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표관 있던 답동사거리는 지금

by 김진국기자 2016. 12. 26.



동4거리 위로 차들이 교차하며 질주한다. 답동4거리에서 'KEB하나은행'(인천 중구 제물량로 154)은 단연 돋보이는 건물이다. 이 자리에 처음 은행이 들어선 때는 1974년 11월 3일이다. '외환은행'이었다.  

그 전엔 '키네마극장'이 운영되고 있었다. '벤허'와 같은 영화를 상영하던 곳이다. 더 이전 이 자리엔 표관(瓢館)이 있었다. 표관은 1909년 새로 지은 상설영화관이다. 797개의 객석을 갖고 있던 표관은 영화는 물론 극단이나 악단의 음악 공연도 함께 하는 문화시설이었다. 광복 이후 미군이 'Sea Horse Theater'로 사용했으나 미군 철수 뒤엔 시립문화관으로 운영하던 중 6·25전쟁 중에 불 타 없어진다. 이후 키네마극장이 들어섰다가 1974년 은행건물을 신축한 것이다. KEB하나은행 뒷쪽의 주차장은 동방극장이 있던 자리다.  

30, 40년전 만 해도 과거 인천 중동구 지역엔 10개가 넘는 영화관이 번성했다. 개봉관은 동방, 키네마, 애관, 인현극장 정도였는데 동방과 키네마는 주로 외화를, 애관은 방화를 상영했다. 이와 함께 인현, 장안, 세계, 자유, 현대, 미림, 오성, 피카디리 극장 등은 2편을 동시에 상영하는 재상영관이었다.  

산업화 시대 극장은 실업자들의 천국이었다. 필름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사선의 줄이 그어지고 상영 도중 클라이맥스에서 필름이 끊겨 암전이 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동시상영하는 극장에 들어갈 경우 서너 시간은 금세 지나갔고 한 번씩 더 보면 한나절을 때울 수 있었다. 나무상자를 천으로 묶어 목에 걸고, 상자 옆을 손바닥으로 탕탕 두드리며 "오징어 있으아~ 땅콩 있으아!" 하고 악을 쓰듯 소리치는 극장 안 판매원도 60, 70년대에 볼 수 있던 극장 풍경이다.

동시상영 하는 극장들의 경우 필름값을 아끼기 위해 극장끼리 필름을 맞바꿔가며 상영을 하기도 했다. 극장직원들이 자전거에 필름을 싣고 이 극장에서 저 극장으로 옮겨다니는 시간 동안 관객들은 멍하니 기다려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지금은 영화제작비용의 30%를 홍보마케팅 비용으로 사용할 정도지만 당시 영화홍보는 극장간판이 전부였다. 대부분의 극장들은 극장간판을 그리는 장소를 극장 옆에 두었다. KEB하나은행의 주차장은 극장간판을 그리는 작업장이었다. 학생들은 이 작업장이나 화장실과 같은 '개구멍'을 통해 몰래 극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극장에선 이따금 귀를 잡힌 학생들이 밖으로 끌려나오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이 사복을 입고 몰래 들어갔다가 선도교사에게 적발돼 끌려나오는 것이었다.  

인천의 옛 극장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 인천엔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관들이 성업 중이다. 다만 1895년 협률사란 이름으로 등장한 중구 경동의 '애관극장'만은 독자적 멀티플렉스로 변신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은행건물 오른편의 'MG새마을금고' 역시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다. 본래 이 자리엔 1973년 경기매일신문과 함께 폐간된 경기일보가 있었다. 지하의 '국제다방'엔 경기일보 윤전기가 돌아갔었다.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국제다방에선 고여 우문국씨와 같은 미술인들이 전시회를 갖곤 했다. 경기일보가 폐간된 뒤엔 '국제경양식'이 장사를 시작하기도 했다.

 

1909년 797개 객석 '표관' 운영 … 극단·악단도 공연
6·25 전쟁 중 소실 … 1974년 '외환은행' 건물 신축 
답동4거리선 김대중·김영삼 등 유명 정치인 유세 



표관자리에서 대각선으로 보이는 공원은 '답동소공원'이다. 이 곳은 본래 인천 최초의 고속버스인 '풍전고속'을 인수한 '한진고속'의 땅이었다. 처음 인천의 종착역이던 이 자리는 이후 버스정비소로 변한다. 고속버스들은 이 자리에서 정비를 받은 뒤 동인천역으로 가 출발 클랙슨을 눌렀다. 한진은 이후 이 땅을 인천시에 기증했는데, 시가 방치하고 있다가 한진이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자 부랴부랴 공원으로 만들어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됐다. 표관자리 건너편 '성모시니어요양원'은 한국전력 인천본부가 있던 자리다. 김학균 인천예총 사무처장은 "표관자리에 외환은행이 들어서면서 내가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며 "맞은 편 한전 지하에서 이발을 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답동4거리에선 김대중, 김영삼과 같은 유명한 정치인들의 정치유세가 이뤄지기도 했다.

멀티플렉스가 대세인 시대, 구운 오징어를 씹으며 보던 필름영화의 추억, 아날로그적 정서는 그리움으로만 남았다.  

/글 김진국 기자·사진 유재형 사진가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