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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자의 해외 취재기

400년 제국의 왕궁 … 보물 가득한 박물관으로

by 김진국기자 2014. 9. 25.

오스만제국의 400년 궁전이었던 톱카프궁전 제2의 문인'경의의 문'. 술탄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반드시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한 뒤 지나가야 했다. 지난 3월22일 오후(이스탄불 현지시각)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경의의 문을 오가고 있다.

중국에 '자금성'이 있다면 터키엔 '톱카프궁전'이 있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오스만제국. 지난 3월22일 찾은 제국의 왕궁은 깊고도 웅장했다. 오스만제국 술탄들의 거처였던 톱카프궁전을 돌아보려면 3개의 관문을 거쳐야 한다.

'황제의 문'에서 시작해 '경의의 문', '행복의 문'을 지나면 마침내 '튤립정원'에 닿는다. '술탄'과 '예니체리'는 다 어디로 갔는가. 톱카프궁전은 지금, 제국의 유물로만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붉은 벽돌로 견고하게 구축한 육중한 성문을 맞딱뜨렸을 때, 우리나라의 '독립문'이 연상됐다. 오스만제국의 왕궁인 톱카프궁정의 입구는 ㄷ자를 세워놓은 모습이다.

톱카프궁전은 여러 겹의 성문을 갖고 있었다. 문을 지나면 너른 정원과 회랑이 나오고, 또다시 새로운 문을 통과하면 새로운 정원이 드러났다. 심효섭 가천박물관 국장은 "북경의 '자금성' 같은 '사합원' 양식"이라며 "동서문명이 융합한 오스만제국의 건축술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톱카프궁전은 '비잔티움제국'의 아크로폴리스 자리에 지어졌다. 궁전을 세운 사람은 오스만제국 '메흐메드2세'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그는 현재 이스탄불대학 자리에 왕궁을 짓는다. 급하게 지었던 터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1460년에서 1478년, 그는 새로운 궁전을 마련한다. 톱카프궁전은 이후 400년 간 제국의 왕궁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호령한다. 터키공화국이 탄생한 이듬해인 1924년 박물관으로 바뀌기 전까지도 톱카프궁전에선 술탄의 유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피부색깔도, 눈동자도 다른 세계의 이 사람들은 내게 무엇일까. 사람들을 바라보는 기자에게 능화스님(범패박물관 관장)이 "한 자리에서 밥을 먹는 인연은 전생에 500생을 같이 한 것이며, 자식은 900생을, 부부는 1000생을 함께 해야 인연이 된다, 그래서 천생연분이란 말이 나온 것"이라며 "동시대를 살아가며 이렇게 만나는 것은 큰 인연"이라고 말해줬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박애심이 솟구쳐 올라왔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지'.

현지시각 지난 3월22일 오후. 세계 각국에서 온 인파에 떠밀리다시피 제1관문 '후마윤문'(지복의 문)에 들어섰다. 거목들이 서 있는 광장이 펼쳐졌다. '예니체리 정원'이란 이름을 가진 정원이다. '새로운 군대'란 뜻의 예니체리는 술탄의 최정예 근위병들. 그들은 터키인들이 아니었다. 오스만터키제국 초창기 '무라드1세'는 급속히 성장하는 귀족계급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스도교 노예들과 비터키인들 만으로 군대를 창설했다. 그래도 불안했다. 고심 끝에 발칸반도의 그리스도교 아이들을 데려오기 시작한다. '데브쉬르메'(아동집단징발)는 어려서부터 술탄들의 충성스런 군인을 키우는 제도였다. 예니체리들은 술탄의 노예였으므로 특권이 주어졌다. 오직 예니체리 대장의 결정에 따라 신변이 결정됐을 뿐 범죄를 저질러도 재판을 받지 않았다. 데브쉬르메 출신 관료들은 마침내 오스만제국 귀족들을 제치고 핵심권력을 차지하기도 한다. 1826년 전멸됐지만, 예니체리들은 술탄의 총애를 등에 업고 무소물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술탄을 바꾸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예니체리의 정원을 보며 고려의 '삼별초'가 떠올랐다.

무신정권을 수호한 고려의 최정예부대 삼별초. 몽골의 침입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했던 고려왕조는 1270년 원(몽골)나라와 화친으로 개경환도를 추진한다. 삼별초는 왕명을 거역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항쟁의 선봉인 삼별초는 몽골에게 '눈엣가시'였고 삼별초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을 맹렬히 추격하는 여몽연합군에 맞서 삼별초는 진도, 제주도로 후퇴하며 격렬히 저항하다 3년 만에 산화한다. 삼별초와 예니체리….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똑같은 것일까. 그들은 그렇게 닮아 있었다.

제2의 문을 지나면 펼쳐지는 이 정원은 각료회의를 통해 오스만제국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던 장소다. 사진 왼쪽 뒷편 건물은 하루 1만2000㎏의 음식을 만들어냈던 식당이다.

왼쪽으로 교회와 화폐제조소가, 오른쪽으로 사병숙소, 제빵공장, 병원으로 쓰인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깔모자 같은 팔각형 탑 2개가 솟은 문은 제2문 '밥 셀람문'(경의의 문)이다. 말 타고 이 문을 지나갈 수 있는 존재는 술탄 뿐이었다. 그 외 모든 사람들은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인천박물관협의회(회장 이귀례) 회원들은 제2의 문에서 표를 구입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문에 들어서자 눈부신 연둣빛 잔디광장이 일행을 반긴다. 제국의 중요한 결정이 이뤄졌던 장소다. 일주일에 네 번, 여기서 각료회의가 열렸다. 3달에 한 번 주는 군인급료도 제2정원에서 지급됐다. 오른편으로 굴뚝이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5000여명의 음식을 준비했던 황실주방이다. 하루에 양 200마리를 잡는 때도 있을 정도였다.

제3의문인 '밥 웃 사데트문'(행복의 문)을 통과하자 대신이나 외국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실이 나온다. 정원 오른쪽 보석박물관은 술탄의 보물창고였던 곳이다. 세계 최대의 에메랄드가 박혀 있는 단검, 86캐럿짜리 다이아몬드, 8만 개의 금화를 녹여 만든 황금의자. 너무 크고, 많다보니 금은보화는 차라리 무가치해 보였다. 1.5㎝~2㎝ 굵기에 길이가 1m를 조금 넘을 것 같은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칼'과 '세례 요한의 손뼈'… '이슬람성물전시관'은 살아 있는 기독교 현장이었다. 제 3정원은 톱카프궁전의 하이라이트였다.

술탄과 가족들의 공간인 '제4정원'은 '튤립정원'이란 애칭으로 불린다. 하나 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튤립들은 5월이면 이 곳을 가득 메울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명장 무스타파 파샤를 기념하는 정자, 1638년 무랏4세의 바그다드 점령을 기념해 세운 아치와 이즈닉타일 장식의 바그다드 정자 뒤 편으로 세르리안 블루의 바다가 숨을 헐떡이고 있다. 푸른 이젤 위에 흰 물감을 찍은 것처럼 둥둥 떠 있는 크고 작은 보트들. 튤립정원 테라스에서 바라본 '마르마라해'는 그렇게 튤립 같은 봄을 피워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