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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비친 인천 100년

4월7일은 신문의 날

by 김진국기자 2018. 4. 5.

사진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기자들이 1년 중 쉴 수 있는 날은 꼭 두 번뿐이었다. 신문의 날(4월7일)과 어린이날(5월5일)만 펜을 놓는 것이 허용됐다. 경찰서와 병원응급실, 사건 현장을 밤낮 없이 누벼야 하는 기자들에게 주말과 공휴일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렇지만 신문의 날과 어린이날만큼은 모처럼 휴가가 주어졌다. 그날만이라도 가족과, 자녀와 지내라는 의미였다. 신문의 날은 1896년 4월7일 창간한 순한글판 신문 '독립신문'(獨立新聞) 창간일을 기념해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1957년 제정했다. 신문의 날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창간일(1883년 10월30일)로 정하지 않은 것은 신문의 탄생배경과 연관성을 지닌다.  

'강화도조약'(1876) 뒤 일본은 조선의 지식인들을 일본으로 초청한다. 신사유람단이 그렇게 일본땅을 밟은 시기는 1881년 4월10일~7월2일이었다. 신사유람단엔 개화파인 박영효와 유길준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며 1만엔짜리 지폐의 주인공이기도 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집에 유숙하게 된다. 이 기간 후쿠자와는 "조선도 개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고 세뇌시킨다. 박영효와 유길준의 귀국일이 다가왔다. 귀국 전날 후쿠자와는 이렇게 묻는다. "신문을 만들겠느냐?" 개화파가 "그렇다"고 답하자 후쿠자와는 자기 제자인 이노우에(井上角五郞)를 딸려 보내 '한성순보'의 편집고문을 맡도록 한다. 이노우에는 왕실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으며, 쇄국정책으로 세계 정세에 눈이 어두웠던 조선은 일본의 눈으로 세계정세를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경계의식은 언감생심이었다. 18세기 '왜 왕과 귀족만이 정치를 독점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상인·수공업자들이 만든 서유럽 신문의 탄생과는 근본적 차이가 있는 셈이다. 서유럽 신문은 정치적 평등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권리획득을 위한 정론지였다. 

올해로 62회를 맞는 신문의 날 표어는 '가장 좋은 적금, 신문 읽는 지금'이다. 62년전 제1회 신문주간 표어는 '신문은 약자의 반려'였다. 시대가 흐르면서 내용을 담는 그릇인 매체는 종이신문에서 온라인으로 바뀌고 있고, 사회·정치 의식이 강했던 콘텐츠도 여행·트렌드·건강과 같은 일상생활로 부드러워졌다. 분명한 것은 신문이 여전히 현대사회와 호흡하며 세상을 좋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문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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