세 개의 봉우리를 이룬다. 정족산은 이 세 개의 봉우리가 다리가 셋인 솥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정족산을 따라 쌓은 성이 바로 단군의 세 아들이 쌓은 '삼랑성'이다.

 

사찰로 들어가기 위해 정족산을 오르다보면 거의 다 가서 예쁜 찻집을 만난다. 연꽃빵과 대추차, 오미자차가 유명한 '죽림다원'이다. 이 곳에 앉아 풀나무향을 맡으며 마시는 차 한 잔은 극락과 세상이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해 준다.

 

사찰 경내의 '대웅보전'은 많은 역사와 이야기를 품고 있는데 처마 밑 '나녀상' 이야기가 가장 흥미롭다. 원숭이 같기도 하고, 여인 같기도 한 나녀상에는 이런 전설이 숨어 있다. 1614년 불에 탄 전등사를 복원할 때였다. 전등사를 복원하는 도편수는 한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도편수가 묵고 있는 주막의 여주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여인은 도편수의 재산을 몽땅 챙겨 어디론가 떠나 버린다. 슬픔에 휩싸인 도편수는 그 여인을 원숭이처럼 만들어 평생 대웅보전의 처마를 떠 받들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말 잘 하는 사람이 만들어낸 '허구'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처마밑 나녀상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뭔가 깊은 사연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명부전'과 산 자의 안녕을 기원하는 '약사전'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정족사고'가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우리나라 최대 사고였던 곳이다.

 

아름다운 산책과 도도한 역사가 만조처럼 출렁이는 곳. 전등사엔 지금 겨우내 꽁꽁 숨어있던 씨앗들이 그 기운을 다해 새파란 이파리로 움터 올라오는 중이다.

 

/·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갯배생선구이']

"강원도의 맛 보시드래요"

속초서 공수한 생선 싱싱 모듬구이 쫄깃쫄깃

 

"강화에서 속초 생선좀 맛 보시드래요."

김포에서 강화를 잇는 '초지대교'를 건너자마자 우측에 있는 '갯배생선구이'(032-937-7714)는 속초에서 가져온 싱싱한 생선만을 재료로 사용한다. 갯배생선구이 본점은 강원도 속초 청호동에 있으며 이 곳은 말하자면 제2호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집의 대표 메뉴는 12000원짜리 '생선 모듬구이'. 생선 모듬구이엔 모두 8가지의 생선이 나온다. 파닥파닥 뛰는 오징어, 꽁치, 청어, 고등어, 열기(불뽈락), 조기, 가자미, 다랑어가 그것이다. 회도 마찬가지이나 싱싱한 생선은 구웠을 때 푸석푸석하지 않고 쫄깃쫄깃한 것이어야 한다. 숯불에 올려 지글지글 구워지는 갯배생선구이의 생선은 하나같이 싱싱한 것들이다. 평일은 물론이고 주말이면 20, 30분은 줄을 서서 기다렸다 밥을 먹을 만큼 손님이 많으므로 재고가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남극 심해에서만 잡히는 '메로구이'는 연어와 삼치의 중간 정도의 육질을 가진 특별메뉴다. 부드러운 육고기처럼도 느껴지는 이 메뉴는 갯배생선구이가 자신있게 추천하는 요리이기도 하다.

속초 앞바다에서 잡아올린 싱싱한 속초오징어 몸통에 찹쌀과 양념을 넣어 만든 오징어순대나, 일반 곱창에 역시 찹쌀과 같은 속을 넣는 아바이순대는 속초 '아바이마을'에서 직접 공수한 것들이다. 일반 순대와는 맛과 찰기 자체가 다르며 인천에서 즐길 수 있는 '강원도의 맛'이라 할 수 있다. 숯불에 구운 생선보다 국물이 있는 게 좋다면 조림을 시키면 된다. 무와 간장, 고춧가루, 마늘 등 갖은 양념을 넣고 자작자작 끓여낸 고등어조림이나 갈치조림은 입안 가득 바다의 향기를 풍기게 만든다. 시원한 우럭매운탕과 매콤한 동태탕도 입맛을 돋우는 특별 요리이다.

 

전등사에서 차 타고 7분 정도 거리이며 매일 오전 9~저녁 9시까지 문을 연다.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