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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강화의 자연환경과 교통·산업

by 김진국기자 2017. 11. 29.

 

 
▲ 코넬리어스 오스굿이 1947년 보았던 강화도와 70년 뒤인 현재의 강화도는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당시 강화도가 직조산업과 농업, 어업의 도시였다면 현재는 역사문화관광도시 성격이 강하다. 비가 내리던 7월31일 고려궁지 뒤쪽 송악산에서 강화읍내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오스굿은 선두리를 통해 강화도와 우리나라를 보려고 노력했다. 사진은 선두5리 전경으로 갯벌위에 보트들이 있고 농가는 펜션으로 바뀐 모습이었다.


 

 

 

울퉁불퉁한 지형… 포구까지 뻗은 자갈길엔 낡은 버스 몇대만
울타리 속 '인삼'·고품질 '강화섬쌀', 지역 대표 먹거리로 우뚝


화도 '고려궁지'에 비가 내렸다. 궁지 위에 펼쳐진 연두빛 잔디 위로, 송악산에 서 있는 나뭇가지들 위로 장맛비가 내렸다. 물기를 머금은 나뭇잎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선두포에도 장맛비가 내렸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 위로, 뻘 위에 얹혀져 있는 보트 위로 무수한 빗방울들이 떨어졌다.  

70년 전인 1947년 여름, 오스굿이 강화도에 머물 때에도 비가 내렸을 것이다. 오스굿은 당시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환경, 지리와 교통, 산업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오스굿의 눈에 비친 강화도는 셀 수 없이 많은 언덕과 골짜기로 울퉁불퉁한 지형을 이루고 있고 몇 개의 언덕들은 매우 높고 계곡들은 아주 넓었다.  

소나무가 많은 곳이었으나 땔감을 찾는 사람들 때문에 언덕들은 볼품없이 변해 버렸지만, 오래된 나무들은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보호되고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절의 경내에는 희귀한 때죽나무들이 눈에 띄며 계절에 따라 진달래를 비롯한 많은 꽃들이 피어났다. 사슴과 토끼, 족제비, 오소리, 늑대와 꿩이 산야에 있었으며 무수히 많은 작은 새들과 뱀, 독충들이 강화도의 자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화는 당시 쌀과 도자기, 화강감의 주요 산지였다. 도로엔 자갈이 깔려 있었고, 그 위로 낡은 버스들이 지나다녔다. 자갈길은 북서쪽으로 35마일 떨어져 있는 섬 끝의 큰 마을에서부터 내륙 쪽의 3마일 떨어진 강화읍내의 포구 갑곶리 나루터까지 뻗어 있었다.

좁은 논두렁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들도 무수하게 있었다. 그 길로 소달구지가 다녔으며 3~4대의 정부 소유 트럭과 몇 대의 낡은 버스 이외에 엔진이 갖춰진 차들은 사람들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게 보관돼 있었다. 

강화 읍내를 포함해 섬 전체엔 수많은 소규모 직조공장들이 면과 비단을 생산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멋진 말을 기르던 곳이었으나 당시엔 결혼행렬 때만 말을 볼 수 있었다. 인삼은 울타리를 쳐서 세심하게 보살펴지고 있었으며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했다.

집안일에 쓰는 일용품과 농기구의 금속제 머리부분을 만드는 대장간들과, 주로 '관'을 만들어 파는 목수들도 있었다. 여관, 음식점, 다방이 가장 흔했는데 큰 규모의 다방엔 '레지'(다방종업원)들이 손님들을 반기었다. 

70년 전 자갈길은 48번국도를 포함해 말끔한 도로로 바뀐지 오래다. 얼마전 석모도를 잇는 '석모대교'가 개통되고 앞서 '교동연륙교'가 열리면서 강화의 주요 섬들은 자동차로 오갈 수 있게 됐다.  

강화도엔 1969년 완공했다 노후해 폐쇄한 구 강화대교와 1997년 새롭게 놓은 강화대교, 2001년 완공한 초지대교가 섬과 육지를 연결시켜주고 있다. 좁은 논두렁으로 이어지는 무수한 작은 길들은 관광객들의 승용차가 오가는 관광국도로 변모했다.

강화군민들은 3만1529대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가구당 1.03대의 꼴이다. 이때문에 연간 239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70년 전 14개면, 275개의 구, 1565개의 반은 1읍, 12면, 186개리의 행정구역으로 바뀌었다. 

강화는 농업과 어업이 여전히 경제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 현재 1000여개의 펜션이 운영 중이며, 고려궁지, 광성보, 전등사, 외포리와 같은 곳은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끌어 당기고 있다. 국가지정 문화재 33개, 지방지정문화재 79개, 향토유적 19점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석모대교가 개통하면서 주말만 되면 섬의 주요도로가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최근엔 인천시가 '고려의 고도' 지정과 '5진7보53돈대'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관방유적을 추진하면서 강화도는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대표 관광지로 떠오르는 중이다.

마침 정부가 강화도에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를 설치하고, '2018 올해관광도시'로 선정하면서 강화도의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다. 염전은 사라졌지만 인삼은 여전히 주요한 농작물로 다뤄지고 있으며 품질이 뛰어난 '강화섬쌀'도 풍부하게 생산하고 있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강화토박이' 남궁호삼 원장 "그가 선두리 왔던 시기, 국내 최초 문화원 탄생"

 

 

"코넬리어스 오스굿이 선두리를 찾은 것과 강화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원이 생긴 것과는 일정한 연관성이 있을 것입니다." 

남궁호삼(62) '남궁내과' 원장은 "미국의 인류학자가 강화도를 찾으면서 우리나라 문화가 세계에 소개되던 시기 외국의 문화 역시 강화도에 들어왔다"며 "강화문화원(당시 강화문화관)이 그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스굿이 강화도를 연구한 시기가 1947년입니다. 그 시기 한 미군대위가 문화원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1948년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원 잡지도 강화도에서 발간됐지요."

남궁 원장의 말처럼 강화에선 1948년 2월 20일 <강화>란 잡지가 탄생한다. 우리나라 문화원 가운데선 가장 먼저 발간한 잡지다. '강화문화관기관지' 제1호라고 쓰여진 이 책은 권두언-강화의 봄, 강화논단, 연구여담, 지상·표창, 문화관 페이지 등으로 짜여졌다. 강화의 역사를 볼 때 이같은 문화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강화도는 산업과 서구문물이 가장 빨리 들어온 곳입니다. 한 때 강화엔 집집마다 화문석이 깔려 있을 정도로 부유한 곳이기도 했지요. 죽산 조봉암 선생의 고향이 강화이고 몽양 여운형, 백범 김구 선생을 끌어들인 것도 사상과 산업 모두 앞서가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강화도에 남다른 프라이드가 있는 것은 그의 집안이 520년간 강화도에서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궁 원장은 14대 후손이다. 그는 강화도의 문화와 사회를 이끌고 있는 '강화도시민연대'의 대표를 역임하며 좋은 강화만들기에 힘써왔고, 지금도 애쓰는 중이다. 강화도시민연대의 초대대표는 윤희선 승조회 이사장이었으며, 현재는 오교창 치과의사가 4대 대표를 맡고 있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