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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사라진 인천의 언론 대중일보

by 김진국기자 2017. 3. 27.

샘추위가 스쳐 지나간 봄날의 신포동 하늘이 해맑다. 이런 날은 평소 카키빛을 띠는 인천 앞바다의 빛깔도 짙푸르게 반짝일 것이다.

인천의 오래된 양식당인 '등대경양식'은 누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옆으로 외항선원들이 드나드는 '시멘스클럽'이 붙어 있다. 클럽을 등지고 신포동 쪽을 바라보는데 건너편으로 삐죽하게 솟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평면으로 볼 때 정사각형이 아닌 마름모꼴 형태를 한 이 건물은 한눈에 봐도 요즘 스타일은 아니다.

1층에 '초록달팽이', '수미포차'란 주점이 있고 2층은 'AND 7080' 노래방, 3층은 '천지전통마사지24'란 간판을 내건 이 건물의 주소는 중앙동 4가 8의 33. 이 조금은 오래돼 보이는 7층 건물이 반 세기 전 집단지성 생산과 사회개선 열정으로 가득찬 '인천언론의 메카'였다니…. 광복 이후 수도권 최초의 민간신문인 '대중일보'의 후신 '경기매일신문' 사옥이 바로 이 건물이었다.

1959년 8월20일에 등록한 이 건물은 처음 '연와조(기와집) 도단즙2계건(함석지붕 2층)'이었다. 한 층의 면적은 85~89㎡ 정도다. 대중일보 창립자 송수안의 아들 송영호 사장은 1967년 12월30일 이 건물을 구입, 7층으로 증축한다. '경기매일신문사' 신사옥이던 1971년만 해도 박정희 군사정부의 시퍼런 칼날을 맞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2년 뒤인 1973년, 언론통폐합의 악몽은 현실이 됐다.  

지금도 높은 빌딩에 속하는 이 건물은 당시 경기매일신문의 사세를 충분히 짐작하게 만든다. 경기매일신문사는 이 건물도 모자라 건너편에 위치한 벽돌건물을 인쇄 부서인 '동판부'로 사용했다.  

 

대중일보 후신 '경기매일신문' 1971~1973년 사옥으로 사용 
군사정부 언론통폐합으로 강제 폐간 




인천 신포동에 있었던 대중일보 사옥은 인천 언론의 '요람'이었다. 1945년부터 1973년까지 대중일보 뒤를 이은 인천신보, 기호일보, 경기매일신문은 모두 중앙동 4가에 자리잡고 인천 언론의 자존심을 이어갔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상점들이 즐비했는데 인천시청(현 중구청)과 가까운 중심가였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일대는 여러 상점이 몰려 있는 중심상권이다. 인천항, 상인천역, 인천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라 입지 조건이 좋기도 했다.

더욱이 광복 전후 인천 시민들의 문화의식이나 실업가들의 경제력은 서울 등 다른 도시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개항문물을 받아들인 인텔리들도 상당히 많았다. 광복 직후 대중일보가 인천에서 창간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토양 때문이었다. 

그런 대중일보의 후신인 경기매일신문이 어두운 역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진 때는 1973년. 박정희 군사독재는 통폐합이란 미명 아래 인천의 의식 있는 언론을 모조리 말살한다.

이와 관련 종합계간지 <황해문화>(2017년 봄호·통권 94호)는 비평에서 대중일보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뤘다. 이희환 <황해문화> 편집위원은 수원에 본사를 둔 한 언론사의 무모한 대중일보 독점 승계 주장을 비판하는 자신의 글에서 "대중일보 후신인 경기매일신문은 유신정권의 강압 아래 1973년 8월 31일자로 종간호를 내고 사라졌다"며 "송수안 발행인 등은 인하공사(중앙정보부 인천분실)에 끌려가 시달리며 강제 폐간 절차를 밟았고 수원으로 옮겨간 '연합신문'을 모태로 한 '경기신문'에 기자의 필봉을 강제로 넘겨주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방지 통폐합의 수혜를 입어 탄생한 신문이 일방적으로 지령을 승계하려면 언론통폐합의 아픔을 겪었던 선배 기자들과 유족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2017년 봄, 경기매일신문이 위세를 떨치던 건물은 지금 개인 소유의 상가로 남았다. 유흥업소가 들어선 건물을 아래에서부터 위쪽으로 올려다 본다. 얼마전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결정과 대중일보 강제통폐합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글 김진국 기자·사진 유재형 사진가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