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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인천 최초의 문화시설이 인성여고 체육관으로

by 김진국기자 2016. 9. 16.

 

"-!"

"빨리 빨리 못 움직이나!"

"!" '-, -!"

 

초가을 오후 인성여자고등학교 다목적관 3. 인성여고 농구선수들이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몸을 놀리고 있다.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깊이 숙인 채 왼발과 오른발에 체중을 번갈아 실으며 스탭을 밟는 선수들의 몸짓이 격렬하다.

 

그들의 입에선 알아들을 수 없는 구호가 터져나온다. 비명처럼도 들린다. 마룻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굵은 땀방울들. 체육관 안에선 찜통 같은 열기가 훅훅 하고 뿜어져 나온다.

 

'인성'하면 '농구'란 말이 먼저 나올 정도로 인성여고는 농구명문이다. 농구부가 창단한 때는 1964. 1학년들로만 구성된 팀이었지만 창단 이후 5년 연속 경기도 대표로 전국체전에 나갈 정도로 강팀으로 성장한다.

 

꾸준히 성장한 인성여고는 80년대 후반 농구전성기를 구가한다. 정은순, 유영주와 같은 국가대표를 배출하며 전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농구명문의 브랜드를 키워오는 중이다.

 

지금 저 풋풋한 농구부 학생들의 비지땀은 미래 한국여자농구를 이끌어갈 기름진 자양분이 될 것이다. 3층은 농구연습장이지만 2, 1층은 고3교실과 음악·미술·과학 특별실이 위치한다.

 

현재 학교 다목적관으로 사용하는 건물 자리는 본래 개항장 조계지 의회 격인 신동공사가 있었다. 그 자리에 붉은벽돌 2층의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인천공회당'이 신축된 때는 1923년이다.

 

인천공회당은 영화상영, 하모니카밴드 연주회, 음악무도회에서부터 어린이날 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리는 한마디로 '종합문화회관'의 역할을 했다.

 

한쪽엔 인천상공회의소도 있었다. 광복 후 미군정이 수용소 등으로 쓰이던 이 건물은 6·25때 함포를 맞은 뒤 19561200석의 대극장으로 부활한다.

 

'인천시민관'이란 이름을 갖게 된 이 건물에선 연극, , 공연, 웅변대회, 미술전시과 같은 여러 문화행사가 열렸다. 영화상영과 함께 결혼식도 치를 수 있는 인천문화의 전당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며 건물은 점차 '구식건물'이 돼 갔고 1968년 건물 소유주인 인천시는 마침내 시민관 경매를 결정한다. 1962년 시가 인천예총의 경상비 지원을 위해 운영권을 위임했지만 계속 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경매를 통해 인성학원이 인수함에 따라 인천시민관은 문화시설의 생명을 마치고 운동교육시설로 변모한다. 인성학원은 이 건물을 1970년 실내체육관으로 개축하면서 인성 농구부의 메카로 만들었고, 2001년 다시 건물을 헐고 지금의 다목적관을 신축해 지금까지 오고 있다.

 

다목적관 맞은 편에 있는 인성여고는 인천 최초의 장로교회인 '인천제일교회'가 세운 미션 스쿨이다. 인성여고 자리에 최초로 있던 건물은 도립인천병원이었다. 이 건물은 이후 일본군 헌병대로 쓰이다가 광복 이후 사라졌는데 이 때 제일교회가 대지를 인수해 1947년 무궁화유치원을 개설한다.

 

1949년엔 유치원 한편에 무궁화공민학교(인성초교 전신)가 개교한 데 이어 1954년 무궁화고등공민학교(중학교 과정)가 교문을 열었고, 196127일 인성여자고등학교 인가를 얻음으로써 오늘날 인성학원이 탄생했다.

 

"이 쪽으로!" "~."

 

체육관을 등지고 계단을 내려온다. 농구부 선수들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문을 나서자 새파란 하늘에 무늬진 투명한 날갯짓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잠자리들의 무수한 날갯짓이 농구선수들의 훈련장면과 오버랩된다.

 

가을바람이 홑이불 같은 감촉으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결실의 계절이 오고 있다.

 

 

/글 김진국 기자·사진 유재형 사진가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