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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 쉬는 인천여행

보문사와 전망좋은 집

by 김진국기자 2016. 9. 16.

아무리 생각해 봐도 635(신라 선덕여왕4)에 창건한 석모도 '보문사''팔만대장경' 관련한 흔적이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바로 옆 강화도에 팔만대장경 판각을 주도한 '대장도감'(大藏都監)이 있었고, 이를 150년 간 보관한 '대장경판당'이 존재했다면 보문사에도 당연히 팔만대장경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존재해야 했다. 팔만대장경 취재 5년 차가 다 돼 갔지만 보문사와의 연관성은 100년 묵은 산삼을 발견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인천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오용섭 교수가 찾아낸 '1300년대 초 보문사에 팔만대장경 인본 3질이 있었다'는 기록은 중국 최대 총서인 <사고전서>(四庫全書)'천하동문''고려국대장이안기'에서 발견됐다. '고려국대장이안기'에 기록된 보문사의 팔만대장경 이야기는 이렇다.

 

1304(대덕8년 갑진년) 중국 남쪽에 '철산'이란 선종 계통 승려가 있었다. 이 철산화상이 고려에 와 부처님 말씀을 설파했는데 그가 발 닿는 곳마다 고려의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1, 2년 뒤 고국으로 돌아갈 때가 된 철산화상이 보문사를 찾았다. 그런데 여기서 대장경인본 3질을 보게 된다. 철산화상은 "대장경 3질이 무슨 인연으로 보문사에 있는 것이냐"고 관심을 보였고 그러잖아도 선물을 주려했던 고려의 관리들이 1질을 주자 기뻐하며 돌아갔다. 3질의 대장경인본 가운데 2질은 옛날의 임금과 신하가 안치한 것이고, 1질은 당시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군부판서 상호군인 허평과 서원군 부인인 염씨 요인이 바친 것이었다. 철산화상은 그 중 허평 부부가 봉안한 대장경 인본을 가져갔다.

 

'기록의 발견'은 팔만대장경과 연관한 보문사의 역사를 최초로 밝혀냈다는 의미도 있지만, 팔만대장경이 인천 강화도의 것임을 재확인하는 중요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삼별초, 팔만대장경의 외포리

보문사에 들어가기 위해선 '외포리선착장'에서 '삼보해운'이 운행하는 배를 타야 한다. 안개만 끼지 않는다면 아침 일찍부터 오후 7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므로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강화대교를 건너 15분쯤 달렸을까. 외포리선착장에 닿았을 때 갈매기떼가 선착장의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지금 외포리는 전국 최고 품질인 '강화새우젓'을 파는 수산시장이 들어서 있지만 745년 전, 고려 무신정권의 최정예부대인 '삼별초'가 권토중래를 선언하며 떠나간 곳이었다. 1270년 고려가 개경으로의 환도를 결정하자 삼별초는 반란을 일으킨다. "우리야말로 고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고려인으로 몽골과 끝까지 항전할 것이다." 그렇게 외포리를 떠난 삼별초는 진도, 제주도로 후퇴하며 3년 간 저항하다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전멸한다. 그러나 실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 명문와(銘文瓦)'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것이다. 계유년은 삼별초가 멸망한 1273년인데 오키나와에서 고려의 기와가 발견됐다면 제주에서 패퇴한 삼별초군이 오키나와로 건너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외포리선착장은 1398년까지 강화도 대장경판당에 보관하던 팔만대장경 이운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팔만대장경은 외포리선착장을 떠나 서울 용산강으로 갔다가 지금의 합천 해인사로 이운된다.

 

석모도나 보문사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차를 탄 채로 배에 오르고 10분 안에 배에서 빠져 나온다. 차 안에 있는데도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갈매기들은 움직이는 배를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먹이를 달라고 끼룩거린다. 인간의 문명 혹은 문화에 맞춰 생존방식을 바꿔야 하는 동물들의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걸까. 야생의 파괴는 생태계의 교란, 먹이사슬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인간과 동물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편하고 감상적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외포항을 떠나지 않는 저 새들은 어쩌면, 외포리를 떠났던 삼별초군이 환생한 것은 아닐까.'

 

배를 탄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석모도선착장'에 닿는다. 하선하여 7, 8분쯤 운전을 하며 도로를 따라가다보니 둥글넙적한 바위산을 등지고 있는 사찰이 나타났다. 보문사다. 양양 낙산사, 남해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도량인 보문사는 외형적으로도 수려한 절이다.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 아래 비스듬한 바위면에 새겨진 '마애관음좌상', 22나한상이 모셔진 '석굴법당', 백옥으로 만든 '오백나한상', 너비 13.5m에 높이 2m의 초거대 부처님인 '와불전'. 보문사는 그 역사만큼이나 볼거리가 많은 사찰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마애관음좌상은 보문사를 상징하는 중요한 아이콘이다.

 

배선주 주지 스님 일가의 삶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 당시 보문사 주지 배선주 스님이 금강산 표훈사 이화응 선사와 함께 새긴 좌불상이다. 그냥 봐서는 그리 크게 보이지 않지만 높이 920, 너비 330m나 되는 거상이다. 이 석불에 관한 이야기를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배선주 스님의 첫째 아들인 배정만(85) 옹이다. 강화군의원으로 3선을 지낸 그는 현재 보문사 입구 식당인 '전망좋은 집'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어머니가 그러는데 아버지가 맨날 눈썹바위에 올라가셔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그러셨다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화응 선사와 함께 바위에 부처님을 새기기 시작하셔서 3년 만에 완성했지요. 그 때는 전기도 없고 아무 것도 없잖아요. 오직 석공의 손으로만 새긴건데, 그 석공의 손자가 아직 석모도에 살아요. 구름 운자 운씨 집안이지요."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출생인 배선주 스님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6살 때 전등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는다. 이후 의정부 원통암으로 간 스님은 35살 되던 해 보문사 주지로 부임한다.

 

"아버지가 원통암 뒤 바위에서 일주일을 죽어라 기도를 했는데 기도가 끝나는 날 웬 동자승이 나타나 열쇠와 자물쇠를 주더랍니다. 깨보니까 꿈이거든. 당시 보문사는 전등사 말사였는데, 그러니까 인사권이 있던 전등사에서 큰스님이 저희 아버님한테 "너 보문사 주지로 가라" 해서 이리 오셨다는 겁니다."

 

배선주 스님은 목소리가 좋고 염불에 뛰어난 승려였다. 조용하던 보문사는 신도들로 넘쳐났고, 그 가운데 배 옹의 어머니도 있었다.

 

"아버지가 36살이고 어머니가 21살인데 결혼을 했죠. 비구에서 대처승으로 돌아선 거지. 그 해 나를 낳고 내 밑으로 남동생 둘, 여동생 둘을 낳은 뒤 내가 11살 때 4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어요."

 

배 옹의 형제들은 모두 생존해 있으며 여동생 한 명은 비구니로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6·25전쟁 기간에도 배 옹과 가족들은 보문사를 떠나지 않는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섬에 있던 스님들조차 배를 타고 남쪽으로 떠났는데도 말이다. 그 때 홀로 보문사를 지킨 사람이 바로 배 옹의 어머니인 고 김암전 여사다.

 

"전쟁 3년 동안 아무도 없으니까 어머니 혼자서 보문사를 지키며 관리를 하셨지. 인민군은 안 들어왔는데 인천상륙작전 때 도망가던 인민군들이 잠깐 들어와 20일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인민군들이 들어와서 학살하거나 그런 건 없었는데 태극기를 갖고 있던 사람 한 명을 죽였어. 그리고는 후퇴하느라 바빠서 여기저기에 따발총만 실컷 쏘고 지나갔지."

 

전쟁이 끝난 뒤 보문사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고, 이후 60여년을 고요하면서 도도하게 흘러왔다.

 

 

 

'전망좋은 집'6000원짜리 된장찌개백반엔 기름진 석모도 쌀밥과 8가지 반찬이 나온다.

보문사를 찾는 사람들이 무심코 들어가는 식당이 보문사 입구 '전망좋은 집'(032-932-3137)이다. 이 식당은 다름아닌 배정만 옹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기름진 석모도 쌀밥과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꽃게탕이다. 여기에 벤댕이회무침과 구이, 해물파전, 게장정식, 산채비빔밥도 맛이 뛰어나다. '전망좋은 집'에서 꽃게다리 한 두개가 들어간 '된장찌개백반'을 먹고 나오는데 행상을 차려놓은 백발의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목도리를 두른 채 눈만 빼꼼이 내놓은 할머니가 기자에게 아무 말 없이 땅콩 두 세알을 집어 내민다. 기자가 머뭇거리자 할머니는 '안 사도 좋으니 맛이나 보라'는 표정으로 땅콩알 든 손을 흔든다. 석모도, 보문사엔 그렇게 섬사람들의 오래된 삶과,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부처님의 미소가 공존하고 있었다.

/·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635년 창건한 보문사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외형적으로도 볼거리가 많은 천년고찰이다. 최근엔 특히 팔만대장경 인본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됨으로써 팔만대장경 불사에 적극 참여한 사찰임이 새롭게 알려지게 됐다.

<보문사는 >

보문사는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 낙가산 중턱에 자리한다. 신라 선덕여왕 4(635)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희정대사가 내려와 창건한 절이다. 이 곳엔 마애석불좌상은 물론, 나한상을 모신 석실, 700년 수령의 향나무, 300여명의 승려와 수도사를 먹이던 맷돌 등이 있다. 석모도는 강화도 외포리선착장에서 삼보해운(032-932-6007)을 타면 10분 안에 닿는다. 여기서 6, 7분 도로를 따라가다보면 보문사를 만난다. 032-933-8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