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72

가야할 30년을 바라보며 ▲인천일보 창간호(출처 인천일보) "기자가 돼서 정의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며 조금은 당찬, 조금은 이상적인 의지를 품고 인천일보 공채 3기로 입사한 때가 1994년 가을이었다. 인천일보 공채2기 시험에 떨어진 뒤 재수 끝에 입사한 터라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매일 파출소(지구대)와 병원응급실, 경찰서를 돌며 사건을 체크하는 '사쓰마와리'(察廻, 야간시찰)를 하는 사회부 막내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세상을 향한 더듬이를 마음껏 뻗칠 수 있는 기자직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재미 있었다. 집회가 열리면 시위대처럼 군중 속에 파묻혀 현장을 누볐고, 살인사건과 같은 강력사건이 터지면 경찰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비리를 취재하다가 협박과 함께 신분증을 빼앗긴 적도 있고,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 2018. 9. 4.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 북한 땅 '개성'을 찾았던 때는 2007년 여름이었다. 고려 초기 건립한 사찰 '영통사'에서 열리는 '성지순례 원만성취 기념 법회' 취재 차 개성 땅을 밟았다. 영통사는 우리측 천태종이 건축 재료를 지원해 복원한 남북화합의 상징이었다. 민둥산,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개성의 풍경은 우리나라 70년대 모습 그대로였다. 천연색사진현상소, 리발소란 간판과 '조선은 하나다'와 같은 구호도 눈에 들어왔다. 붉은 머플러를 한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오전 11시쯤 열린 법회에서 북측 장혜명 영통사 주지스님과 우리측 전운덕 천태종 전 총무원장은 각각 환영사와 답사를 통해 "영통사를 남북평화통일의 성지로 만들어 가자"는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법회 뒤, 북측 안내원을 따라 선죽교와 고려박물관.. 2018. 8. 30.
부처님오신날 생각하는 팔만대장경 세계 인쇄술의 불가사의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 보관했던 시기는 1251년~1398년이다. 몽골침입에 맞서려고 1236년부터 판각을 시작해 1251년 8만여 장을 완성한 이후 150년 간 강화도가 품고 있던 보물이다. '강화경판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대장경이 지금의 해인사로 이관된 때는 조선 건국 6년 뒤인 1398년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7년(1398) 5월 임금이 용산강에 행차해 강화 선원에서 운반해온 대장경을 보았다' '경상감사에게 명해 해인사의 대장경을 인쇄하는 승려들에게 공양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옮겨진 정확한 이유와 경로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왜구 등으로부터 대장경을 더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구중심처를 찾아 지금의 해인사로 갔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 2018. 5. 23.
남북이산가족 상봉 선친의 고향은 함경남도 신포였다. 한국전쟁 당시 잠깐 피란을 갔다 오겠다며 남으로 내려왔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간절히 그리며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아무런 경제적 능력이 없는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남겨 둔 채. '통일'이란 단어를 접할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숭고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선친을 향한 얼마간의 원망이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노래방에서 강산에의 '라구요'를 부를 때 이따금 목이 메고 눈물을 찔끔거리는 이유를 사람들은 잘 몰랐을 것이다. 빛 바랜 흑백사진만으로 만날 수 있었던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때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부터이다. 북쪽엔 어머니, 남쪽엔 처자식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는 심정이 어땠을까. 아버지가 돼 보니 .. 2018.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