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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인천역과 인천관광안내소

by 김진국기자 2016. 12. 14.


"이

역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인천역 입니다, 인천역 입니다…."

저 만치서 열차가 천천히 다가온다. 푸른 옷을 입은 경인전철 1호선이 겨울의 플랫폼에 사람들을 쏟아낸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옷깃을 세운 채 종종걸음을 걷는다. 일부의 사람들이 역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지하로 내려간다. 올 초 개통한 수인선으로 갈아타려는 사람들이다.

'삐-빅' 사람들이 승객들을 통제하는 게이트 우측 센서에 카드를 대고 하나 둘 역을 빠져나간다. 역무원이 일일이 표에 펀칭을 찍던 시대, 삼발이 게이트에 버스회수권만 한 MS카드를 넣고 개찰구를 통과하던 시절을 거쳐 지금 사람들은 교통·신용카드를 시대를 살고 있다.

인천시 중구 제물량로 269 '인천역' 건물은 와이셔츠를 입은 모범생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어느 영화에 등장했던 시골의 작은 역처럼도 보인다. 인천역은 1899년 9월18일 처음 인천시민들을 만난다.  

경인선이 개통된 때다. 1908년 보통역으로 시작한 인천역은 1943년 '인천부두역'으로 이름을 바꾼다. 지금의 역사는 1950년 6월 30일 6.25전쟁과 함께 불 타 사라진 것을 1960년 새로 지은 것이다. 사람들은 한 때 인천역을 '하인천역'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난해 창문을 새로 달고 지붕, 바닥 등을 수리했지만 외관은 여전히 1960년대 모습 그대로다. 현재 '복합역사'로 개발하기 위한 용역을 진행 중이지만 인천역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개발방식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개설 초기 인천역사는 화물을 주로 처리하는 곳이었다. 그러던 중 1974년 8월15일 수도권 전철이 개통하면서 승객수송 위주 철도로 바뀌었다. 지금은 하루 262회의 차량운행에 1만2000여명~2만여명이 이용한다.  

수인선 역시 하루 166차례 열차가 들어오고 나가며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준다. 물론 지금도 인천항에 유연탄, 철강, 시멘트 등을 실어나르는 화물열차를 하루 4~5차례 움직이는 중이다. 사실 택배회사가 활성화 되기 전인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인천역의 열차는 시골 고향집에서 보낸 쌀과 김치 같은 것들을 쏟아냈었다.  

 

1899년 경인선 개통 → 1943년 인천부두역 명칭 변경

1950년 6·25 전쟁과 함께 불타 사라져 … 1960년 재건

올 초 수인선 복원 … 월미은하레일 활용 방안 모색중

 



인천역사 앞, 돌을 깎아 만든 증기기관차 조각물이 '한국철도 탄생역'이란 사실을 알려준다. 중구가 관광객들에게 인천역을 브랜딩하기 위해 만든 조각작품이다.

인천역사를 정면으로 오른 편의 작은 집은 '인천시 관광안내소'다. 안로 들어가자 왼편은 인천관광공사가 운영중인 '시티투어'를, 오른 편은 인천관광을 각각 안내하고 있다.

얼마전 탑승객 1만명을 돌파한 시티투어는 여러 이벤트로 관광객을 유혹하는 중이다. 인천시 관광 안내자는 "주말엔 300여명 이상이 안내소를 찾는데 그 가운데 3분의1 정도는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차이나타운을 앞에 둔 인천역 일대는 2016년 인천관광의 시발지 역할을 자처한 것처럼 보인다.  

인천역사 왼편의 '월미은하레일역사'는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은 뒤 애물단지로 방치된 상태다. 현재 관광용 모노레일로 활용할 방안을 찾고 있지만 말만 무성할 뿐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 하는 상황이다.  
우리 기억 속에 기차역은 그리움이고 기다림이었다. '말 타고 비단구두를 사 가지고 오신다던' 오빠를 기다리는 누이동생의, '삐까번쩍'한 양복을 입고 양 손에 선물을 가든 든 채 금의환향하는 자식을 기다리던 어머니의 그리움이고 기다림이었던 것이다.

KTX가 전국적 망을 구축하고 하루가 다르게 도로가 개설되는 지금, 그 옛날 기차는 추억으로만 남았다.  
"이제 곧 열차가 출발하니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곧 열차가 출발할 예정이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열차에 탑승해 주시기 바랍니다."  

역무원의 안내방송이 인천역 플랫폼에 차갑게 울려퍼진다.

/글 김진국 기자·사진 유재형 사진가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