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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신문의 날을 보내며

by 김진국기자 2018. 4. 19.

 

 

 

 

러니까 신문씨가 행방불명 됐다는 걸 안 건, 지난주 우리 집이 한바탕 뒤집어졌을 때였어요. 나쁜 일로 뒤집어진 건 아니었고요. 미세먼지로 텁텁하기만 한 봄, 집이라도 새로 단장해서 기분전환이라도 하자, 뭐 그런 의도랄까요. 때가 탄 벽지를 띄어 내고 푸른 페인트를 바르려던 참이었어요. 페인트는 바닥에 묻으면 닦아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니까, 뭐라도 깔고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 생각난 것이 신문씨였어요. 저는 분리수거장으로 뛰어 내려갔어요. 하루 소식을 전해주고 맡은 바를 끝낸 신문씨는 으레 그곳에 누워있곤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분리수거장에 내려갔을 때, 수많은 종이 쓰레기들 사이로, 회색빛 빳빳한 종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을 때, 그때야 더 이상 그곳에는 신문씨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아파트 단지에 신문씨가 찾아오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요? 아직도 이른 아침이면 신문씨가 우리 집 앞에 찾아왔던 나날들을 기억하는데요. 아빠가 신문씨를 집어오느라 문을 열면, 그 새 들어온 찬바람이 아직 잠에 들어있는 절 깨우곤 했었죠. 그런 건 정말 싫었지만, 그래도 아빠가 식탁에 앉아 당신의 어깨너비로 신문을 펼쳐 읽는 건 정말 멋진 모습이었어요. 그렇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는 신문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요. 신문씨는 현관문의 발치에서 얌전히 우릴 기다렸지만 우리는 핸드폰을 보며 걷느라 너무 바빴죠. 신문씨가 이른 아침 헐레벌떡 가져온 소식은 지난 새벽 우리가 핸드폰을 통해 다 봤던 내용이었어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신문씨는 그렇게 희미해졌어요. 그러다 신문씨의 발길이 언제부터 완벽히 끊기게 됐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아요.

 

고등학생이 됐을 때, 웃기게도 저는 기자를 꿈꿨어요. 사라진 신문씨를 다시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서, 기자라는 직업이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러나 저는 이 학과에 들어와서 신문씨가 몰락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제는 아무도 신문씨를 찾지 않는대요. 그건 단지 저희 아파트 단지의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신문씨를 잊어가고 있던 거에요. 저는 그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신문이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그래서 교수님의 질문에 손을 들지 않았죠. 그러나 한평생 신문씨를 만들어오고, 그 일을 사랑해 마지않았던 교수님조차 이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어요. 대학교 3학년이 된 지금, 저는 언론이 아닌 광고홍보 분야를 진로로 삼게 됐어요.

 

머나먼 시절, 여러분은 일제의 탄압에도 독립신문대한매일신보를 만들어냈죠. 동아일보에 속해있던 180명의 여러분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권 체제에서도 스스로 언론을 쟁취할 것을 외쳤었구요. 정권이라는 벽에 맞서 언론을 지켜냈던 여러분께 신문씨의 몰락은 상상이나 했던 일일까요. 그러나 47다가온 신문의 날 에는, 집 안을 깨끗이 하기 위해 신문을 찾는 저의 부끄러운 초상과,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회의 모습이 남아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말이에요. 요즘은 조금 다른 소식이 들려와요. 신문씨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됐대요. 언제나 빼곡한 글씨로 소통하기 좋아했던 신문씨가 이제는 사진으로, 그림으로, 소리로 말한대요. 신문씨를 쓸 수 있는 건 기자뿐 아니라, 모든 시민이 됐대요. 또 이제는 현관문 밖이 아니라 핸드폰에, 컴퓨터에 언제든 찾아볼 수 있는 곳에 존재하고 있대요. 나름의 방식으로 신문씨는 몰락을 이겨내고 생존하고 있던 거에요.

 

, 걱정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아요. 독립돼 스스로의 목소리를 외쳐야 하는 언론이 인터넷 상에서 자본주의와 혼합돼 정체성을 잃게 될까 봐 두려운 거죠. 또 익명의 공간 속, 무수한 정보의 오류들에 휩쓸려 수많은 피해를 양산할까 봐 무서운 거구요. 슬프게도 신문씨는 여전히 그런 과정을 겪고 있어요. 그렇지만 나아질 거예요. 대중은 여전히 언론의 숭고함을 부르짖고 있으니까요. 영화 더 포스트워싱턴포스트가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 보도를 이뤄내는 모습을 보여줬어요. 영화 1987은 정부의 은폐에도 박종철열사의 죽음을 밝혀낸 모습을 그렸죠. 대중은 그러한 영화들에 열광했어요. 여전히 그들의 알 권리를 위해 힘썼던 언론을 그리워하고 있던거에요.

 

아주 옅어졌다지만 신문씨에 대한 대중의 그리움은 여전히 잔존해요. 그 속에서 신문씨는 꾸준히 변화하고 있구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말아요. 여전히 신문씨는 안녕하시답니다./배주경

 

사진출처 : 인천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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