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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 나의 길

어느 중견 기자의 이야기

by 김진국기자 2014. 9. 21.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세상의 많은 부분이 잘못돼 있으며, 자신이 그걸 개선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자본가보다는 노동자의 편에, 권력자보다는 힘 없는 서민의 편에 서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자가 된 이유도 잘못된 권력과 자본을 비판하며 노동자와 농민, 서민의 목소리를 전해주고 싶어서였지요.
그는 발로 뛰는 기자이고 싶었고, 어느 정도 실천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회부에서 시작해 정치, 경제에 이르기까지 그는 신문사의 여러 부서를 거치며 기자의 관록을 쌓아 왔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의 몸도 마음도 강물처럼 흘러왔습니다.
절벽에서 방금 떼어낸 날카로운 원석 같던 성격은 둥근 조약돌처럼 변했고, 성난 것 같던 표정은 은은한 미소로 바뀌었습니다.
두주불사였던 그는 지금 술보다는 차나 커피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의료보험료 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게 된 때는 이미 수년 전이지요.
나이가 들면서 그는 자신이 젊었을 때 보지 못 했던 것을 비로소 하나 둘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관용과 너그러움 뭐 그런 것들입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사회비판을 해야 하는 기자의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유수 같은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며 자위하곤 합니다.
그는 가끔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을 보며 자괴감을 갖기도 하지만, 이런 저런 합리화를 통해 삶을 지탱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잘 살아오고 있는 이유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세상은 절대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타인들의 직간접적 도움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진리를 알게 됐습니다. 마흔이 넘는 나이에 본 첫딸의 이름을 '세상에 감사하며 살아가라', '세상 사람들에게 감사한 사람이 되어라'란 의미의 세은이라 이름지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많이 무디어졌지만 그는 지금도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있으며,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공들여 취재한 소스로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과거 그는 자신이 사회의 빛과 소금 같은 거창한 존재로 살아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의 벽돌 한 장을 쌓는 존재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때떄로 그는 사회나 국가보다 자신의 가족을 더 생각하곤 합니다. 평범한 중년 남자, 소심한 가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만나기 보다는, 현재 알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남은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가능한 적을 만들지 않고 싶어하며, 물질이든 정신이든 받기보다는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내년이면 지천명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가슴 한 켠엔 아직 그가 꿈 꾸는 세상이 존재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사상, 학연, 지연, 혈연의 경계가 사라지는 '사회대통합'을 위해 작은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통일도 그가 바라는 염원입니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실천을 못하는 나약함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어린시절을 서울에서 보냈지만 자신이 인천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천에서 보낸 세월이 서울에서 보낸 시간보다 훨씬 길고 그 세월만큼의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본적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인천시 계양구 효성동으로 바꾼 것은 바로 자신이 앞으로도 인천사람으로 살아가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인 셈입니다.
그는 1994년 9월 12일 인천일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엊그제 만 20주년을 맞았으며 현재 인천일보 논설실장 겸 문화부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 2014년 9월 12일 인천일보 입사 20주년을 돌아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