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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일본제1은행과 개항장박물관

by 김진국기자 2016. 9. 16.

화강암으로 쌓은 견고한 외벽. 르네상스풍의 돔형 지붕. '인천개항박물관'은 요새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화 속에 나오는 작은 궁전처럼도 다가온다. 밤색이 칠해진 아치형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실내공간이 상당히 커 보인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2층의 창문도 눈에 들어온다. 지붕 중앙의 돔 좌우에 '도머창'도 나 있다.

전시실은 개항기 흔적이 역력하다. 언더우드타자기, 표지가 낡은 감리교 찬송가책에서부터 昭和四年(소화4년·1929)이란 글씨가 찍힌 영화여자보통학교 졸업증서도 보인다.

전시실은 1883년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근대문물, 경인철도와 한국철도사, 개항기 인천풍경, 인천 전환국과 금융기관 관련 자료들로 꾸며져 있다. 바로 옆 건물 기획전시실에선 조선족 디아스포라의 삶을 조명하는 '만주아리랑'전이 열리는 중이다.

인천시 중구 신포로 23번길 89 인천개항박물관이 개관한 때는 2010년이다. 1997년 이후 방치되던 이 건물은 2000년부터 중구의 적극적인 '러브콜'로 가치가 높아졌다. 2000년 건물을 임대해 관광개발과 청사로 사용하던 중구는 2006년부터 인천개항박물관 계획을 추진, 4년 만에 문화시설로 탈바꿈 시킨다.  

연중무휴로 오전 9시~오후 9시 문을 여는 개항박물관엔 2016년 7월 한 달에만 5165명이 다녀가는 등 한 해 6만 여명이 100년의 시간여행을 즐기는 중이다. 기획전시실을 포함하면 박물관을 찾는 숫자는 훨씬 크게 늘어난다. 

아치와 석조 등 완벽한 서양식건물인 이 박물관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1899년이다. 설계자인 니이노미 다카마사(新家孝正)는 돌과 석재, 시멘트와 목재 등 주 재료를 일본에서 들여와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건물을 완공했다.  

당시 일본 제1은행은 지금처럼 예금과 대출을 다루는 은행의 개념과는 많이 달랐다. 조선을 쌀과 금을 일본으로 빼돌리거나 일본인에게 토지매입자본을 공급하는 등 일본의 조선수탈의 첨병이었던 것이다. 이 건물은 '한국은행'이 창립하던 1909년 '한국은행 인천지점', 1911년엔 '조선은행 인천지점'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인천의 경제를 부당하게 쥐락펴락한다.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이 주둔하던 잠깐 동안 미군 '댄스홀'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 광복과 함께 인천사람들은 일제의 흔적은 가능한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강철만큼이나 단단해 보이는 화강암 건물은 예외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사람이 들어가서 살 수 있는 건물은 못 됐다. 열이 통하지 않는 바람에 겨울엔 냉방도, 그런 냉방이 없었다. 지금도 겨울이면 실내가 너무 추워 관람객들이 애를 먹는다는 게 박물관 관계자 얘기다. 그러다보니 미군들이 들어가서 춤추고 노는 위락시설 역할을 잠깐 했던 것이다.

이 건물은 이후 줄곧 '한국은행 인천지점' 건물이었으나, 1980년 은행이 이전하면서 '조달청 인천지점'이 들어온다. 1996년엔 '인천지방법원 등기소', 1997년 (사)인천문화발전연구소, 상설의류매장 등으로 사용되다 2000년 부터 중구가 맡아 관리 운영해오고 있다. 인천시 지정문화재제7호로 지정됐다.  

이 건물이 처음 지어질 당시엔 본관, 금고동, 부속동, 창고동, 사택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박물관 건물 우측 뒷편의 창고형 금고는 현재 제4전시실이 들어섰으며 수장고로도 쓰고 있다. 석조내력벽 구조인 박물관 실내는 가로 16.5m, 세로 12.8m로 비교적 넓은 편이다. 내부엔 4개의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으며, 천장 높이는 6.974m, 건물 전체 높이는 9.3m나 된다.

연한 원두커피의 빛깔 같은 실내를 휘휘 돌아 밖으로 나오니, 세루리안 블루의 하늘에 눈이 부시다. 어제는 바로 광복 71주년이 되던 날이었던가. 그 시대를 살아보진 못 했지만, 식민지 치하의 고통스런 삶과 광복의 환희가 어지럽게 교차한다.  


/글 김진국 기자·사진 유재형 사진가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